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사라진 시간>
영화 <사라진 시간> 포스터.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배우가 제작을 겸하거나 제작만 하는 경우를 이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영화배우가 감독을 겸하거나 감독만 하는 경우는 흔히 접하기 힘들다. 제작, 감독, 배우를 놔두고 보았을 때 제작을 제외한 감독과 배우가 상충하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연기력과 흥행력을 보장하는 배우들이 왕왕 감독으로 나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배우로선 신선하지 않지만 감독으로선 신선하기 그지없다.
할리우드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대표적이랄 수 있겠고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벤 애플렉, 안젤리나 졸리, 조지 클루니 등이 뒤를 따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들어 두드러지는데 하정우, 문소리, 김윤석 등의 배우들이 장편 감독으로 데뷔했다. 두드러진 성적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얼마 전에는 정진영 배우가 감독으로 데뷔했고, 얼마 후에는 정우성 배우가 감독으로 데뷔할 예정이다.
정진영 배우의 연출작 <사라진 시간>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울대 국문과 출신의, 연극으로 연기를 갈고닦으며, 영화감독이 꿈이었지만 길이 열리지 않아 잠시(?) 접고, 영화배우로 진출했다. 뛰어난 연기력은 물론, 3개의 천만 영화에서 주연 또는 주연급으로 출연하였기에 흥행력까지 보증수표다. 더불어 TV드라마에도 진출해 두루두루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17살 때 꿈이 57세에 이르러 이루어졌으니, 어찌 평범할 수 있으랴. 정진영 감독이라는 낯선 타이틀의, 낯설기 짝이 없는 이 영화를 들여다본다.
한순간에 바뀐 나, 꿈인가?
충청북도 시골 마을, 초등학교 선생님 부부가 내려와 살고 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다 못해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부부에겐 한 가지 비밀이 있다. 밤이 되면 여지없이 아내에게 귀신이 들리는 것이다. 어느 날엔 시어머니가, 어느 날엔 이주일이, 어느 날엔 역도산이... 당연히 부부 외엔 그 누구한테도 비밀이었는데,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 정해균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 전체가 알게 된다.
마을은 이들 부부 특히 아내를 이대로 용인할 수 없었다. 결국 특단의 조치로 밤이 되면 2층에 아내만 가두고는 열쇠를 정해균이 가져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돌려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볼 순 없었기에, 어느 날부터 남편도 아내와 함께 있기로 한다. 그리고 그날... 집에 불이 나고 부부는 탈출하지 못한 채 타 죽는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박형구 형사, 마을 사람들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강하게 밀어붙인다.
박형구는 마을 사람들이 선생님 부부를 직접적으로 죽이진 않았더라도 간접적이나마 일조했다는 확실을 갖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주최한 파티 아닌 파티, 마을 어르신의 생일잔치에서 생소한 술을 진탕 마시곤 한 정자에서 곯아떨어진다. 학교 교장 선생님의 전화로 깨어 보니, 불에 탔었던 선생님 부부의 집이 아닌가. 자신은 박형구 형사가 아닌 '선생님', 아내와 아들들은 사라졌다. 잠에서 깨기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간과 공간이 그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차원에서 교묘하게 직조된 환경으로 다시 시작된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언가, 꿈인가?
가면 쓴 나도 나 vs 내가 아닌 가면 쓴 나
영화 <사라진 시간>은 형사가 주인공으로 나와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아니, 취하는 척한다고 해야 할까. 어느 순간 미스터리의 시선을 사건이 아닌 형사 자신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미스터리한 사건의 여파는 이어진다. 혹시 마을 사람들이 철처하게 짜고 그를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하지만, 흐를수록 그것도 아닌 듯한 느낌이다. 결국 남는 건 박형구 형사 자신.
영화는, 일단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된 초등학교 선생님 남편과 밤마다 귀신에 들리는 아내 부부의 이야기와 사건 그리고 박형구 형사가 사건을 담당하다가 술에 잔뜩 취하고 나선 같은 시공간이지만 형사 아닌 선생님이 되고 난 후의 이야기.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게, 두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게 있다면 '마을 사람들'이다. 부부의 입장과 선생님이 된 박형구의 입장에서 보면, 마을 사람들은 철저하게 타자화된 이들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들은 용인하기 힘들고 용인할 수도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나이지만, 남들이 하나같이 나는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 되는 것인가? 부부는, 비록 남들에겐 말 못할 비밀이 있지만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도 남았다. 내가 나로 충분했던 거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이 된 박형구는 원래의 삶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체화하고 있다. 남들은 그를 두고 정신이 이상하다느니 원래의 삶은 꿈에 불과하다느니 하지만, 그로서는 지금의 그가 아닌 원래의 그가 진짜 그인 것 같은 것이다.
정진영 감독은, 남의 인생을 살고 남의 생각을 체화하여 살아가야만 하는 배우로서의 인생과 그에 따른 고민을 이 영화로 녹여낸 게 아닌가 싶다. 비단 그런 고민은 배우만 느끼는 건 아닐 테니, 누구나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대할 때면 가면 아닌 가면을 쓰지 않는가. 그럴 때 가면 쓴 나는 진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가면 쓴 나도 나라고 하는 반면, 누군가는 가면 쓴 나는 내가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여야 하는가? 누구일 수 있는가?
영화를 구성하는 큰 두 부분의 주요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들여다보면 위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스토리를 중심으로 영화를 들여다보면 또 다른 철학적 질문에 다다른다. 선생님이 된 박형구의 혼란스럽고 슬프기까지 한 상황들을 함께하다 보면 '꿈'이라는 단어에 가닿게 되는데, 그가 생각하는 '원래'의 삶이 꿈인지 생생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삶이 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자연스레 장자의 호접몽이 생각나며 이후엔 만물엔 구분이 없다는 물아일체까지 나아감이 마땅하나, 이 영화는 그러지 않았다.
하여, 스토리를 통해 이 영화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헛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실이 꿈 같고 꿈이 현실 같은 요지경의 세상과 삶을, 그저 보여 주려는 데 의의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후에 계속되어야 마땅한 생각과 의미 부여 그리고 최소한의 해결책은, 보는 사람들에게 맡긴 것일 테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일반 대중의 많은 질타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감독의 뜻깊은 의도가 뜻깊게 가닿지 못한 결과라 하겠다. 개인적으론, 도무지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에 살아가면서 건설적인 해답이라도 찾고자 노력할 것 같다.
<사라진 시간>이라는 영화 전체가 다름 아닌 이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누구일 수 있는가?'를 위한 도구이자 수단이자 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영화를 포함한 대다수 콘텐츠가 방법론으로 기능한다. 즉, 영화 자체가 매우 중요한 건 당연하고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이 영화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예시 정도로 보인다. 사실상 정진영 감독은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고 말이다.
영화 <사라진 시간>은 감독에의 오래된 꿈과 연기에의 오래된 경력 그리고 삶에 대한 고찰과 인문학적 성찰이 두루두루 어우러진, 원숙하면서도 참신한 데뷔작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에서, 하려는 이야기를 기어코 해내고 만들려는 영화를 기어코 만들어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문법과 규칙과 틀을 깨트리고 파격을 시도하는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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