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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정반대 성격의 두 사촌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나눈 '진짜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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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리얼 페인>

 

영화 <리얼 페인> 포스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데이비드 카플란과 벤지 카플란은 3주 차이로 태어난 사촌지간이다. 유대계 미국인인 그들은 어렸을 적에는 친형제처럼 지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멀어졌다. 오랜만에 만나 폴란드로 패키지 여행을 떠나는데, 할머니가 남겨 주신 돈으로 '홀로코스트 투어'를 떠난 것이었다. 그런데 둘의 성격이 정반대로 보인다.

데이비드가 수줍음이 많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인 반면 벤지는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둘은 영국인 가이드, 다른 4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바르샤바, 루블린, 마이다네크 등의 홀로코스트 유적지를 돌아본다. 전형적인 패키지 여행의 모양새를 띄는 것 같지만 벤지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예측불가능하다.

유대인 봉기 기념비에선 동상의 자세를 따라 하며 사진을 찍으려 하고, 기차에선 유대인인 자신들이 1등석을 타고 있는 게 참을 수 없다고 하고, 공동묘지에 가선 가이드에게 기계적으로 통계만 읊지 말라고 한다. 데이비드가 가이드와 참가자들에게 대신 사과하며 얘기해 주는데, 벤지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시 아이젠버그의 1인 4역

 

제시 아이젠버그는 1999년 드라마 시리즈로 데뷔한 후 10여 년 후 <좀비랜드>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소셜 네트워크> <나우 유 씨 미> 등으로 명성을 높였다. 2023년에는 감독으로도 데뷔했는데 이듬해에 연달아 작품을 연출했다. 그리고 해를 넘겨 한국에 상륙했다. 영화 <리얼 페인>은 제시 아이젠버그가 연출, 각본, 제작, 주연까지 1인 4역을 해낸 작품이다.

영화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사촌지간의 여행을 다뤘다. 제시 아이젠버그는 출연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특유의 속사포 대사와 톡톡 쏘는 듯한 제스처로 유명한데, 이 영화에선 그가 맡은 데이비드가 아닌 벤지가 그 역할을 했다. 맥컬리 컬킨의 동생으로도 유명한 키에란 컬킨이 최근 물오른 연기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그런가 하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꽤 진지하게 다룬다. 투어라는 이름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빌리는 형식이지만 화면만으로도 설명만으로도 분위기만으로도 그들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다. 슬픔과 고통은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이 세상에서 가장 나누기 힘든 게 있다면 타인의 슬픔과 고통이지 않을까.

 

정반대 성격의 두 사촌이 떠나는 여행

 

주지했다시피 <리얼 페인>은 묵직한 제목과 다르게 정반대 성격의 두 사촌이 천방지축 좌충우돌 여행을 떠나는 로드 무비다. 패키지 여행이기에 함께하는 이들이 몇몇 있으나 벤지가 좌중을 휘어잡으며 코믹 아닌 코믹을 담당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유를 알고 나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가 보이곤 하는 매우 감성적이고 감정적으로 격양된 반응이 우울증으로부터 촉발된 거라니 말이다. 그는 매순간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타인의 고통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한다. 강제수용소행 열차에 탔던 선조들을 생각하며 1등석에 타고 있는 자신을 참을 수 없어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여 그는 이 홀로코스트 투어가 못마땅한 것 같다.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가이드,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선조들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는 것 같은 참가자들, 선조의 고통을 기리는 건지 전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유적지들이 못마땅하다. 그렇지만 그가 한 발 더 나아가면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행위로 비출 수 있다. 그만큼 고통은 나누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홀로코스트 투어와 '진짜 고통'

 

올해 1월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80주년이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마주한 최악의 학살 사건이자 전쟁범죄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매년 우리를 찾아와 고통, 아픔, 슬픔 등의 감정으로 소용돌이치게 한다. 아무리 옛날, 먼 곳의 이야기라지만 채 100년도 되지 않았거니와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죄없는 이들을 학살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이른바 '진짜 고통'이 바로 거기에 있다. 수많은 고통이 우리를 무시로 찾아와 괴롭히지만, 감히 말하자면 진짜 고통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관념적 고통, 허수라고 할까. 반면 진짜 고통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말그대로 지금 당장 살아내기가 힘들다, 살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벤지가 선조들을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건 인류애의 정점이다. 그 자신도 또 다른 '진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진짜 고통'을 알아채고 반응하지 않는가. 다름 아닌 그라서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투어 참가자들 중 그만이 선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테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을 만했고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을 만했다. 각본, 연출, 연기의 삼박자가 훌륭하게 어우러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 와중에 울고 울었다. 그의 고통이, 그들의 고통이 내게로도 전해져 조금은 덜어낼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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