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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공연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와 중년 괴짜 교수가 만나면? <올드 위키드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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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연극 리뷰] <올드 위키드 송>

 

연극 <올드 위키드 송> 포스터. ⓒ나인스토리


미국의 극작가 존 마란스의 대표작 <올드 위키드 송>이 국내 사(4)연으로 2년 만에 찾아왔다. 1995년 미국에서 초연했을 당시, 이듬해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걸 비롯해 LA 드라마 로그 어워드와 뉴욕 드라마 리그 어워드 그리고 오티스 건지 최고 연극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뿌렸다. 국내에는 미국 초연 이후 20년 만인 2015년에 소개되었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라도 2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단 두 명의 주인공이 채우는데, 지루한 구석을 찾기 힘들고 비어 보이는 느낌을 받기 힘들다. 스토리, 무대 구성, 메시지, 연기 등 작품을 이루는 모든 게 따로 또 같이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했을 테다. 특히 이 연극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음악만 들어도 좋으니 말이다.

많은 연극도 마찬가지겠지만 <올드 위키드 송>도 벌써 국내에서만 네 번째로 찾아오기에 사실상 모든 게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연극의 경우 반전이라고 할 만한 스토리상 중요 요소가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작품을 보는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이 작품을 계속해서 다시 찾은 이유가 있을 테다. 작품 곳곳과 전체를 아우르는 앙상블이라고 본다.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와 중년 괴짜 교수의 만남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한 대학교의 리허설 스튜디오 315호에서 중년 남성이 그랜드피아노를 치고 있다. 잘 치는가 싶더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때 젊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냉소적인 말투로 중년 남성이 틀린 부분을 지적한다. 알고 보니 젊은 남자는 슬럼프에 빠진 천재 피아니스트 스티븐 호프만으로, 거장 쉴러 교수에게 배우고자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한편 중년 남성은 요세프 마슈칸 교수로 호프만에게 말하길 쉴러 교수를 만나기 전에 자신에게 3개월 동안 '노래'를 배워야 한다며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호프만으로선 쉴러 교수가 아닌 사람인 것도 황당한데, 매주 화요일 오전과 금요일 오후에 이곳에 와서 저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괴짜스러운 교수한테 다름 아닌 노래를 배워야 한다는 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3개월 후면 쉴러 교수한테 배워서 진정한 피아니스트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참고 버티기로 하는 호프만이다.

호프만으로선 마슈칸 교수의 수업 방식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노래든 피아노든 정해진 양식과 방식에 따라 딱딱 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마슈칸 교수는 피아노 앞에 앉을 때부터 진심 어린 감정을 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호프만이다. 그런데 마슈칸 교수의 말에 따라 하나씩 가슴속의 뭔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엔 불쾌한 무엇이었다가 곧 마음속 깊숙히 숨겨졌던 감정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며 마슈칸과 호프만은 서로의 아픔과 상처에 조금씩 다가가는데...

 

감정을 배제한 예술 vs 감정을 인정한 예술

 

예술을 행함에 있어 ‘감정’의 존재는 활용과 배제 대상을 오갔다. 어쩔 수 없는 감정을 인정하고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않은 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잘만 활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감정을 쓸모없다고 생각해 인정하지 않고 배제한 채 예술에 이성적으로 효율적으로 다가가려 한 움직임도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호프만은 감정을 배제하고 완벽한 예술성을 추구하는 타입이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미국의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기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극중에서 직접 말하길, 어렸을 때부터 고전 명작들을 ‘따라하는’ 게 너무 쉬웠다고 한다. 주위에선 그를 두고 천재라고 치켜세웠다. 그로선 더 열심히 남을 따라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마슈칸 교수는 감정을 인정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고심하고 또 고심하는 타입이다. 흔히 생각하는 예술의 정통파다. 하지만 기술파, 기교파가 보기엔 아마추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정확하고 빠르고 효율적이지 못하니 말이다. 대신 그에겐 진정성이 있다. 예술의 본질에서 표현 방식까지 겉과 속을 아우르는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니 말이다.

호프만과 마슈칸, 마슈칸과 호프만은 상극 중의 상극처럼 보이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잘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고 알리고 싶은 마음은 같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예술은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가만히 고여 있지 않을 것이다.

 

환희와 슬픔의 공존

 

마슈칸 교수가 음악을 대하는 핵심 마인드는 ‘환희와 슬픔의 공존’이다. 상반된 두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여 내 안에서 충분히 소용돌이치게 한 후 그 복합적인 감정을 하나로 뭉쳐 표현해 내야 한다고 말한다. 호프만으로선 굉장히 어려운 과제인데, 여기서 그들이 함께 공유하는 아픔과 상처가 드러난다. 둘다 유태인이고 마슈칸 교수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는 정도만 언급하겠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도 남을 충격적인 아픔과 슬픔을 겪고 또 공유하는 마슈칸과 호프만, 슬픔 뒤엔 거짓말처럼 환희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상반된 감정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갈무리해 표현할지가 핵심이다. 그들은 ‘환희와 슬픔’이라는 예술적 핵심 마인드를 중심에 둔 채 함께 공유하는 감정을 밑천 삼아 호프만의 기술을 무기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둘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둘의 관계는 상호보완의 성격을 띄기에 효과적이다. 둘의 음악은 여운을 남긴다. 하여 이 연극은 굉장히 복합적이다. 이성과 감정을 오가고 음악과 역사를 오가며 무엇보다 환희와 슬픔을 오간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질문하게 하고 나름의 해답을 얻게 한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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