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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엄마와 딸의 심리와 감정을 스릴러로 파고든 똑똑한 영화 <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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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런>


영화 <런> 포스터.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치>에 대해 우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 혜성같이 나타나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고, 불과 100만 달러도 되지 않는 저예산의 제작비로 전 세계 7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을 벌였다. 산호세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 아버지가 스터디 그룹을 하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실종된 딸을 찾는 별다를 게 없는 이야기이지만, 오로지 전자 기기 스크린으로만 장면을 구성한 혁신성으로 찬사를 받았다. 


아니쉬 차칸티 감독은 1991년생으로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놀라운 장편 데뷔식을 이뤄 낸 바, 29살에 <위플래쉬>로 전 세계를 강타한 '데이미언 셔젤'이나 역시 29살에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 작품 <파이>를 내놓은 '대런 아로노프스키'나 자그마치 19살에 칸 입성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내놓은 '자비에 돌란'이 떠오른다. 이들의 천재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아니쉬 차칸티 감독의 앞날도 기대된다. 그런 와중에 데뷔 후 2년 만에 신작을 들고 온 아니쉬 차칸티 감독, 일찍이 차기작은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라고 공표한 바 있다. 


영화 <런>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풀어낸 바, <서치>처럼 깨알같은 재미와 더불어 부모가 자식의 다른 면모와 아픔을 알아가고 결국 부모와 자식 간의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되는 유려한 서사를 기대할 수 있겠다. 또는, 서사의 힘을 키워 줄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된 다양한 전자 기기 스크린들로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 점을 기대할 수 있겠다. 감동과 재미는 물론, 새로운 방식과 함께하는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를 기대하게 한 것이다. 


석연치 않은 엄마와 딸


미국 워싱턴 시애틀의 외곽 마을. 부정맥, 혈색소증, 천식, 당뇨, 마비 등의 치명적인 병들을 달고 태어나 엄마한테 홈스쿨링을 받으며 살아가는 소녀 클로이, 요즘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워싱턴 대학교 입학 여부다. 비록 몸이 그러 하기에 쉽진 않겠지만, 엄마 다이앤의 말마따나 그녀는 '똑똑하고 용감하다.' 엄마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일까, 어려움을 갖고 태어나면서 갖게 된 천성일까. 


어느 날, 엄마가 장을 봐온 물품에서 엄마 몰래 초콜릿을 슬쩍하다가 초록색 알약이 담긴 약통을 보게 된다. 거기엔 분명히 엄마 다이앤의 이름이 써 있었다. 그런데 당일, 다이앤이 바로 그 약을 클로이에게 주는 게 아닌가. 클로이는 의아함에 대꾸를 해 보지만 다이앤은 잘못 본 거라며 넘어가 버렸다. 다음 날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한 클로이는 다시 한 번 약통을 확인하고는 엄마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다이앤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면을 뜯어 내니, 클로이로 되어 있는 면이 찢긴 채로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클로이는 그때부터 초록색 약의 정체를 알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인터넷에도 찾아 보고, 여기저기 약국에 문의도 해 보고, 급기야 엄마와 영화를 보러 시내에 나가선 엄마 몰래 약국에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결국, 정체를 알아 내지만 엄마한테 잡혀 방에 갇히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클로이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도망쳐야 할까? 어떻게? 다이앤은 왜 그 약을 클로이에게 먹였을까?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걸까.


엄마의 집착, 딸의 탈출


영화 <런>은 엄마에게서 달아나려는 딸의 이야기 그리고 딸에게 치명적으로 집착하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유명한 콜픔렉스 이야기 중 하나인 '페르세포네 콤플렉스'를 들여다보자. 곡식의 여신 테메테르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 보며 보호한다. 딸 페르세포네는 안정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어느 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갔고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의 여왕이 된다. 테메테르는 큰 충격을 받고는 남편 제우스의 도움으로 겨울이 아닌 날에 딸을 볼 수 있게 된다. 페르세포네는 온전한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영화는 스릴러 장르의 영화적 장치를 다분히 깔아 두며 신화적 이야기의 메시지를 극대화시켰지만, 표피 아래 핵심엔 인간 세계에 오래토록 내려오는 신화가 있다. 책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보면, 엄마가 딸에게 집착하는 이유로 '타인의 빈 곳을 채우는 방식으로 존재를 실현하는 심리적 기질'을 든다. 엄마는 딸을 같은 여성으로서 동일시하며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딸을 대하길, 딸은 딸로서 정체성 뚜렷한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이자 또하나의 나인 것이다. <런>에서 다이앤은 클로이가 영원히 아기이길 원한다. 


하여, <런>의 '런'은 클로이가 다이앤의 위협에서 물리적으로 도망치려는 의도가 깔린 단어이기도 하지만 딸이 엄마의 집착에서 심리적으로 독립하려는 의도가 깔린 단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적 재미로서의 물리적 탈출 의도가 다분히 깔린 클로이의 불편한 몸 설정은 가히 탁월했다고 본다. 영화를 보며 충분히 즐길 수 있게 장치를 마련해 두는 동시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기반도 충분히 있으니 말이다. 정녕 '똑똑한' 영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깔끔하고 좋을 수 없다


전작 <서치>도 그랬지만, 이번 <런>도 참으로 심플하다. 한 문장으로 표현이 가능할 정도의 전체 이야기 구조도 그렇지만, 주요 등장인물이 터무니 없이 적은 것이 특히 그렇다. 전작에선 '존 조'가 원탑의 핵심이었다면, 이번엔 '사라 폴슨' 그리고 '키에라 앨런'의 투탑이 극을 완전히 이끌었다. 엄마 다이앤 역의 사라 폴슨이야 주로 TV에서 활동하며 에미상과 골든글러브를 휩쓴 대배우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딸 클로이 역의 키에라 앨런은 이 영화로 영화계에 데뷔한 배우로 실제로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한다. 


엄마의 섬뜩한 애정이 더할 나위 없이 무섭게 다가오고, 딸의 의아함에서 의구심, 의심, 확신, 혼란으로 변해 가는 심리의 변화가 공감까지 불러 일으킨다. 두 배우의 케미가 영화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 준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테다. 아니쉬 차칸디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때 어떤 배우들과 함께할지도 기대되는 바다. 


<런>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라는 문장을 여지없이 실현했다. 현실성이 다분한 이야기, 설정, 관계 등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으로 한순간에 빠져 들게 한 다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미세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면서, 기저에 깔린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신화로 탄탄하게 뒷받침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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