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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애정 없는 집의 아이가 부모다운 부부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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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말없는 소녀>

 

영화 <말없는 소녀> 포스터. ⓒ㈜슈아픽처스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 열 살 소녀 코오트는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말이 없는 이상한 아이로 통한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그녀를 고깝지 않게 생각한다. 아빠는 경마와 도박에 빠져 매일같이 집 밖으로 나가 돌고, 엄마는 코오트 말고도 몇 명 더 있는 아이들을 챙기면서 곧 태어날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부모가 하나같이 코오트에게 애정을 주지 않고 챙기지도 않는다. 코오트는 말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로 한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코오트는 엄마의 먼 친척 부부에게 보내진다. 엄마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했기에 겸사겸사 보낸 것이리라. 데려다준 아빠의 말이 가관이다. "얘가 집안 거덜 낼 만큼 엄청 먹어댈 테니, 일 많이 시키쇼." 코오트로선 당연한 듯 받아들이지만 친척 부부는 황당할 뿐이다. 그렇게 코오트는 낯선 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기 시작한다. 비록 친척이라곤 하지만 말이다.

잘해 주는 아내 이블린, 굉장히 무뚝뚝해 보이는 남편 숀, 그리고 말없이 관찰하며 지켜보는 코오트. 하루하루가 지나며 숀과 코오트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낮 시간 동안 함께 농장 일을 하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고 나니, 숀은 자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코오트는 여느 아이와 다름없이 호기심 많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코오트는 비밀이 없다던 부부의 비밀을 알게 되고 개학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코오트에게 그들과 그 시간은 어떻게 남을까?

 

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할 감정의 교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진 않은데, 모든 게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단 몇 시간 또는 며칠을 지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첫인상이 어느새 익숙해져 새로운 환희로 다가왔더랬다.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가 우리 집에 와서 꽤 오랜 시간 기거한 적도 있는데, 비슷한 느낌이었다. 낯선 곳, 낯선 이, 낯선 분위기와의 조우는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 같다.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영화 <말없는 소녀>는 마법처럼 어린 시절의 그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가 준다. '애정 없는 집'이라는 전제가 있지만 낯선 곳, 낯선 이, 낯선 분위기와 조우하고 적응하며 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할 감정의 교류를 취득하는 것이다. 그게 꼭 애정이라는 법은 없다. 무관심이 아닌 어떤 종류의 관심이라도 괜찮을 것이다.

영화는 굵직한 상을 다수 수상하고 또 노미네이트되었다. 제72회 베를린 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청소년 영화만을 대상으로 한다) 대상(국제심사위원상)과 수정곰상(작품상 특별언급)을 석권했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 <서부 전선 이상 없다> <클로즈> 등과 경쟁했다. 전 세계 최다 관객상 수상의 진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밖에도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십 관왕을 차지한 기대작 중 기대작이다.

 

코오트에겐 부모다운 부모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말없고 소심한 열 살 소녀 코오트가 어떤 식으로 변해 제자리를 찾아 가는지, 덤덤한 듯 치열하게 보여 준다. 그녀의 변화는 곧 성장이다. 열 살 소녀라면 물이 고여 있듯 가만히 있기보다 물이 흐르듯 움직여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안과 밖을 오가며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한다. 또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부모, 즉 어른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영화가 시작하며 코오트는 이상행동이라 할 만한 행동을 보인다. 침대에 오줌을 실수한 건 그렇다 쳐도 엄마가 들어올 낌새가 보이자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린 것이다.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방증 아닐까. 그런가 하면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먼 친척집으로 가는 와중 젊은 여자가 타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데, 코오트가 딸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다. 아빠라고, 부모라고 할 수 있나 싶다.

코오트에겐 사실상 부모가 없었다. 부모라면 아이를 먹여 살리는 건 물론 가정교육으로 인격을 형성시키고 꾸준하고도 애정 어린 관심으로 지켜 보며 성장시켜야 하는데, 코오트의 부모는 먹여 살리는 것 이상을 해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먼 친척집으로 갔을 때 차에서 내린 코오트는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그녀 앞에 어른다운 어른이, 아니 부모다운 부모가 나타났다.

 

아이의 시선, 달라지는 아이

 

'인생 성공 단십백'이라는 말이 있다. '1명의 진정한 스승과 10명의 진정한 친구와 100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좋은 부모'는 포함되지 않는다. 부모란 천륜이 내려 준 당연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가? 코오트를 보면, 과연 누가 진정한 부모라고 할 수 있는가? 낳기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부모? 낳지 않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지극정성 돌보며 진심을 다한 친척 부부? 

물론 당사자가 아닌 이상 결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가 택한 게 아이의 시선, 즉 코오트의 시선이다. 영화에 유독 낯선 시선의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차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라든지 유독 거대해 보이는 먼 친척집의 첫인상이라든지 이블린 아주머니의 허리춤이라든지 이블린과 션이 서로의 슬픔을 보듬는 모습이라든지. 낯설고 불안했던 코오트의 세상이 점차 안정적이고 포근해진다. 그녀는 부모 아닌 친척 부부의 돌봄 덕분에 긍정적으로 변해 갔다.

영화의 외향은 치열하게 섬세한 반면 내향은 꽤 파격적이다. 코오트는 마지막 장면에서 과연 누구에게 '아빠'라고 했을까? 아빠라고 한 대상이 누구일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만으로도 파격적이라 할 만한대, 영화는 그 장면까지 끌고 오면서 전체적인 감정선을 그러니까 코오트의 감정선을 집과 부모가 아닌 친척 집과 친척 부부에게로 향한다. 그 감정선은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에게도 있는 그대로 전달되는데, 금지된 슬픔을 마주하는 듯한 오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은데 저절로 받아들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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