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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20여 년만에 들여다보는 '스페인 최초의 미투' <네벵카: 침묵을 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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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네벵카: 침묵을 깨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네벵카: 침묵을 깨고> 포스터. ⓒ넷플릭스

 

2001년 3월 26일 스페인 레온주의 소도시 폰페라다, 시의원 네벵카 페르난데스가 수많은 기자 앞에 섰다. 그녀의 긴 성명을 옮긴다. 

 

"오늘 저는 제가 사랑하는 이 도시의 시의원 자리에서 사퇴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26살인 저에게도 존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몇 달 동안 직장 동료들과 저의 관계는, 특히 시장과의 관계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친구가 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스마엘 알바레스 시장은 친구 이상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몇 달씩 이어진 거절에도 목적을 달성했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2000년 1월 즈음에는 그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지옥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입니다. 추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장의 추행은 손수 쓴 메모와 문자, 편지,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제 인격과 업무에 대한 심각한 무시로 이어졌고 육체적, 정신적 존엄성을 훼손하는 부당한 대우와 처사를 일삼았습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일을 잊고자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지만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이러한 이유로 오늘 저는 제가 태어난 도시인 기소의 시의원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나고자 합니다. 이미 법적인 신고 절차도 마친 상태이며 언젠가는 정의가 실현되길 바랍니다."

 

성명의 처음과 끝을 보면 시의원 자리에서 사퇴한다는 게 주요 명제인 듯하지만, 들여다보면 이스마엘 알바레스 시장의 성추행 폭로가 주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스마엘 시장은 곧바로 수많은 기자 앞에서 반박한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결코 그런 짓을 한 적 없습니다. 어느 때, 장소에서도 절대 없습니다." 이후, 네벵카의 지옥은 다시 시작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네벵카: 침묵을 깨고>(이하, '네벵카')는 '스페인 최초의 미투'라고 재조명된 네벵카 사건을 20여 년만에 들여다본다. 당사자인 네벵카가 긴 침묵을 깨고 얼굴을 내밀었고 입을 열었다. 차마 생각하기에도 너무 힘든 그때를 다시 기억하고 가져오는 데에, 멀리서나마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녀는 일련의 사건이 끝난 후 폰페라다에서뿐만 아니라 스페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때도 대단했던 네벵카이지만, 지금도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네벵카 페르난데스와 이스마엘 알바레스

 

1999년 4월 어느 날, 네벵카는 카페에서 카를로스 로페스 리에스코 그리고 이스마엘 알바레스를 만난다. 당시 그녀는 마드리드에서 학교를 다니며 석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부모님과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한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네벵카 가족과 인연이 있는 카를로스가 네벵카를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고, 이스마엘의 오른팔 격인 카를로스의 추천으로 네벵카는 이스마엘 팀에 합류하게 된다. 젊고 똑똑하고 예쁘기까지 한 그녀는, 그야말로 '새로운 얼굴'을 대표하며 이스마엘에게 중요한 날개로 급부상했다. 

 

같은 해 7월, 이스마엘 알바레스는 압도적인 차이로 상대를 누르고 시장에 임명된다. 폰페라다 출신으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성실하게 시장에까지 올라온 이스마엘을 좋아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또한 그의 시장 임기가 폰페라다의 확장기와 겹쳤으니, 친근한 이미지에 진취적 이미지까지 덧입히게 되었다. 네벵카가 보기에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마드리드에서 투병 중인 부인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모습에선, 그를 좋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이스마엘의 여성 편력 이야기가 들려온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거나, 밤 문화를 지극히 사랑한다거나 하는. 하지만 네벵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정치인이라면 갖가지 소문이 으레 따라 붙기 마련이니 말이다. 머지 않아 네벵카 페르난데스 가르시아는 시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녀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순조롭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희망에 부풀어 뜻깊은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자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해 8월, 이스마엘 알바레스의 아내가 사망하고 만다. 그는 큰 충격을 받지만 시장 업무와 그에 따른 대인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한편, 네벵카와 이스마엘의 관계를 진전된다. 친구로 시작해 호감 있는 사이로 지내다가, 아내가 떠난 뒤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여기서 네벵카를 두고 그 누구도 '이상한' 말을 할 수 없다. 그녀가 이스마엘을 사랑했든 동정심으로 그러했든 사귀었는데 어떻게 성추행으로 발전될 수 있냐는 맥락 말이다. 또는, 네벵카가 이스마엘을 이용했다든지 먼저 다가갔으니 할 말이 없다느니 하는 말들 말이다.

