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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21세기의 공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간이 실존 차원에서 엇갈린다 <트랜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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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트랜짓>


영화 <트랜짓> 포스터. ⓒ엠엔엠인터내셔널



나치독일이 프랑스 파리로 진군하자 마르세유로 탈출을 시도하는 게오르그, 그는 탈출 직전 지인의 제안으로 유명한 작가 바이델에게 아내가 보낸 편지와 멕시코 영사관으로부터 온 비자허가서를 전하고자 한다. 바이델이 머무는 호텔을 찾아갔지만, 그는 마지막 작품의 원고만 남긴 채 자살한 후였다. 게오르그는 한쪽 다리를 잃은 친구와 함께 몰래 기차를 타고 탈출한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그들, 하지만 친구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고 게오르그만 홀로 마르세유에 발을 디딘다. 


친구의 집으로 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는, 친구의 아들과 종종 시간을 보낸다. 그러며 멕시코 영사관으로 가서는 바이델의 원고를 전하는데, 영사가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인해 그에게 비자와 승선표까지 준다. 뿐만 아니라, 바이델의 아내 마리가 매일같이 영사관에 들러 남편을 찾는다는 사실을 전해주며 그녀의 비자와 승선표도 함께 준다. 


게오르그는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리고, 여러 장소에서 계속 그녀와 마주치는데, 다름 아닌 그녀가 마리였다. 어느 날, 친구의 아들이 아파 소아과 의사를 찾아 가는데 그곳에 마리가 있었다. 의사 리처드의 고민을 들어주다 마리와도 엮이게 되는 게오르그, 마리는 떠나고자 남편을 찾았고 리처드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데 마리 때문에 머무는 중이며 게오르그 또한 바이델로 둔갑해 얼마든지 떠날 수 있지만 마리 때문에 고민 중이다. 더군다나 그에겐 마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마리의 비자와 승선표가 있으니...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독일을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


독일에서 건너 온 영화 <트랜짓>은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군상의 실존적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듯하지만 장소는 명백히 현대라는 점에서 비춰 볼 때, 난민 문제를 우회적으로 또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했다는 걸 추측할 수 있겠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바바라>에 이은 두 번째 국내 개봉작이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 게오르그와 마리는 독일을 대표하는 젊은 배우들이 분해 나름의 익숙함을 선사했다. <인 디 아일> <해피엔드>로 얼굴을 알린 프란츠 로고스키가 게오르그로 분했는데, 특유의 건조한 듯 밋밋한 듯 선한 듯 믿음이 가는 듯 매력적인 연기로 극을 이끌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없이 많은 고민을 끌어안은 캐릭터를 잘 보여 주었다. 이 작품 이후에 테렌스 맬릭의 <히든 라이프>와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운디네>에도 얼굴을 비추며, 거장이 찾는 배우도 거듭나고 있다. 


마리로 분한 폴라 비어는 우리에게 더욱더 익숙하다. 그녀는 1995년생으로 채 서른이 되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예술영화 거장들이 찾는 페르소나 또는 뮤즈라고 할 만하다. 프랑소와 오종의 <프란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가 미상>, 그리고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트랜짓>과 <운디네>까지 모두 주인공을 맡았다. 작품에서 그녀는 시종일관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로 분해, 활기를 불어넣고 입체감을 부여했다. 그녀가 없었으면, <트랜짓>은 상당히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 한 작품이었을 수도 있었다. 


21세기의 공간, 제2차 세계대전의 시간


영화 <트랜짓>은 독일 출신의 작가 안나 제거스의 1944년작 자전적 소설 <통과비자>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을 번역 출간한 창비에 따르면, 제거스는 동독 최고의 작가이자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반파시즘 망명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영화 속 게오르그처럼 나치 정권이 수립되자 파리로 망명했고, 이후 여러 나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 귀국했다. 


주지했듯, 이 영화에는 명명백백한 특이점이 존재한다. 공간적으로는 21세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떠나려는 자와 떠나야 하는 자와 떠나지 못하는 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그때가 아닌 지금의 난민 문제를 짚고자 하는 게 눈에 띈다. 


아직까지는 독일군이 진군해 오지 않은 마르세유, 다양한 인종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모여 들어 다양한 직업을 형성한 채 하루빨리 떠나기를 바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떠나는 건 상당히 요원하다.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그들 중 태반은 떠나지 못할 경우 독일군에게 잡혀 꼼짝 없이 죽을 판이다. 


지금도 하등 다를 바 없다. 난민이라는 게 인종, 종교, 정치, 사상적 차이에 따른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이나 나라로 탈출 및 망명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바, 그들 대부분은 떠나지 못할 경우 꼼짝 없이 죽을 판이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선뜻 그들을 받아 주지 못하는 상황, 인도적 차원과 정치·경제적 차원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본다.


생존의 문제 넘어 실존의 차원까지


주인공을 둘러싼 군상들의 모습을 통한 생존의 문제와 함께, 영화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실존의 차원도 다룬다. 떠나려는 자와 남으려는 자, 떠나야 하는 자와 남아야 하는 자, 떠나고 싶은 자와 남고 싶은 자... 생존의 문제에선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떠나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 담길 때 무조건이란 없다. 생존도 사랑에 앞서지 않는 것이다. 실존의 영역에선 사랑만이 있고 생존 따윈 없을 수 있다. 


게오르그는 목숨을 걸고 파리에서 탈출해 마르세유에 왔고 우연히 얻은 천우의 기회로 멕시코에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마리를 본 순간 대수롭지 않아졌다. 그로서는 어느 순간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리처드도 비슷하다. 모든 걸 마련해 두었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그녀를 만나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가 오직 남편만을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마리는 리처드에게도 게오르그에게도 마음을 주지만, 자신의 비자와 승선표를 갖고 있는 남편 바이델만 찾을 뿐이다. 


지독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평상시가 아닌 목숨이 오가는 전시를 배경으로 하기에 실존 이야기에 가깝다. 생존과 실존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무엇을 택할 수 있겠는가. 게오르그와 리처드는 실존을 택했지만, 마리는 사실상 생존을 택했다. 하여, 영화는 마리를 '나쁜 년'으로 비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는, 생존보다 실존을 더 우위에 두고는 실존의 영역에서 고민하는 두 남자의 수단으로 마리를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성 캐릭터를 이런 식으로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비판 받을 여지가 있겠다. 


그럼에도 <트랜짓>이 수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생존과 실존의 문제를 제시하며, 현재의 난민 문제와 사랑의 관계를 유려하게 펼쳐 보이는 데 막힘이 없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한껏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