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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공연

세 고아가 모여 이룬 기묘한 가족의 눈물 겨운 성장 이야기 <오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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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연극 리뷰] <오펀스>

 

연극 <오펀스> 포스터.&nbsp;ⓒ악어컴퍼니

 

미국 극작가 ‘라일 케슬러’의 대표작 <오펀스>가 2017년 국내 초연, 2019년 재연에 이어 2022년 삼연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관객의 호평에 이어 매진 행렬, 그리고 오직 관객의 투표만으로 수상이 결정되는 ‘SACA’(Stagetalk Audience Choice Awards)에서 최고의 연극상을 수상하는 등 우리나라 연극계를 뜨겁게 달궜던 이 작품은 1983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초연했다.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으며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삼연이니 만큼 볼 만한 사람은 다 봤음직한데, 오히려 한 번 본 관객이 또 보게 되는 매력을 가진 작품인 것 같다. 같은 등장인물을 두고 다양한 배우가 각자의 개성으로 연기를 하기에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게 연극인데, 이 작품은 하나의 등장인물을 두고 남성과 여성이 번갈아 연기하는 ‘젠더 프리’를 선택했기에 더 다양하게 그리고 몇 번이고 처음처럼 즐길 수 있다.

‘고아’라는 뜻을 가진 제목 <오펀스>에서 유추할 수 있듯 등장인물 모두가 고아인데, 등장인물이 불과 3명뿐이지만 무대가 꽉 차고도 남음이 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의 캐릭터성과 사연, 그리고 알차게 연기해내는 배우들의 열연이 조화를 이룬 결과라고 하겠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라도 2시간이 넘는 상당히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니, 저간의 조화가 더욱더 빛을 발한다.

 

고아 형제 앞에 나타난 고아 마피아 보스

 

미국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북부의 어느 집,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이 살고 있다. 트릿은 거리에서 소매치기를 하며 근근이 필립을 먹여 살리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난폭하고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다. 동생으로 하여금 절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바깥세상이 무섭다는 이유로 엄마 캥거루가 새끼 캥거루를 주머니에 넣어 키우듯 집에서만 키우고 있는 것이다. 가련한 형제다.

하지만 필립은 형 몰래 신문과 책을 읽을 정도로 바깥세상에 대해 호기심도 풍부하고 또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실제로 집밖을 나가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 알레르기로 죽을 뻔했던 적이 있어 밖에 나가면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두 형 트릿이 심겨놓은 생각들이다. 그렇게 아슬아슬 간당간당하게 살아가던 형제에게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일어난다.

어느 날 트릿은 집으로 돈 많은 마피아 보스를 끌어들인다. 이름은 해럴드, 술에 완전히 취한 그에게서 돈을 갈취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트릿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를 납치해 더 큰 돈을 갈취하려 한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해럴드, 자신 또한 고아였던 그는 폭력적이기 이를 데 없는 트릿을 다잡아 보디가드이자 비서로 채용하고자 한다. 우여곡절 끝에 트릿은 해럴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해럴드와 트릿과 필립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과연 셋의 운명은?

 

고아의 숙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연극 <오펀스>는 단 3명의 등장인물로만 이뤄지는 만큼 이 3명이 따로 또 같이 형성하는 관계가 중요하다. 더불어 세상과 대면하는 각자의 행동 양식도 중요하다. 하나씩, 한 명씩 살펴보면 어느덧 작품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선, 해럴드의 경우 고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피나게 일을 해 지금의 부와 권력을 일궜다. 하지만 술에 취할 때면 엄마를 찾으니, 나이는 들었지만 고아의 숙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진 못한 듯하다.

형 트릿은 어린 시절 엄마를 여의고 무책임한 아빠 밑에서 동생을 보살피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둑질로 생계를 연명하며 동생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세뇌하는 것이었다. 하여, 돈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고 동생을 손쉽게 돌볼 수 있었다. 들여다보면, 트릿에겐 동생만이 있었을 뿐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 더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생 필립은 몸은 컸지만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 본 적이 없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유년 시절에 멈춰 있거니와 형 트릿이 폭력과 세뇌를 동반해 끊임없이 그를 옥죄고 있다. 그래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다행인 듯, 고전을 섭렵하고 신문을 읽어내는 등 세상살이를 글로나마 체득하고 있다. 그에겐 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집이라는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숙제가 있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 간절히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 못할 그들만의 문제와 숙제를 지닌 채 살아온 트릿과 필립에게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오게 된 해럴드는 어떤 세상을 선사할까? 트릿과 필립은 어떻게 바뀔까? 자못 기대된다.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성장 이야기

 

해럴드, 트릿, 필립의 관계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다. 먼저 트릿과 필립이다. 이들의 관계는 입체적이다. 주지했듯 이 형제는 고아로 살아왔는데, 트릿은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필립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다. 이 관계의 핵심은 트릿의 세뇌 어린 보살핌과 필립의 날갯짓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질은 따로 있다. 세상의 보살핌은커녕 부모나 어른의 보살핌조차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외형상 트릿이 가해자인 것 같지만, 본질은 둘 다 피해자인 것이다. '가여운 필립'에서 '가여운 트릿과 필립'으로 변한다. 

해럴드와 트릿의 관계는 위험하다. 해럴드는 야생의 맹수처럼 절제 없이 폭력적이기만 한 트릿을 교육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트릿은 사람이라기보다 동물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고 있는 바, 길들이고 훈련시켜야 한다. 문제는 그의 본질이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 더군다나 산전수전을 겪어 오고 있다는 것,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훈련을 시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해럴드는 트릿에게 실망할 테고, 트릿은 이리저리 날뛰며 삐뚤어지기 일쑤일 테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해럴드와 필립의 관계는 이상적이다. 해럴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호기심 많은 순수의 결정체인 필립을 교육시키고자 한다. 필립은 해럴드가 전해 주는 세상사의 핵심을 오롯이 체득하고 해럴드가 제안하는 것들을 오롯이 받아들여, 머리와 가슴에 새기고 행동에 옮기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의 사실과 진실을 전해 주려는 해럴드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받아들이려는 필립, 선한 의도와 열린 마음이 만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셋의 성장 이야기는 일찍이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마주하기 힘든 감정을 선사한다. 자신도 모르게 행했던 생각, 행동, 말들의 진짜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는 현장도 목격할 것이기에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연극이 어디 또 없을까 살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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