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크림>
6개월 동안 열렬히 사랑하고 1년 반 전에 배신당하듯 헤어져 버린 다비드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는 도라, 그녀는 집에서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카페 'HAB'를 차려 운영 중이다. 그런데 세무사로부터 카페가 덜컥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그녀가 택한 건, 국가의 상업 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1등에겐 9만 5천 유로가 지급된다니, 파산 위기의 카페를 구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가족 사업에만 지원해 줄 수 있다는 것, 할 수 없이 포기하려는 찰나 그녀 앞에 다비드가 부인을 대동하고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도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하려 했고, 그 모습을 본 도라도 그 자리에서 급조한 거짓말로 프로그램에 지원해 버리고 만다. 그러곤 재빠르게 평소 안면이 있던 치과의사 마르시와 이웃집 꼬마 라시카를 영입해 가짜 가족을 급조한다.
그렇게 상업 진흥원의 점검 차 방문을 무리 없이 통과하고 나흘간의 워크숍에 참석하는 도라네 가족(?), 워크숍엔 도라네와 다비드네를 포함해 네 가족이 참석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가장 적합한' 가족을 선정해 돈을 지급할까? 도라네는 훌륭한 가족 연기로 1등을 차지해 도라의 카페 'HAB'을 파산의 위기에서 구해 내는 데 일조할 수 있을까?
동유럽 로맨틱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 장르 하면 할리우드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그만큼 할리우드가 로맨스 장르를 오랫동안 선보였고 그 하위 장르라고 할 만한 로코 장르의 역사도 오래 되었기 때문일 테다. 1990~2000년대에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대세 장르로 입지를 확고히 하기도 했던 바, 비록 이제는 '전형성'에 파묻혀 잘 만들어지지 않기조차 하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게 분명하다.
간간이 고개를 드는 게 유럽 로맨틱 코미디인데, 할리우드식 로코의 전형성에서 한 발 물러나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바 프랑스 배우 '오드리 토투'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여기, 헝가리에서 날아온 <크림>이 유럽 로코만의 매력으로 우리를 반기는데 '동유럽의 진주'라 불리는 비카 케레케스가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녀는 <희망에 빠진 남자들> <부다페스트 스토리> 등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다.
아울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주조연 배우들 모두가 나름의 확고한 캐릭터를 선보이는 바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도라'가 아닌 '마르시'와 '라시카'다. 마르시는 도라의 말도 안 되는 부탁 같지도 않은 부탁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고, 라시카 역시 도라의 황당무계한 제안을 우리가 보기엔 능청스러워 보이지만 그 나름대론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그들이야말로 '로코' <크림>의 핵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한 가족이 이상적일 수 있다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된 도라가 배신당하듯 남자와 헤어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남은 희망인 카페까지 문 닫을 위기에 처했으니, 그야말로 인생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런 와중에, 큰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가족'(비록 가짜이자 계약 가족이지만)이라는 형태로 오게 된 건 운명과도 같을 것이다. 영화적 설정의 허술한 구멍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영화는 유려하고 능청스럽게 지나간다.
도라뿐만 아니라 마르시, 라시카 그리고 워크숍에 참석하는 가족들의 면면이 모두 빠짐없이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자연스럽게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의 의미'와 부합하니 참으로 균형스럽다 하겠다. '정상'적으로 보이는 또는 보이려고 애쓰는 그들이 아닌 '이상'한 가족 도라네가 '이상'적인 가족의 면모를 한껏 보여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영화가 달달한 연애 이야기에서 시작해 마무리 또한 그럴 게 분명하고 그래야 할 테지만, 과정에서 보여 주려는 건 가족 이야기인 듯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럽 로코'의 면모를 이런 식으로 비추니, 볼 맛이 난다고 해야 할까? 별것 아닌 듯한 이야기로 비춰질지 모르나, 들여다볼수록 생각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아름다운 매력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엄연히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지향하는 바 색감, 미장센, OST 등에서 매력을 한껏 뽐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도라가 카페 'HAB'에서 파는 케이크들이 하나같이 할리우드 영화에 길이남을 로맨스 커플의 실제 배우 이름을 차용한 바, 그야말로 로맨틱을 대놓고 전시한 것과 다름없다. 도라의 성향을 내보이는 동시에 영화의 성향도 내보이는 소재다.
그런가 하면, 적절한 OST들이 영화의 장면장면들을 수놓는데 그중에서도 메인 OST인 'If I have you'가 귀를 사로잡는다. 은유적이고 서정적인 가사와 마음을 애틋하고 뭉클하게 만드는 선율이 늦가을을 풍성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 <크림>은 다양한 색감의 향연과 시의적절한 OST들을 만끽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한 가지 더 눈여겨 봤으면 하는 게 있다면, 예쁜 대사들이다. 특히 워크숍에서 마르시가 하는 대사들이 주옥같은데,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정을 원했어요"라든지 "모든 걸 혼자 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내가 있으니까" 같은 말은 앞뒤 맥락과 사정과 상관없이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 같다. 아름다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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