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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간호사의 '태움' 악습으로 들여다보는 폭력의 악순환 <인플루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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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인플루엔자>

 

영화 <인플루엔자> 포스터. ⓒ아이 엠

 

다솔은 이제 막 3개월 차에 접어든 신입 간호사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아 보이는 그녀는 허구헌 날 실수하고 잘 몰라 선임들한테 혼난다. 그런데 선임들이 후임한테 지적하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일을 더 잘해 보자는 의도는 오간 데 없고 욕설과 인신 공격까지 동반한, 그것도 군대에서 보이곤 하는 내리갈굼의 형태다. 다솔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 것 같던 때 나이 많은 신입 은비가 들어온다. 

 

수간호사는 다솔에게 후임 은비 교육을 일임한다. 가뜩이나 간호사 인력이 없는 병원에 신종 전염병 판토마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어 선임들이 신입을 챙기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다솔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왕 하는 거 절대 선임들처럼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은비를 엄청 잘 챙겨 줄 거라고 장담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입이 으레 그렇듯 잘 모르거니와 실수를 연발한다. 다솔의 선임이 그 꼴을 두고 보지 않고 폭풍 지적, 아니 폭풍 갈굼을 시전한다. 처음엔 은비에게 직접적으로 가닿지만 이내 직속 선임인 다솔에게 가닿는다. 다솔은 조금씩 은비의 서툰 점들이 보이고 곧 못난 점이 된다. 과연 그녀는 선임들처럼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은비를 엄청까지는 몰라도 잘 챙겨 줄 수 있을까?

 

폭력은 전염병이다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 사이에 '태움'이라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라는 뜻인데, 직장 내 가혹행위의 일종으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악습이다. 이런 류의 악습이 존재하는 대표적인 곳으로 군대가 있을 텐데, 총기류를 다루는 군대(경찰) 못지 않게 위험한 직장인 병원 그리고 불을 다루는 주방이 의외로 가혹행위의 악습이 상존하고 있다. 

 

당연히 없어져야 할 구시대적 악습일 테지만, 사람 목숨이 오가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어리바리하면 큰일이 날 수 있기에 다른 직장보다 훨씬 힘들 것이고 힘들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선임이 후임을 갈굴 때 "이거 태움 아니다, 너희 잘 되라고 조언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플루엔자>는 '폭력은 전염병이다'라는 다소 상투적이고 투박하지만 뇌리에 깊게 박힐 만한 카피가 인상적인 영화로,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태움' 실태를 바탕으로 신종 전염병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폭력 바이러스의 전모를 그렸다. 폭력의 '대물림', '악순환', '고리'가 아니라 폭력 '전염병'이라니 살아 있는 좀비 같기도 하다.

 

한편 폭력에 관한 고전(?) 독립영화가 떠오르는데, 윤종빈 감독의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다. 극중에서 승영은 선임에게서 받은 폭력의 굴레를 결단코 후임 지훈에게 씌우지 않고자 했지만 결국 굴복하지 않았는가. 이 영화가 폭력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진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까지 도달한 반면, <인플루엔자>는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지켜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폭력을 비추고 푸는 방법

 

<인플루엔자>의 도식은 명확하다. 그동안 많은 명작 한국 독립영화들이 전한 '가해자가 된 피해자'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지 알 수 없지만 일개 개인으로선 절대로 바꿀 수 없을 게 자명한 '내리 갈굼'의 견고한 시스템을 전한다. 이 영화는 폭력을 전염병으로 지칭했지만, 정작 보여주려는 건 폭력의 대물림이자 악순환에 가깝다. 

 

그러면 왜 영화는 폭력을 전염병이라고 했을까? 판데믹 시류에 맞게 폭력을 재정립해 본 것 같다. 기존의 독립영화들이 보여 줬던 폭력의 정립을 존중하면서 다르게 풀어 보고자 했을 테다. 나아가 조금이라도 더 대중에게 가닿고자 한 움직임이었다고 본다. 폭력을 폭력 자체로만 비춰 보려는 건 너무나도 거대하고 어려운 작업이 아닌가. 

 

매우 자주 접하지만 매우 생소한 '간호사'라는 직업을 꽤 상세하게 들여다보는 기회이기도 했는데, '태움'이라는 간호사들 사이의 직장 내 가혹행위 전통(?)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생사를 다투는 일이라면 의사야말로 스트레스를 받으니 드라마 <하얀거탑>을 보면 의사도 군기가 심할 텐데, 이 영화를 보면 간호사에 비할 바가 못될 것 같다. 스토리나 메시지는 도식화된 식상함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으나, 배경은 신선했다. 

 

거칠고 투박한 것과 직설적이고 깔끔한 것 사이

 

아쉬운 점이 있다면, '폭력은 전염병이다'라는 카피를 영화 내에서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태움'이라는 이름으로 내리갈굼형 가혹행위가 버젓이 성행(?)하고 있는 바, 그 모습이 어째서 전염병과 맞닿아 있는 게 알 수 없었다. 전염병은 코로나 시국의 배경을 가져오면서 병원의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정도에서 그쳤으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기획부터 부정하는 것이겠다. 

 

이런 류의 도식을 수없이 보고 또 즐기기도 하는 개인으로 봤을 때 <인플루엔자>는 거칠고 투박하고 성긴 점이 아쉽지만 직설적이고 깔끔해서 좋았다. 보여 주고 싶은 장면에 하고 싶은 말만 넣으니 날 것의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폭력'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감출 수 없고 감춰서도 안 되는 '날 것'이기에 이런 식으로 전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감독이 1997년생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전공한 만큼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다른 시선으로 볼 이유가 없다. 그가 앞으로 펼쳐 나갈 영화 세계에 보다 강력하고 세련된 '날 것'의 냄새가 풍기길 바란다.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볼 영화가 없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한국영화의 미래가 밝다'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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