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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

90분에 풀어 낸 어느 가족의 90년 희로애락 <더 빅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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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연극 리뷰] <더 빅 밀>

 

연극 <더 빅 밀> 포스터. ⓒ극단 다이얼로거

 

언제인지 모를 미국 어딘가의 레스토랑 저녁 식사 시간, 젊은 남녀 샘과 니콜이 처음 만난다. 수줍고 나름 진지한 샘과 하룻밤 상대를 찾고 있는 니콜, 여지없이 사랑에 빠진다. 시시콜콜, 좌충우돌, 우여곡절 끝에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룬다. 부모님 챙기랴 아이들 챙기랴, 서로를 챙기지 못하고 자신을 챙기지 못한다.

 

사소한 갈등이 쌓여 점점 커지고 샘의 외도를 눈치 챈 니콜은 이혼을 결심하는데, 샘의 아버지이자 니콜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다. 다시 뭉치는 또는 봉합되는 샘과 니콜, 아들 로비와 딸 메디가 어느새 훌쩍 커 버렸다. 그들도 하나둘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를 데려와 소개시켜 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당연한듯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룬다.

 

그런데, 느닷없이 로비의 아들이자 샘과 니콜의 첫 손주가 이르게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머지 않아 샘의 어머니이자 니콜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만다. 나중에는 샘과 니콜의 증손주가 태어나고 말이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가족,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을 것인지.

 

90분에 풀어 낸, 어느 가족의 90년사

 

90년에 이르는 가족사를 90분만에 표현해 낸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그런데 완벽에 가깝게 표현해 냈으니 최고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그렇다, 연극 <더 빅 밀>은 내 짧지만 질적으로 풍성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연극 인생에서 최고였다. 한 인간이 아닌 '가족'이라는 생명체의 희로애락을 방대하고 풍성하고 명징하게 보여 줬다. 한계가 분명한 연극으로 보여 주는 데 성공했으니 대단하다 하겠다.

 

<더 빅 밀>은 미국의 극작가·각본가 댄 르프랑(Dan Lefranc)의 작품 <The Big Meal>을 원작으로 하는데, 자그마치 2014년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출신의 전문 번역가들로 구성된 모임인 이화희곡번역연구회가 주최한 '2014년 제2회 희곡번역낭독회'를 통해 양성애 번역가의 <식구>로 처음 알려진 것이다.

 

작품성을 인정받은 <식구>는 2017년 한국메세나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국내 초연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2년 뒤인 2019년에도 역시 한국메세나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원작 제목 <더 빅 밀>로 재공연을 해 큰 호응을 얻었다. 다시 2년 뒤인 2021년에 우리를 찾아왔다.

 

헷갈리지 않고 어렵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연극 <더 빅 밀>은 가장 보편적인 내용을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으로 보여 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연극이라는 게 그렇듯 한정된 공간과 소품과 등장인물로 한없이 방대해질 수 있는 내용을 커버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더 극대화시켜 공간을 식사 자리로만 한정시켰고 등장인물도 모두 1인 다역을 소화했다. 반면 내용의 배경은 90여 년에 다다른다.

 

연극을 보기도 전부터, 헷갈릴 만한 요소가 아주 다분하거니와 실제 시간과 내용상 시간이 현저하게 차이 나기에 속도가 너무 빨라 이해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고 나서 순식간에 90여 분이 흐르며 단 한순간도 헷갈리지 않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전혀 없었다.

 

씬을 짤막짤막하게 구분해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도 시간 흐름의 속도를 맞췄고, 등장인물들이 1인 다역을 보여 줄 땐 내용이 그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맞춰졌으며, 관객도 함께 웃다가 화내고 슬프다가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내용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샘과 니콜의 만남에서 시작했지만 니콜 아닌 샘의 부모님만 주로 나온다는 점이다.

 

희로애락과 인생무상

 

연극의 내용을 '어느 가족의 희로애락사'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막이 내린 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는 건 '인생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여, 저도 모르게 한숨이 계속 쉬어 지는데 사는 게 참으로 덧없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한숨일 테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 먼저 '왜 살아야 하는가'부터 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어온다.

 

이 연극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90년의 시간을 90분으로 보여 주며, 밥상머리의 가족 이야기에서 '인생무상'이라는 인간 생의 본연에 가닿게 하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그걸 잘 알면서도 살아가는 게 인간이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싶다.

 

지금 당장 대학로로 가서 <더 빅 밀>을 한 번 보시라. 내 인생, 우리 가족 인생, 그리고 인간 생이 거기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보다 알찬 연극 찾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숨 돌릴 틈도 없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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