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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예리하게 그려 낸, 가려진 진실의 파국 <빛과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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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빛과 철>

 

영화 <빛과 철> 포스터. ⓒ찬란

 

희주는 2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고려필터' 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오빠 내외가 근처에 살고 있지만 그녀는 기숙사에서 지내기로 한다. 과장으로 일하는 기원은 사장의 특별 지시에 따라 희주를 챙기려 한다. 마음을 다잡고 지내려는 희주 앞에 영남이 나타난다. 그녀는, 2년 전 희주의 남편이 사고를 내 혼수 상태가 된 사람의 부인이었다. 비록 희주의 남편은 죽었지만, 희주로선 그녀에게 한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둘이 같은 회사를 다니니, 희주는 더 이상 못 다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영남이 희주에게 아는 체를 한다. 희주는 도망가고 만다. 힘든 마음을 부여잡고 퇴근하는데, 어떤 여자 아이가 따라온다.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길래 희주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알고 보니 그녀는 영남의 딸 은영이었다. 은영을 쫓아낸 희주, 하지만 이후로도 은영은 희주의 주위를 맴돈다. 그러며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낸다.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희주가 알지 못하는 걸 말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은영은 희주에게 아빠가 2년 전 그날 죽으려는 마음에 차를 몰고 나갔다고 말한다. 

 

희주는 경찰에게 달려가 재수사를 요청하고 우연히 만난 기원에게 말하며 변호사까지 찾아간다. 은영의 말 한마디가 희주의 죄책감에 커다란 불씨를 당긴 것이리라. 남편이 가해자였다는 죄책감에서 사실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희망'에 이른 것이다. 희주는 오빠 형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남에게 달려가 따지는데... 이후 진실은 또다시 요동친다. 도대체 이 어둠의 진실이 진짜 있는 곳은 어디인 걸까. 진실이 있는 곳에 가닿으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감독과 배우들의 탄탄한 면면

 

영화 <빛과 철>은 자그마치 5년 전에 개봉해 전국민적으로 신드롬을 낳았던 희대의 미스터리 영화 <곡성>의 연출부로 장편영화 경력을 쌓았던 배종대 감독의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이다. 그는 한국영화의 미래이자 산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탄탄한 실력을 자랑하는 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꾸준히 단편영화들을 내놓으며 조명을 받았다. 

 

이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배종대라는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시킨 작품이라고 할 만한대, <곡성> 연출부 출신다운 면모를 선보였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탄식이 일 텐데, 나홍진 감독이 독립영화를 찍으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미스터리한 가운데 삭막하고 어딘가 기분 나쁜 분위기는 1차원적인 면인 듯하고, 빈틈 하나 없이 완벽을 가하는 연출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다. 배종대 감독은 나홍진 감독과 함께 일하면서 배워야 할 점들을 확실히 터득한 것이리라. 

 

그런가 하면, 배우진도 완벽에 가깝게 철저하다는 느낌이다. 불과 얼마 전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에서도 주연으로 얼굴을 비춘 바 있는 '염혜란' 배우가 영남 역으로 중심을 잡고, 드라마와 영화를 가리지 않고 큰 작품에선 조단역으로 작은 작품에선 주연급으로 자신만의 마스크와 연기를 선보인 '김시은' 배우가 희주 역으로 극을 이끌었으며, <벌새>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은 바 있는 '박지후' 배우가 은영 역으로 극이 요동치고 더욱 미스터리해지게 만들었다. 

 

독립영화에서 엿보는 상업영화의 가능성

 

영화는 연출 데뷔작이라곤 믿기 힘든 완성도를 자랑한다. 독립영화의 완벽한 계보를 잇듯 '피해자-가해자' 또는 '가해자-피해자'가 뒤죽박죽 얽히고 설키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상업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려는 듯 가려진 진실을 찾아가며 드러나는 파국의 단면들을 너무나도 예리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영화로서 즐기면서 보기에도 나무랄 데가 없고, 영화가 이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가 경종을 울리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우선, 상업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 하면 가해자의 아내 희주가 정녕 진실로 가는 계단을 한 개 한 개 오르며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다. 그녀는 지난 2년간 가해자의 아내로 살아오며 끝도 없는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다가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싶어 다시 돌아왔는데, 더 이상 도망갈 수도 도망가서도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맞딱뜨리게 되는 진실의 조각 하나하나가 그녀의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드러난 진실이 숨겨진 거짓보다 더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 아닌 관계된 모든 이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을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누군가에 의해서, 혹은 운명에 의해서 거미줄처럼 미로처럼 늪처럼 처진 함정에 빠진 느낌이다. 영화는 희주 그리고 사람들이 조금씩 함정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긴장감 어리게 풀어 냈다. 이름과 기능을 알 수 없는 신경전달물질이 생성되는 느낌이랄까. 

 

독립영화의 정통성을 되살리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가멸차고 파괴적인 굴레의 도식은 오랫동안 독립영화의 주요 테마로 군림해 왔다. 이 사회의 단면을 근접 거리가 아닌 위에서 조망하는 듯했기에 몇몇 작품들이 기록적인 성과를 이룩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이전만큼의 예리함을 장착하진 못했는데, 앞선 작품들이 너무나도 대단했기 때문인지 다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 <빛과 철>은 한국 독립영화의 정통성이랄까 하는 것을 세련되게 되살렸다고 해도 좋을 테다. 

 

이 도식에서 눈으로 보이는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는 사실상 둘다 피해자이다. 더 멀리 보면 관계된 모든 이가 피해자이다. 가려진 진실의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정작 가해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 따위가 아닌 사회라는 큰 틀에서 자행된 거대한 가해 말이다. 물론, 사회라는 게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정작 사회를 굴리는 건 '특정'한 개인일 것이다. 한편, 개인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위해서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희주와 영남은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칼 끝을 들이밀 수밖에 없다. 차마 그렇지 못한다면 자신에게로 칼 끝의 방향을 틀 것이다. 그들은 생각할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진실을 말이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들은 곧 우리와 매한가지이니,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독립영화는 작지만, 하는 얘기는 크다. <빛과 철>도 결코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없지만, 거기엔 너무나도 큰 얘기가 도사리고 있다. 다행인 건, 영화가 큰 얘기를 잘 다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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