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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공연

1인 9역이 압권인 브로드웨이 최고의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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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공연 리뷰]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사랑편> 포스터. ⓒ쇼노트

 

2021년까지 장장 십삼연을 해 오고 있는 뮤지컬 <헤드윅>으로 명성을 떨친 공연 제작사 '쇼노트', 이후 꾸준히 고퀄리티의 대중적인 뮤지컬과 연극을 제작하고 있는데 현재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스타쉽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이다. 쇼노트가 2018년에 국내 초연으로 선보인 뮤지컬이 있었으니,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이다. 

 

영국 작가 로이 호니먼(1874~1930)이 1907년에 쓴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자의 자서전>이 원작인데, 1949년에 <친절한 마음과 화관>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2012년에는 로버트 l. 프리드먼 각색과 스티븐 루트백 작곡의 뮤지컬로 만들어졌는데, 하트퍼드 스테이지에서 초연된 후 2014년에는 브로드웨이 4대 뮤지컬 어워드(토니상, 드라마 데스크상, 외부 비평가 협회상, 드라마 리그상)에서 16개 부문 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드날렸다. 

 

주지했듯 우리나라엔 2018년에 소개되었는데, 2020년과 2021년에 거쳐 삼연까지 하면서 2018 아시아컬처어워즈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2019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조연상, 2021 한국뮤지컬어워즈 무대예술상, 무대디자인상을 수상했다. 브로드웨이 최고의 뮤지컬을 국내에 완벽하게 소환했고 또 소화해 냈다. 흔히 말하는 작품성과 예술성과 대중성까지 겸비한 작품이라 할 만한데, 외향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느낌을 주는 작품은 흔치 않다. 

 

백작의 자리에 오르는 피 나는 여정

 

1909년 영국 런던, 몬티 나바로는 신분도 낮고 돈도 없고 직장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 장례식까지 치른 직후, 더할 나위 없이 인생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의 앞에 느닷없이 어머니의 살아생전 친구 미스 슁글이 찾아온다. 그녀는 이내 충격적인 진실을 전해 주는데, 어머니가 다름 아닌 저 위대한 하이허스트 성의 주인 다이스퀴스 백작 가문의 영애였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던 건, 스페인 출신의 뮤지컬 배우인 몬티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도망쳐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가문은 그녀를 제명했다. 

 

얼떨떨하면서도 흥분되는 상황을 애인 시벨라에게 말하는 몬티, 하지만 시벨라는 믿지도 않거니와 몬티가 백작이 되려면 지금 다이스퀴스 백작인 애덜버트를 포함해 8명이나 되는 후계자가 죽어야 한다고 말하며 비웃을 뿐이다. 그러며 그녀는 가난한 남자와는 결혼하기 싫다고 말한다. 태생과 맞지 않게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어머니의 억울함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시벨라의 모멸적인 언사가 더해져 몬티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하게 만든다. 

 

몬티는 은행장으로 있는 애스퀴스 다이스퀴스 경에게 편지를 써 그의 은행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몬티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비웃으며 얼씬도 하지 말라는 답장을 받는다. 몬티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일원이 되겠다는 일념을 세운다. 그러곤 염탐 겸 찾아간 하이허스트 성에서 에제키엘 목사와 만나는데, 교회 옥상까지 함께 올라가선 바람 때문에 휘청거리는 그를 잡아 주지 않아 떨어져 죽고 만다. 이 일을 계기로 몬티는 다이스퀴스 백작의 자리에 오르고 말겠다는 열망에 불타 오르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기상천외하고 코믹한 연쇄 살인 과정

 

가진 것 없이 가난하게 살아온 낮은 신분의 이가 알고 보니 고귀한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스토리는 여기저기서 수없이 봐 온 라인이다. 하여, 명작으로 손꼽히기 위해선 디테일이 필요하다. 다시 고귀한 가문의 일원으로 복귀하겠다는 일념은 '왜'의 당연한 이치에 해당하지만, <젠틀맨스 가이드>처럼 사랑이 크게 작용한다든가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여기서 사랑은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그런가 하면 복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에 해당하는 살인을 당연히 저질러야 하겠지만, 이 작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죽이는 게 아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든가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젠틀맨스 가이드>가 비록 연쇄살인이라는 끔찍한 소재를 다루지만 '코미디' 장르로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건, 바로 기상천외한 살인의 과정을 코믹하게 연기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작품에선 연기가 굉장히 중요한데, '생방송'인 뮤지컬이 당연히 연기가 중요하겠지만 관객의 실시간적인 웃음까지 자아내야 하는 임무를 띈 코미디 장르 뮤지컬의 연기자들은 그 부담의 무게가 훨씬 더 막중하다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의 경우 몬티가 하나하나 해치워 나가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 후보들을 비롯한 9명을 단 1인이 맡아야 하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번 삼연에선 오만석, 정성화, 정문성, 이규형이 맡았는데 필자는 이규형의 연기를 감상했고 오만석과 더불어 초연부터 자리를 빛냈던 이규형의 신들린 연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극과 중독의 삶과 인간군상

 

얼핏 가벼워 보이는 희극 코미디의 <젠틀맨스 가이드>, 거기에는 '인간'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욕망을 날것으로 휘두르는 사람, 욕망을 정제해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였다가 수단화시켰다가 다시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사람, 높은 지위에 있다지만 인간성은 바닥인 사람들... 이밖에도 수많은 인간군상이, 확고한 캐릭터들이 눈과 귀 그리고 오감을 만족시킨다. 

 

계속되는 자극은 중독을 일으키고 계속되는 중독은 삶을 무뎌지게 한다. 그리고 다시 자극이 무뎌진 삶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진리에 가까운 구도의 앞 부분에서 중간 부분을 작품은 몬티를 통해 완벽하리만치 보여 준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아니 평범하지조차 못했던 몬티가 변해 가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무서워진다. 나라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놀랍고 환상적이며 일찍이 본 적 없는 재밌는 무대 공연의 외향 이면엔, 그리고 자못 일차원적이고 일직선적인 스토리 라인의 이면엔 무시무시한 심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은 말한다, 몬티가 다이스퀴스 가문의 백작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과연 이야기가 끝날까 하고 말이다. 몬티 같은 이가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나라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몬티가 언제 어디서 몸과 마음을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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