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피기>
정육점 집 큰딸 사라는 과체중 때문에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SNS에 사라의 가족을 놀려 놓고 돼지라고 지칭하질 않나, 사람들 이목을 피해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수영장에 와서 홀로 수영을 즐기려 할 때 찾아와 돼지라고 놀리질 않나. 급기야 사라가 물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그물채로 잡아채 위협을 가하기까지 한다. 사라로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와중에 사라는 자신을 놀리고 위협하는 3인방 중 클라우디아에게 도움을 청한다. 클라우디아가 사라를 놀리는 데 가장 소극적으로 보이긴 하는데, 아마도 그들은 과거 한때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싶다. 클라우디아의 남자친구도 함께 말이다. 3인방이 사라의 옷가지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수영복 차림으로 집까지 가야 하는 사라, 힘겹게 가는 길 한가운데에서 하얀 밴을 발견한다. 그리고 밴의 뒤 편에서 피를 흘린 채 사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클라우디아, 하지만 사라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다음 날, 사라와 3인방이 있던 수영장에서 시체가 발견되어 동네가 뒤집힌다. 그리고 3인방이 행방불명되어 동네가 다시 한 번 뒤집힌다. 사라의 엄마, 3인방의 부모, 클라우디아의 남자친구, 그리고 경찰까지 사라를 의심하는 와중에 3인방을 납치한 남자가 사라에게 접근한다. 사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실직고 경찰에 얘기해야 할까? 끝까지 시치미를 떼야 할까?
스페인의 공포 스릴러
스페인은 공포 스릴러 등 장르 영화의 나라다. 아시아에 태국이 있다면 유럽에 스페인이 있다. 1930년대부터 장장 40여 년간 스페인을 철권통치한 프랑코 정권과 프랑코 정권에 철저히 부합했던 가톨릭에 대한 반대급부로, 1970년대부터 스페인 영화계에 공포 스릴러 장르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오래된 억압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2년 선댄스 영화제 월드프리미어로 공개되어 화제를 뿌리고 시체스영화제,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의 국제적 장르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고야상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 초청된 스페인산 공포 스릴러 영화 <피기>, 카를로타 페레다 간독의 2019년 작 동명의 단편을 원작으로 한다. 단편은 300개 이상의 영화제에 초청되어 100개 가까운 최고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피기>는 전형적인 공포 스릴러의 모양새를 띄고 있진 않다. 심리적 긴장감 또는 선정적인 피칠갑이 양분하고 있는 공포 스릴러 장르의 전형성과 결이 다르다. 살펴보면 심리 스릴러에 피칠갑이 한 스푼 가미되어 있는데, 귀여운 구석도 있고 이해하기 힘든 구석도 있고 안타까운 구석도 잔인한 구석도 있다. 그야말로 따돌림받는 10대 과체중 소녀의 가늠하기 힘든 심리를 잘 표현해 냈다.
무섭도록 사나운 백마 탄 왕자님
사라의 눈앞에서 3인방을 납치한 남자는 사라의 속마음을 표상화시킨 존재다. 스토커처럼 사라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곤 실현시켜 준 것이다. 사라는 3인방에게 너무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그들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그리고 주지했듯 사라는 3인방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 단순히 당황스럽거나 무섭다는 이유 이전의 ‘바람’이 작용했을 것이다.
사라를 못살게 구는 건 비단 동급생 3인방뿐만 아니다. 아빠, 엄마, 남동생도 그녀를 못살게 구는 건 매한가지다. 엄마는 살 빼라, 공부해라, 어차피 공부 안 하니까 가게나 봐라 하면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빠는 사라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냥저냥 본인 위주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남동생은 사라가 모든 화살을 받고 있는 사이 누나를 놀리는 데 가담하며 별생각 없이 살아간다. 사라는 가족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는다.
납치범은 사라의 집에 침범해 사라의 눈앞에서 가족에게 죽지 않을 만큼의 위해를 가한다. 그러곤 납치범이 이번엔 사라를 납치하고 그들은 한순간 서로를 지그시 쳐다보며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사라에게만은 절대 위해를 가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세심하게 보살핀다. 사라에게 납치범은 자신의 처절하고 힘든 삶을 구원해 줄 무섭도록 사나운 '백마 탄 왕자님'일까? 그녀가 만들어 낸 실재일까? 허상이자 상상의 존재일까?
학폭 피해자 사라의 복수
<피기>의 미덕은 포스터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정적인 피칠갑이 선사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아니다. 따돌림받는 10대 과체중 소녀의 처절하고 처참한 심리다. 그녀 안에는 괴물이 산다. 또는 그녀는 괴물을 만들어 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 괴물이 나쁜 놈들을 해치우고 자기를 구해 줬으면 좋겠다. 학창 시절의 폭력은 더 이상 지엽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하나하나가 세상을 뒤흔들 만한 사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의 복수는 어떻게 완성될까? 학폭 복수극의 신고전으로 자리매김한 <더 글로리>처럼 완벽하면서도 시원하게 가해자들을 끝장내 버렸을까? 대인배처럼 또는 여전히 용기를 낼 수 없어 가해자들을 용서했을까? 그리고 그녀가 불러냈거나 만들어 낸 괴물 납치범은 어떻게 되었을까? 함께 가해자들을 쓸어 버리고 도망쳤을까? 그녀가 직접 자기 손으로 괴물을 끝장 냈을까?
사라의 심리 상태 변화를 들여다보면 가해자고 괴물이고 전부 다 쓸어 버렸을 것 같다. 처음엔 도망치고 숨고 울면서 아무것도 못하던 그녀가 나중엔 말하고 소리치고 대항했으니 말이다. 성장이라면 성장이랄 수 있는데, 성장의 끝에선 결국 자기 자신만이 남아 오롯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끝맺음하게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피기>에서 사라의 선택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것,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 내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다른 세상에 한 발짝 디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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