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독자에게]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표지 ⓒ유노북스
제목부터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원작 <Bright Precious Thing>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다. 저자와 책이 국제적으로 유명한 경우 원작의 표지와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곤 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기에 모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제목만 봐서는 도통 무슨 책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한편 무슨 책일까 하고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즉 출판사 내부에서의 강력한 반대를 무릎쓰고 이 제목을 밀어붙인 데에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퓰리처상 수상 작가 게일 캘드웰의 네 번째 에세이로 그녀의 강렬하고도 참혹했던 젊은 날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녀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특별한 여성들 이야기 그리고 이웃집 소녀 타일러와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 이야기를 큰 축으로 전한다.
저자는 말한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된 그녀의 젊은 날도 반짝거리고 소중하고, 그녀가 꿋꿋하게 살아 낼 수 있게 해 준 특별한 여성들도 반짝거리고 소중하며, 노년에 이른 그녀가 삶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강력한 힘과 의미로 다가온 이웃집 소녀 타일러도 반짝거리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저자와 저자의 삶을 둘러싼 것들과 저자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소중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저자의 젊은 날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강렬하고 참혹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되었기에, 역설적으로 반짝거리고 소중하다는 표현을 쓴 것일까. 또한, 그런 저자가 '특별하다'고 한 여성들은 누구일까. 그들에게서 어떻게 영향을 받은 걸까. 가장 궁금한 건 이웃집 소녀 타일러가 아닐 수 없다. 그녀 덕분에 한없이 무겁고 아프고 슬플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믿기 힘든, 믿기 싫은, 여성으로서의 젊은 날
이 책이 최초에 눈에 들어오고 번역출간을 결심하고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게 된 건,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여성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데, 하여 이 출판사에 들어오고 난 후 여성 에세이를 꾸준히 출간해 왔던 바,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거니와 결이 다른 점도 있다 하겠다. 이 책은 '미투 캠페인'으로 폭발한 '페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밝히길, 본인은 여성운동의 혜택을 제대로 받진 못했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출판사로선 모험이고, 책임기획편집자로선 좋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 또한 고백한다.
들여다보면, 이 책의 중심이 되는 저자의 젊은 날 이야기가 '미투'와 다름 아니다. 1951년생인 저자가 대학에 진학한 1968년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무례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 삶을 살아 낸 이야기 말이다. 간략하게나마 서술해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수학과 교수한테서 미적분은 여성과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여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놈한테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1970년 19살엔 당시만 해도 불법이었던 임신 중절 수술을 받으러 멕시코까지 갔다 왔고 히치하이킹을 하려다가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보스턴 글로브>에서 어엿한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에도 유명한 남자 작가에게 '정중하게' 성희롱을 당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저자는 손가락 열 개로 세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주 가지각색의 성희롱을 당해 왔다고 말한다.
기획편집하면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차례 훑고 정독하고 한 글자 한 글자 따로 떼어놓으며 읽었지만 지루하기는커녕 볼 때마다 새로웠다. 아마, 저자가 겪었던 일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인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싫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올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오며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남자들이 들으면 어리둥절하고 낯설겠지만, 여성이라면 옆집 이웃만큼이나 익숙하게 느낄 만한 이야기들이라고. 그런가 하면, 본인의 이야기가 시시하다고 말한다. 훨씬 암울한 이야기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극악무도한 폭력과 악랄한 포식의 상황에 놓인 여성들이 많다고 말이다. 사람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곤 하는데, 실상은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다를 줄은 몰랐다. 이 책을 통해 고백한 저자의 삶에는 일말의 거짓말도 없을 테니, 우리는, 우리 남자들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생각하고 대하는 걸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자유니 평등이니 정의니 박애니 따위를 논할 순 없을 것이다.
암울한 젊은 날을 꿋꿋이 살아 낼 수 있게 한 특별한 여성들
이 책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에 암울한 이야기만 들어 있진 않다. 저자가 추구하는 바도 아닐 뿐더러, 읽는 재미와 사색의 감동을 내보이는 에세이로서의 가치에도 맞지 않다. 하여, 저자는 암울한 젊은 날을 꿋꿋이 살아 낼 수 있게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특별한 여성들을 소환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인과 문학 속 인물, 가족, 선생님, 멘토, 친구 그리고 이웃집 소녀 타일러에 이른다. 그들은 저자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웃집 소녀 타일러는 저자가 말하는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의 핵심이자 저자가 앞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을 전해 주어야 할 후세의 상징과도 같다.
그녀를 차별한 수학 교수 이전에 스프링어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그녀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음에도 당당함과 다정함을 잃지 않았는데, 저자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가 하면, 캘드웰이 중년일 때 만난 늙은 마조리는 자신감 넘치고 용맹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개들과 함께 살았는데, 부자였기도 했던 바 뭇 여성들의 멘토이자 롤모델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품위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 주었다. 저자에겐 우정 이상의 소울메이트로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했고 함께하고 있으며 함께할 캐롤라인이 있다. 그녀는 비록 저자와 오랜 세월 함께하지 못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책은, 저자의 젊은 날 이야기와 현재 저자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웃집 소녀 타일러와의 우정이 큰 얼개를 구성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보다 보면, 분개하고 슬퍼하다가 언젠가 싶게 웃고 즐거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이야기를 대함에 있어 감정의 확실한 높낮이를 부여하려는 저자의 계책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타일러라는 존재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된다. 그녀 덕분에 매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거니와, 전체 이야기가 가고자 하는 곳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결국, 무례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갈 타일러에게 건네는 기억인 것이다.
작업하는 내내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슬프기도 했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으며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이 책을 '포장'하면서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했다. 대신 품위와 기품을 유지하고 내보이고자 했다. 그것이 여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라고, 남자로서 감히 생각했다. 많은 분께 가 닿길 바랄 뿐이다.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길 바란다. 특별한 여성들이 전하는 영감과 유산이 모두에게 닿길 바란다. 이 책의 편집자로서 작지만 큰 바람이다.
반짝거리고 소중한 것들 - 게일 캘드웰 지음, 이윤정 옮김/유노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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