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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감수성의 극치, '이와이 월드'의 결정판 <라스트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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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라스트 레터>

 

영화 <라스트 레터> 포스터. ⓒ스튜디오산타클로스

 

44살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미사키, 그녀의 딸 아유미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다. 미사키에겐 여동생 유리가 있는데, 그녀의 딸 소요카가 장례식이 끝난 후 여름방학이 다할 때까지 아유미와 함께 지내겠다고 한다. 유리는 허락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미사키에게 온 동창회 안내문을 받아든다. 유리는 미사키 대신 동창회에 참석해 소식을 알리고자 한다. 하지만, 미사키로 오해 받고는 연설까지 하고 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오토사카 쿄시로를 만나 연락처를 교환한다. 

 

유리는 남편과의 사소한 오해로 핸드폰을 망가뜨리고 쿄시로에게 편지를 쓴다. 발신 주소를 알리지 않은 채, 미사키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였다. 한 번이 아닌 몇 번이나 편지를 쓰며, 고향으로 가선 새로운 교사로 이전해 철거한 옛날 고등학교 교사를 찾아가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편지를 받기만 하던 쿄시로는 졸업 앨범을 찾아선 미사키의 옛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그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아유미와 소요카는 쿄시로의 편지를 받고, 미사키 행세를 하며 답장을 보낸다. 

 

옛날, 미사키와 유리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쿄시로가 전학을 온다. 그때 미사키는 전교회장으로 빼어난 미모와 출중한 공부 실력을 자랑하며 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유리는 존재감 미미하게 생물부에서 활동했는데, 쿄시로가 생물부로 들어와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쿄시로는 미사키를 좋아했고, 유리는 쿄시로를 좋아했다. 

 

다시 돌아온 '이와이 월드'

 

영화 <라스트 레터>는 데뷔하자마자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 '이와이 월드'를 구축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최신작이다. 우린 그를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지난 세기 말에 개봉해 센세이션한 업적을 남긴 바 있는 <러브레터>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일본에선 1995년에 개봉했지만 1998년까지 일본문화가 개방되지 않았기에 국내 개봉이 불가했다가 풀려서 개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그마치 국내의 일본 영화 정식 개봉 2번째 영화였다. 국내 개봉 이후, 마치 한을 풀듯 2013년 재개봉 이후 4차례나 더 재개봉을 이어갔다. 

 

이와이 슌지로 말할 것 같으면 '감수성의 극치'인데, 하여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마니아가 될 정도로 좋아할 테고, 싫어하는 사람은 한두 편 보고 말 것이다. 좋게 말해서 '이와이 월드'지, 나쁘게 말하면 그의 영화들 전부가 비슷비슷하다는 말일 테니까. <라스트 레터>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제목에서도 연상되듯 초창기 작품인 <러브레터>와 맞닿은 듯하니 이와이 슌지의 원형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 제쳐 두고, 영화를 위해 작은 역이라도 마다하지 않은 배우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러브레터>의 두 주연 배우 나카야마 미호와 토요카와 에츠시가 조연으로 출연했고, 이와이 슌지의 절친이자 <에반게리온>의 창시자 안도 히데아키가 역시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최고의 여배우 중 하나인 마츠 다카코와 일본의 국민스타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극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또한, 일본 차세대 스타들도 출연해 비중 있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다. 

 

'기억'이라는 테마

 

<라스트 레터>의 주요 테마는 '기억'이다. 미사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것, 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기억하게 될 지금 이 순간. 마음과 몸의 병을 이겨 내지 못하고 불행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 토노 미사키, 오토사카 쿄시로는 실로 오랜만에 만난 미사키(가 아닌 유리)에게 '널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어?' '25년간 쭉 널 사랑하고 있어'라고 문자를 보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쿄시로는 대학교 때 미사키와 잠깐 사귄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을 소설로 옮겨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기억에 너무 파묻혀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의 얼굴이 수심으로 가득 찬 건 다름 아닌 미사키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유리는 그런 쿄시로에게 언니에 대해 계속 써 달라고 부탁한다. 누군가가 그(미사키)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면,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게 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100% 동의한다. 기억에서 잊히는 순간, 살아 있는 사람도 죽는 게 되지 않겠는가. 

 

유리가 참석한 동창회에서 미사키의 졸업 연설이 흘러나온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둘도 없는 추억이 될 고등학생 시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래가 기다리고 있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선택지 또한 기다리고 있다. 모든 졸업생 한 명 한 명이 다른 누구와도 다른 인생을 걸어가게 될 텐데, 꿈과 가능성이 아직 무한하다고 생각했고 또 모두가 동등하고 소중하게 빛났던 이곳을 떠올리게 될 테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꺼내들 영화

 

새삼, 이와이 슌지 감독이 영화를 참 잘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잘하고 싶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실천에 옮긴 결과물들이 지난 30여 년의 세월에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 같다. 뜬금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와이 슌지의 삶의 여정을 들어도 손색이 없다. 그는 그만의 길을 걸었고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면 그의 영화들은 반쪽 짜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충만한 감수성으로, 언제든 다시 찾아 보고는 위로를 받을 테지만 현실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이야기들이 내 이야기 같지도 않다. 그래서 언제고 찾아 봐도 질리지 않을 텐데, 그때마다 '도피'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 우린 그의 세계로 언제든 도피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극중 미사키의 졸업 연설에도 나오듯, 괴로울 때나 힘들 때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듯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생각하지 않을까. 

 

이 영화는 내 무엇도 바꾸지 못했다. 괴로울 때나 힘들 때 우리는, 현실을 잊고자 심신을 안정시키고 생기를 되찾고자 한다. 또는, 현실을 바꿔 버리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정확히 전자의 역할을 할 텐데, 후자의 역할을 하는 영화들도 어느 정도는 전자의 역할도 하지 않는가.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전자의 행동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와이 슌지는 <라스트 레터>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든 것 같다. 한편으론 그거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실을 바꿀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게, 우리의 기막힌 현실이니 말이다. 그의 영화는 누구든 언제든 찾아갈 것이다. <라스트 레터>가 마지막이 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