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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고 시작되는 14살의 뭉클한 여정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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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종착역>

 

영화 <종착역> 포스터. ⓒ필름다빈

 

중학교 1학년 14살 동갑내기 친구들 시연, 연우, 소정, 송희는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동아리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동아리 이름을 교감 선생님의 빛나는 머리에서 따 왔다고 하고, 활동다운 활동은 하지 않고 그저 노닥거리며 시간 때우며 활동 정도에 머무는 것이다. 여름방학이 되자 동아리 선생님이 제안 하나를 한다. 

 

'세상의 끝'을 주제로 한 사진 공모전이 있는데 여름방학 때 세상의 끝을 사진으로 찍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말이다. 네 친구들은 모여서 왜 이런 과제를 내 주냐며 불만을 표시하고 공유하기도 하지만, 과제는 해야 하기에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지? 언제 가지? 뭘 찍지? 어떻게 찍지? 그러다가 시연이 1호선 종착역인 신창역으로 가 보자고 제안해 함께 떠난다. 

 

지하철로만 2시간가량 걸리는 길을 떠난 네 친구들, 세상의 끝인 신창역에 도착한다. 세상의 끝엔 뭐가 있을까? 일단 이것저것 찍어 보고, 찍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기고 지치기도 한다. 그래도, 함께라서 웃을 수 있고 힘도 난다. 그들은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는 시기

 

14살이라는 나이, 중학생이 되며 이전까지의 '아동기' '어린이'라는 타이틀을 던져 버리고 '청소년'의 길로 들어선다. 여러 면에서 어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어린이도 아니기에, 과도기적인 측면이 다분하다.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나는 시기와 다음 챕터가 시작되는 시기가 맞물려 있기도 하다. 너무나도 중요하고 또 어려운 시기. 

 

영화 <종착역>은 바로 그런 나이인 14살의 동갑내기 네 친구가 '세상의 끝'을 찾아가 사진으로 남겨 오는 과제를 수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당한 함의가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영어 제목을 보면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짧은 휴가'라는 뜻의 <short vacation>, 한글 제목이 한 챕터의 마지막을 얘기하려는가 싶은 반면 영어 제목은 다음 챕터를 시작하기 전 갖는 짧은 휴가 같은 느낌이다. 

 

<흩어진 밤> <남매의 여름밤> <에듀케이션> <갈매기> 등으로 최근 한국 영화 신예 발굴단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출신 91년생 동갑내기 권민표, 서한솔 공동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베를린 영화제, 부산국제 영화제, 타이베이 영화제 등 굵직한 영화제들에 초청되는 등 호평이 잇따르고 있다. 

 

고작 14살, 세상의 끝으로

 

세상의 끝을 사진으로 찍어 오라고 하면 어디로 가야 할까? 해남 땅끝 마을로 가야 할까? 북극점이나 남극점으로 가야 할까? 네 친구들처럼 종착역으로 가야 할까? 14살 친구들의 경험과 생각과 환경이 버무러진 결과물은 1호선의 종착역인 신창역이다. 돌이켜 보면, 종착역을 향한 로망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없는 것 같다. 어딘가의, 무엇인가의 끝으로 가면 남는 건 돌아오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여정이라는 건, 여행이라는 건 반드시 뭔가를 남기기 마련이다. 네 친구들은 귀찮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나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여정의 끝에서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을 다양한 일들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고작' 14살 나이에 말이다. 

 

시연이는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고 소정은 연우와 송희가 둘만 좀 더 친해 보여서 고민이 있었는데, 서로 친하게 되어 좋다고 한다. 연우는 학원에서 1학년 과목을 완전히 떼다시피 하고 2학년 과목을 미리 배우고 있는데, 은근히 스트레스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네 친구들 모두 한데 모여 남자친구 이야기도 하고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도 나눈다. 

 

그들의 도란도란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아니, 네 친구가 둘러앉아 하는 이야기를 화면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공간도 다르지만 전혀 바뀌지 않다시피 한 감성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했다. OST 없이 현장음으로 오디오를 채우고 움직임 없이 롱 쇼트로 네 친구들을 오롯이 채운 방식이 큰 몫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기법으로 읽어도 문학적으로 읽어도 좋다

 

8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영화를 꽉 채우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느 하나 도드라지도 빠지지도 않는 네 주인공의 공헌이 절대적이다. 제아무리 30대의 젊은 나이라도 두 남성일 뿐인 감독들의 시선과 관점이 오롯이 투영된 14살 네 여자친구들의 이야기가 크게 와닿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방법이 애드리브다. 

 

장편 영화 경험이 전무한 친구들을 섭외해 애드리브만으로 숏을 꾸려 최대한 자연스럽게 서사를 이어가게끔 한 것이다. 날 것의 낯설기까지 한 느낌이 시종일관 물씬 풍기는데, 그래서 14살의 시선과 관점이 묻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영화 중간중간 네 친구들이 필름 카메라로 대충 찍은 듯한 사진이 '잠시 멈춤'한 듯 화면을 꽉 채우는데 그 모습이야말로 14살 네 친구들이 본 '세상의 끝'인 것이다. 관객은 그들을 보고, 그들은 세상의 끝을 보고. 

 

신인만의 도전 정신으로 패기 있게 과감한 연출 방식을 택한 감독들, 누구나 도전과 패기와 과감을 외칠 수 있지만 거기엔 명확한 주제 의식과 세밀함에 기초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러지 못할 땐 좋은 시도로 그치고 말거나 치기 어린 도전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 작품 <종착역>은 앞엣것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영화를 영화기법 상으로 들여다봐도 고개가 끄덕여지고, 영화를 서사나 주제같이 문학적으로 들여다봐도 역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뭉클해지는 순간과 '와,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 힘들 텐데, 이 작품은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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