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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운명이든 우연이든 선택이든 인생은 아름답다 <줄리아의 인생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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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줄리아의 인생극장>

 

영화 <줄리아의 인생극장> 포스터. ⓒ해피송

 

부모님의 성화로 10년 넘게 하루에 몇 시간도 못 자며 피아노 연습에만 매진한 피아노 신동 줄리아,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파리에서의 기숙사 딸린 학교생활은 꿀맛이다. 그때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거라는 소식이 들려오니 줄리아는 친구와 함께 현장에 가고자 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아빠가 그녀를 때리기까지 한다. 결국 그녀는 집을 나가 베를린으로 향하고 피아니스트가 아닌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한편, 여권을 두고 와 방으로 올라갔더니 선생님에게 딱 걸려 버린 줄리아도 있다. 아쉽게도 줄리아는 현장에 가지 못했고 클라라 슈만 콩쿠르 입상을 목표로 연습에 매진한다. 뜻대로 되지 않아 찾은 서점, 그곳에서 우연히 한 남자와 마주친다. 얘기를 나누고 서점을 나서는데 비가 오니 함께 카페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 줄리아는 클라라 슈만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그들은 결혼한다.

한편, 서점에서 남자와 마주치지 않은 줄리아도 있다. 그녀는 결국 클라라 슈만 콩쿠르에서 떨어지고 어느 교수의 조수로 들어간다. 다시 남자와 결혼한 줄리아, 어느 날 부모님 집을 나서는 둘이 스쿠터를 타고 간다. 줄리아가 운전을 하니 사고를 면해 행복한 마음으로 그날 밤 사랑을 나눠 아이를 둘 낳는다. 남자가 운전을 하니 교통사고를 당해 줄리아가 크게 다쳐 손을 쓰지 못하고 인공수정으로도 아이를 갖지 못한다. 앞으로 줄리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리고 또 다른 삶의 갈래는?

 

순간의 자의적 또는 타의적 선택들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나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게 또는 무관한 듯 나와 내 주위가 결정된다는 걸 내가 정확히 느꼈을 때. 그럴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했던가,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스르르 내려와 얽히고설킨 걸 깔끔하게 교통정리해 준다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가 느꼈을 테다. 그러니 30여 년 전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TV 인생극장'에서 이휘재가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완전히 다른 갈래로 바뀌는 인생을 면면을 보여 줬고, 수많은 타임루프 영화가 다양한 선택에 의해 바뀌는 인생들을 보여 줬으며, 수많은 게임북 역시 다양한 선택에 의해 멀티 엔딩을 선보였다.

대놓고 'TV 인생극장'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차용한 영화 <줄리아의 인생극장>은 17세부터 생을 마감하는 80세까지 줄리아의 삶을 들여다본다. 크게 4막으로 나뉘는데 순간의 자의적 또는 타의적 선택에 의해 수많은 삶의 갈래가 동시에 흘러간다. 원제 '인생의 소용돌이(the vortex of life)'가 알맞다. 마냥 즐기는 데 복잡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눈을 떼지 않고 삶의 갈래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감동이 몰려들 것이다.

 

모든 게 달라진 수많은 갈래의 인생길들

 

<줄리아의 인생극장>은 굉장히 영화적이다. 줄리아의 일생을 다양한 분위기로 연기한 루 드 라쥬를 칭송할 만하지만, 정작 영화의 단독 주인공 '줄리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시종일관 끊임없이 극적이기 때문인데, 영화의 연출 방식이 캐릭터를 집어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줄리아가 살아 숨 쉰다고 생각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이런 연출 방식은 장점이 더 많았다. 평이하기 이를 데 없고 짤막한 이야기 토막들을 따로 또 같이 보여 주기에 굉장히 특별해 보인다. 우리네 평범한 인생들 모두가 각각 특별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수많은 갈래의 인생들이 각각 빛을 발하기에 시작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다. 줄리아와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다가 절망하며 환희에 가득 차다가도 회환이 밀려온다.

드라마 <미생>에 길에 관한 장그래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이다. 극 중에서 줄리아가 실제로 갔을지 가지 못했을지 알지 못할 갈래의 인생길들 또한 그렇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줄리아가 간 길과 가지 않은 길을 보면 정녕 '모든 게' 달라졌다는 말이 심히 와닿는다.

 

삶 자체가 한없이 소중하고 반짝였다

 

영화를 보면 '우연' 또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며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어딘가를 떠돌다가 문득 내 삶에 들어와 모든 걸 바꿔 버릴 것 같은 '우연'이 인생을 지배하는가, 모든 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벗어날 수 없을 같은 '운명'이 인생을 지배하는가. 영화는 우연이 가른 인생길들을 각각의 운명이 휘감은 것처럼 연출했다.

내 인생인데 내 선택이나 의지는 작동되지 않는 걸까, 적용되지 못하는 걸까. 영화는 그렇게 느껴지게 한다. 여권을 놓고 온 것, 서점에서 책을 흘린 것, 스쿠터를 운전한 것 등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인도할 갈림길의 순간들에서 줄리아의 선택이나 의지는 동반되지 않았다. 우연 또는 운명이 그녀를 이끌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에서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설파한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게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간 모든 일이 받아들이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줄리아가 80대 노인이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그래서 비로소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우연과 운명에 의해서든 내 선택과 의지에 의해서든 삶 자체가 한없이 소중했고 또 반짝였다. 너무 늦게 깨달아 아쉬울까, 늦게나마 깨달아 괜찮을까.

정작 내 인생이지만 내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그때 알았더라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영화가 그 시기를 조금이나마 앞당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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