[영화 리뷰] <언데드 다루는 법>
토라는 동성 연인 엘리자베트를 먼저 보냈다. 연로하지만 별 탈 없어 보이고 평온하게 관에 누워 있으니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고 토라는 이제 혼자 여생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오슬로 전체에서 원인불명의 정전이 있은 후 엘리자베트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 무슨 일인가.
스탠드업 코미디언 데이빗은 아내와 친구처럼 지낸다. 아내는 언제나 그를 응원한다. 그날도 함께 출근했는데 천천병력 같은 소식을 받는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응급 수술을 했지만 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슬로 전체에 원인불명의 정전이 있은 후 살아났다. 병원 측에서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른다고 한다.
말러와 안나는 손자이자 아들 엘리아스를 잃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생활을 한다. 매일같이 말러는 묘지를 찾고 안나는 출근한다. 안나는 퇴근해서 자살 시도를 하고 말러가 살려낸다. 그런데 오슬로 전체에 원인불명의 정전이 있던 그날 말러는 엘리아스의 무덤을 파내 시체를 집으로 데려온다. 아이는 살아 있다. 둘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외딴섬으로 피신한다.
<렛 미 인> 원작자의 또 다른 작품
스웨덴의 유명 장르 소설가 욘 아이비데 린드그비스트는 영화 <렛 미 인> <경계선>의 원작자이자 각본가로 유명하고 또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의 작품들은 흡혈귀, 트롤 등 다분히 판타지적인 존재들을 독창적인 재해석으로 새롭게 탄생시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여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어떤 존재가 재해석될까.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도 욘 아이비데 린드그비스트가 원작자로 각본까지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렛 미 인> <경계선>이 보여준 화제성과 작품성이 연상되니 말이다. 전작들이 흡혈귀, 트롤이었다면 이번에는 좀비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콘텐츠를 통해 선보였던 좀비를 어떻게 재탄생시킬 것인가. 또 어떤 좀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번의 좀비는, <언데드 다루는 법>의 좀비는 무해한 것처럼 보인다. 폭력적이지 않거니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듯하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 걸 보니 생전의 기억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을 보고 적대감을 보이지 않으니 생전의 감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가족의 일원이 되어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 돌아온 가족을 대하는 유형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영화에서 좀비는 주체는커녕 객체, 아니 대상에 머문다. 산 사람, 정확히 말해 산 가족이 좀비, 그러니까 살아 돌아온 죽은 가족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다만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스케일이 작고 보다 더 지엽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감정을 세밀하게 비추는 데 천착한다.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감정이 가장 앞서고 또 이어질까. 어리둥절할까, 당황스러울까, 무서울까, 감격스러울까, 감사할까. 영화에 나오는 세 가족이 모두 다 다르게 반응한다. 공통점이라 하면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아 돌아왔다는 것. 그러니 감정이 더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다.
영화가 추구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아 돌아왔다는 설정, 그리고 살아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것'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기에 '말이 안 되는 일'이란 없기에 영화 속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상실'은 강도에 따라 사람을 크고 작게 뒤흔든다. 다신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고, 극단적으로 뒤를 따르는 경우도 있다.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다면 기억을 고이 간직한 채 슬픔을 안고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힘든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여 상실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숙환으로 사망한 경우,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경우, 아이가 죽은 경우까지 다양한 죽음과 상실을 접한 가족의 모습을 우선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비추기 때문이다. 울음바다일 것 같지만 하나같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왔으니 복합적인 감정을 뒤로하고 비로소 보내줄 수 있다. 진짜 이별을 경험한다. 적막 아닌 울음바다,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을 전달하고 다시 만날 것을 기도한다. 그렇게라도 제대로 인사할 수 있어 다행이다. 많은 상실과 이별이 제대로 된 인사 없이 다가와 버리지 않는가.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다. 무고하고 무해한 존재들이 속절없이 가 버린다. 안타깝다는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이별의 시대다. 제대로 이별을 고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하루빨리 청산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슬픔과 분노가 복합적으로 들이닥치니 오히려 적막이 흐른다. 우린 아직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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