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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들이닥친 재난,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 <하이 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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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하이 워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하이 워터> 포스터.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던 1997년 7월, 중부 유럽은 대홍수에 직격탄을 맞아 크나큰 손해를 입었다. 오데르 강과 모라바 강이 범람해 폴란드, 체코, 독일 등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45억 달러(한화 6조 4천억 원)의 재산 피해(폴란드에서만 35억 달러)가 있었고 114명(폴란드 56명, 체코 58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폴란드 역사상 최악의 홍수로 남아 있다.

'1997년 대홍수' '밀레니엄 홍수' 등으로 명명된 이 최악의 홍수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하이 워터>로 만들어져 선보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 모두 100% 가상인물이기에 그에 따른 각각의 사연들 또한 허구이겠다. 극적인 요소를 자유롭게 펼쳐 보이기 위한 방편일 테니 무리 없이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재난' 장르가 작품의 주를 이루지만, 여타 재난을 다룬 작품들처럼 즐기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웃음끼 쏙 뺀 진중한 분위기에서 시시각각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대홍수 속 생존을 도모하는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펼쳐지니 말이다. 특히 '정치'도 정치지만 '가족'이 극의 중심에 있다 보니 더더욱 마냥 즐길 순 없으리라.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으니 적절한 균형의 감정으로 시청할 수 있을 것이다.

 

대홍수에 직면한 브로츠와프 사람들

 

수문학자 트레메르는 머지 않아 대홍수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곤 내용을 정리해 주지사에게 팩스를 보낸다. 하지만 교황 방문에 정신이 팔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6주 후, 기록적인 폭우로 인근 도시에 홍수가 일어나자 브로츠와프 시장이 긴급 비상 회의를 소집하며 트레메르도 참석한다. 하지만, 최고의 홍수 전문가라고 하는 교수가 브로츠와프는 괜찮을 거라고 주장한다.

트레메르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력한 차기 주지사 후보 야쿠프 마르차크가 트레메르와 깊은 사이였다. 마르차크가 홀로 키우고 있는 14살 여자아이 클라라의 엄마가 트레메르였던 것. 마르차크는 트레메르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밀어서 도마니에보 강둑을 폭파하는데, 옛 지도를 바탕으로 했기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도마니에보 강둑을 폭파하면 브로츠와프가 안전할 거라는 트레메르의 모델이 실패하고 말았다. 트레메르와 마르차크, 그리고 그들만이 정확히 꿰뚫고 있는 브로츠와프의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보이는 듯, 트레메르는 현 지도를 바탕으로 정확하고도 유일한 방도를 생각한다. 인근 소도시의 켕티 강둑을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켕티는 물에 잠기겠지만 대도시 브로츠와프는 도심이 물에 잠기는 걸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제이를 필두로 켕티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결사반대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브로츠와프는 서서히 잠기기 시작하는데...

 

얽히고설킨 재난, 정치, 가족 드라마

 

<하이 워터>는 통상적으로 접해 온 할리우드식 재난 장르는 아니다. 기본 외형, 즉 재난 상황에 처한 다양한 인상군상과 부지불식간에 튀어 나오는 본능의 양상 그리고 믿기 힘들 재난의 모습, 헤어지고 다시 만나며 위기를 헤치는 와중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정까지 다루는 건 동일하지만 이 작품엔 결정적으로 '극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

이미 재난 상황 자체가 극적인데 거기에 왜 극적인 요소를 추가해야 하는지 의아해하겠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감정을 극도로 끌어올려 작품에 푹 빠져들게 그래서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반면 이 작품은 한 발짝 떨어져 조망하는 형태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수없이 많은 콘텐츠 중에서 굳이 시간을 들여 작품을 보게 하는 데는 그만 한 '자극'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물론 자극적인 작품들만 보면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질 수 있으니 자극적이지 않은 작품의 수요도 분명 존재한다.

하여 이 작품은 재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그 자체로 최소한의 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거니와 재난, 정치, 가족 드라마가 얽히고 설키며 이어져 지루할 틈이 없다. 트레메르는 브로츠와프로 반드시 닥칠 대홍수를 막아 보고자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는 한편 엄마 그리고 딸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온 지난 날을 되돌아 본다. 마르차크는 선거 운동을 뒤로 한 채 홍수에 대처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와중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낙담을 이어간다. 안제이는 고향 켕티가 무너지는 걸 받아들일 수 없기에 앞장 서서 대도시의 횡포에 맞선다.

 

수십 만을 살리고자 수백 정도는 희생시킬 수 있는가?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폴란드에서 손에 뽑는 인구 수십 만의 대도시 브로츠와프를 살리고자 인구 수백의 소도시 켕티를 희생시켜도 되는가, 희생시켜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경제적 손해'라는 측면과 국가 전체의 '거시적 측면'에서 단순히 들여다볼 때 켕티를 희생시키는 게 합당하고 타당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손해를 덜 보며 재난을 조금 피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켕티 주민들 입장에서도 국가에서 다 보존해 준다고 하니 거국적으로 삶의 터전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켕티 주민이 국가와 대도시의 일방적인 횡포를 그대로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그들에겐 오랫동안 지켜 온 삶의 터전을 계속해서 지켜 나갈 권리가 있고 대부분은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재난의 징조를 일찌감치 그리고 주기적으로 보고받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 일어난 대참사의 원인을 켕티에게 돌리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 대치를 단순히 '다수 vs 소수'의 구도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여러 가지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인 트레메르, 마르차크, 안제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처한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했다. 소수에게 피해가 가는 줄 알면서도 다수가 사는 길을 택했고, 우리 가족에게 피해가 가는 줄 알면서도 우리 동네가 사는 길을 택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 지 그 누구도 결코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옳았고 또 모두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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