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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이토록 평화롭고 귀엽기까지 한 서부극이라니! <퍼스트 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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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퍼스트 카우>

 

영화 <퍼스트 카우> 포스터. ⓒ영화사 진진

 

강아지 한 마리가 숲속에서 뭔가의 냄새를 맡은 것 같다. 이내 주인이 그곳으로 오더니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백골, 두 명 분의 백골이 사이좋게(?) 누워 있는 모습이다. 시간이 어느덧 거슬러 올라가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다. 오티스 피고위츠 일명, 쿠키는 식량 조달 담당인데 뒤집힌 도마뱀을 바로 세워 줄 만큼 착하기에 일행에게 고기를 먹이지 못한다. 일행은 그런 쿠키를 무시하고 윽박지르고 때리기도 한다. 어느 날, 쿠키는 중국인 도망자 킹 루를 만난다.

 

쿠키는 킹 루를 숨겨 주고, 덕분에 킹 루는 도망가는 데 성공한다. 술집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는 둘, 함께 킹 루가 자리잡은 집으로 향한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킹 루는 이곳이야말로 풍요롭기 그지 없고 또 역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기에 기회라고 생각한다.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쿠키는 킹 루와 일상을 영위하다가 우연히 젖소를 본다. 제빵사 기술을 배웠던 쿠키는, 쿠키며 빵이며 비스킷에 우유를 넣고 싶다는 생각을 밝힌다. 맛이 훨씬 좋아진다는 이유였다.

 

관심을 가지는 킹 루, 야밤에 지키는 이 없는 젖소에게서 몰래 우유를 짜 오는 콤비, 다음 날 아침에 쿠키를 먹어 본다. 꿀만 첨가하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을 것 같다. 킹 루는 다음 쿠키를 장에 가져다 팔자고 제안한다. 가져다 팔아 봤더니 금세 동이 나 버리는 게 아닌가. 이후 매일같이 야밤에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 와 쿠키를 만들고, 우유와 꿀이 첨가된 쿠키는 나날이 인기를 더해 가는데... 많이 팔릴수록, 돈을 벌수록 불안감을 커져만 간다.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할 수 있을까?

 

평화롭고 귀엽기까지 한 서부극

 

1820년대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강 유역 일대는 미국과 영국의 공동 영토였다. 혼돈스럽기 그지 없는 그 시절이 배경이라면, 또한 빽빽한 숲이 일품인 그곳이 배경이라면,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같은 느낌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 <퍼스트 카우>는 서부극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의 분위기를 선사한다. 평화롭기 그지없고 자못 귀엽기까지 하니 말이다.

 

'새에겐 둥지를, 거미에겐 거미줄을, 인간에겐 우정을'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중 한 문구를 인용하며 시작하는 영화는, 초중반까지 거의 대사 없이 숲속 평화로운 면면을 비추는 데 시간과 공간을 활용한다. 서사도 없고 사건도 없이, 주인공들인 쿠키와 킹 루의 면면을 살짝 보여 주는 데 그친다. 한없이 착해 어렵게 사는 유대인 쿠키, 중국인 이민자로 쫓기는 신세인 킹 루.

 

<퍼스트 카우>는 자그마치 30여 년 전인 1994년에 장편 데뷔작을 내놓은 바 있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으로, 그녀의 일곱 번째 장편이기도 하다. 세계 3대 영화제가 두루두루 사랑하는 감독이기도 한 그녀, 뛰어난 작품성과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퍼스트 카우>로 처음 정식 소개되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계기로 그녀의 전작들이 국내에 하나둘 소개되지 않을까 싶다.

 

우정과 비주류에 관하여

 

서부극 하면 으레 광활하고 탁 트인 황야에서 총 들고 말 탄 무법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19세기 중후반의 서부개척시대 한가운데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곳에는 오직 야욕과 탐욕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 목숨을 걸고 간 이유가 없고 또 부지불식간에 목숨을 잃기 쉽다. 반면,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 즉 서부개척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두 남자 유대인과 중국인의 우정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며 비주류의 면면을 그려내기도 했다.

 

처절하게 생존해 막대한 부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서부극이라고 할 수 있을진대, 완전한 반전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한 착함과 순수함과 우정으로 함께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꽃이 피어나고 답답해 하면서도 응원하게 되며 어느새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찍이 이런 영화가 있었나 싶다. 이런 영화를 기다린 게 아닌가도 싶다. '전쟁 영화'라는 장르가 꾸준히 만들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수많은 시선과 관점이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듯이, <퍼스트 카우>를 계기로 '서부극' 또한 다양하게 변주되며 앞으로 더 많이 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정도로 이 영화가 준 충격이 상당히 크다. 비교적 최근 만들어진 특이한 서부극, 이를테면 <레버넌트> <카우보이의 노래> <헤이트풀 8> <슬로우 웨스트> <매그니피센트 7>이 비할 데가 아니다.

 

자본주의 아이러니를 꼬집다

 

<퍼스트 카우>가 마냥 평화롭고 귀엽기만 한 건 아니다. 두 주인공의 우정 이야기 또는 비주류의 이야기로만 볼 것도 아니다. 날카로운 비판 의식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1820년대 미국 컬럼비아강 유역은 비버 무역이 성행하며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미국 자본주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인데, 그곳에 첫발을 내디딘 젖소가 영화의 서사에도 중요하지만 메시지에서도 중요하다. 영국 교역상의 자본인 젖소의 우유를 두 남자가 훔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이야말로 전 세계 곳곳을 무력으로 짓밟으며 무자비하게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았는가? 이곳 컬림비아강에 온 이유도 거기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을진대, 그들의 소유인 젖소의 우유를 쿠키와 킹 루가 훔쳐서 분노에 치를 떠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더욱이, 그들은 젖소를 그저 자본이라고 생각할 뿐이고 쿠키는 젖소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며 공생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자본주의의 아이러니를 매섭게 꼬집는 방식이 상당히 우아하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유려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만의 연출 특징이 아닌가 싶다. 자연스럽게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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