 

권력형 성추행

 

네벵카와 이스마엘의 연인 관계는 오래지 않아 깨진다. 이스마엘이 성적으로 네벵카에게 집착하는 걸 네벵카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이별 이후 지옥같은 나날이 시작된다. 이스마엘이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네벵카를 궁지로 몰아넣어서는 망치고 깎아내린 것이다. 본인의 이미지를 챙기고 유지하면서 그녀의 이미지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최악으로 끌어내리고는, 뒤에서는 성적으로 추행하고 폭력까지 행사했다. 

 

네벵카로서는 이스마엘에 비해 유무형의 힘도 없고 이미지도 실추되어 움츠려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스마엘이 성추행을 시도했을 때, 그녀로서는 극도의 공포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제지하지 못했으며 이후에도 신고하지 못했다. 흔히 성추행 피해자에게 던지곤 하는 말, '왜 거절하지 않았느냐,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가 통용될 수 없었던 상황이다. 거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했고, 신고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했다. 이는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통용된다. 

 

그녀가 당한 성추행 앞에는 중요한 단어가 붙는데, 바로 '권력형'이다. 막강한 권력의 힘이 선행되는 성추행, 인류 역사상 수없이 자행되고 또 반복되었을 게 명명백백한 권력형 성추행이 1999년 스페인의 소도시에서 여지없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정작 우리에게 특별한 건 사건 자체보다 네벵카에 가닿아 있다. 그녀가 참지 않고 용기 있게 결단해 알리고 또 신고 후 재판까지 진행하며 정녕 '끝까지' 나아간 데 있다. 2010년대 중후반 전 세계를 뒤흔든 '미투 운동'의 스페인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기에서 왔다. 

 

미투 운동은 2006년 미국의 사회 운동가 타라나 버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사회에 널리 퍼진 성적 학대와 성폭행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미투'라는 문구를 썼다고 한다. 이후 음지에서 꾸준히 운동이 계속되다가 2017년 10월 미국의 유명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성추문 사건 후 배우 겸 가수 알리사 밀라노가 제안하면서 양지로 끌어올려졌다.

 

단순히 '미투'라는 문구를 다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가해자의 실체를 폭로하고 나아가 여성으로서 성피해자로서 수치심과 공포를 이겨 내며 나아간 것이다. 여성주의 역사, 반권력투쟁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운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네벵카는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승리 이후

 

2002년 5월 29일 법원은 이스마엘 알바레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그는 벌금 6,480유로를 내야 했으며, 네벵카 페르난데스에게 배상금으로 12,000유로를 내야 했다. 지난 2019년 3심 끝에 징역 3년 6개월을 확정받아 감옥에 가야 했던 전 충남도지사이자 유력 대권주자였던 안희정의 사례에 비해, 터무니없이 솜방망이 같은 선고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자그마치 2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실 진짜 문제는 네벵카의 승리(!) 이후에 있었다. 이스마엘의 추종자 또는 매수된 자들 3천여 명이 광장에 모여 이스마엘을 응원하고 또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네벵카를 지지하는 단체에선 3백여 명이 와서 대치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성추행에 맞서는 이는 비록 혼자가 아니었지만, 성추행자를 따른 이는 너무나도 많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스마엘 알바레스는 다큐멘터리 참여를 거부했다. 그는 염치도 없이 지난 2011년 독립당 소속으로 재선에 나서서 다섯 석이나 얻어 냈다. 다시 기어 나온 것도 황당하지만, 그가 다시 나오게끔 한 스페인이라는 나라나 그가 다섯 석이나 얻게 만든 스페인 사람들이나 황당하기 그지 없다. 2013년엔 정계를 떠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폰페라다에 살고 있다고 한다. 반면 네벵카 페르난데스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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