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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난민 아이들을 향한 착취는 멈출 길이 없다 <토리와 로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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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토리와 로키타>

 

영화 <토리와 로키타> 포스터. ⓒ영화사 진진

 

열한 살 소년 토리와 열여섯 살 소녀 로키타는 각각 아프리카 베냉과 카메룬을 탈출해 벨기에로 온 난민 아이들이다. 보호소에서 만난 후 서로를 의지하며 끈끈한 정으로 묶였지만, 그들은 친남매지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친남매 행세를 하는 건 일차적으로 벨기에 체류증을 얻기 위해서다. 토리는 주술사의 학대가 입증되어 체류증을 얻을 수 있었지만, 로키타는 얻기 힘들다.

와중에 그들은 피자 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는데, 실상은 마약 배달이 주 업무다. 그렇게 겨우겨우 얻은 적디적은 돈을 로키타는 별로 만져 보지도 못하고 밀입국 브로커에 뜯기고 아프리카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다. 토리는 학교에 다녀야 하니, 이중삼중의 착취를 당하는 로키타가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한다.

결국 체류증을 얻기 힘들어진 로키타는 피자 가게 주인의 소개로 가짜 체류증을 얻는 대신 불법으로 대마초를 재배하는 폐쇄된 공장에서 갇혀 지내기로 한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인데,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법 체류를 지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로키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토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르덴 형제만의 방식과 화법으로

 

칸 영화제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다르덴 형제', 벨기에 출신의 거장으로 1990년대 장편 데뷔 후 30여 년간 꾸준히 명작을 내놓으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무명의 비전문 배우, 다큐적 화법, 핸드헬드와 롱테이크, 소외된 곳의 소외된 사람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누군가가 꼭 다뤄야 하지만 논쟁적인 이야기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보여 준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 역시 다르덴 형제만의 방식과 화법으로 만들어졌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벨기에로 건너온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물론 사회고발적 성격이 다분하기에 가치 판단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애초 '난민' '아이'라는 이중 한계를 지닌 주인공들을 '서구 유럽'의 '어른'들이 착취한다. 아프리카의 가족과 흑인 난민 브로커 그리고 토리와 로키타에게서 마약을 구입하는 이들도 착취에 한몫한다.

이쯤 되면, 착취 구조에서 '서구 유럽'만 튀지 않는다. 총체적으로 볼 때 '돈'이 문제고, 그 자체가 착취의 시발점이자 모든 것이다. 토리는 몰라도 로키타는 돈을 벌고자 벨기에로 온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로키타는 '난민 아이'에 '여성'이기도 하니 성적 착취까지 자행된다. 그럼에도 돈을 벌고자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한다. 난민이라고 하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온갖 범죄의 온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정녕 실상인가?

 

누구도 그들을 착취할 권리는 없다

 

<토리와 로키타>는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제75회 칸 영화제 특별기념상 수상작이다. 영화계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논쟁의 최전선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난민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2010년대 중반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 적은 일찍이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정치적 사태들의 결괏값이 도출된 것이다.

난민은 UN의 난민협약에 의해 '박해'로 인한 탈출이 주가 되는데, 주술사의 학대가 입증된 토리는 난민에 해당되지만 정황상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밀입국한 로키타는 난민이라고 할 수 없겠다. 토리는 체류증을 얻고 로키타는 체류증을 얻을 수 없어 둘이 함께 살 수 없게 된 경위다. 그렇다면 로키타는 불법체류자이니 막 대해도 될까?

불법체류자를 구원할 수 있는 법적 조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로키타도 가짜 체류증이라도 얻고자 어쩔 수 없이 폐 공장에서 갇혀 지내며 대마초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반대로 그녀를 그렇게 휘두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미성년자인 그녀의 의지와 바람과는 별개로 어른들이 그녀를 착취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든 체류하고 싶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든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든 하는 게 맞다.

 

그저 서로 의지하며 함께하고 싶은 것 뿐

 

한편 <토리와 로키타>는 매몰찬 세상에 내던져진 두 아이의 피보다 더 진한 가족애와 형제애를 다룬다. 그들은 비록 피를 나눈 혈연 관계가 아니지만 서로를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다. 난민이 어쩌고 체류증이 어쩌고 마약이 어쩌고 하는 것들은 그들에게 최우선 사항이 아니다. 토리와 로키타, 로키타와 토리는 떨어지지 않고 서로에게 애정을 듬뿍 주며 외딴곳에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평범한 것까진 바라지 않고 그저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로키타의 치명적이면서 유일한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이렇게 저렇게 착취한다. 로키타도 잘 알지만 당하지 않을 요량이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엄마도 그녀를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로도 갈 수 없으니 이곳에 체류하는 게 그나마 해답이다. 그마저도 힘들면, 해선 안 되는 짓을 할 수밖에. 로키타의 순수한 자의가 아닌 불순한 타의들의 집합체다.

대안은 뭘까, 대안이 있을까. 애초에 세상이 불공평한데, 세상이 불완전한데 타개할 방법이 있는 걸까.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현실을 보여 주며 현상을 고발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수많은 토리와 로키타를 개별적으로 대변하긴 힘들겠지만 보편적으로나마 대변하려 했을 때, 비로소 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영화가 할 일은 보여 주는 것이고 다르덴 형제는 그걸 참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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