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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90년대 한국을 상징하고 대표한 컬트작 <태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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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태양은 없다>


영화 <태양은 없다> 포스터. ⓒ삼성영상사업단



3년 전 <아수라>로 영화 안팎으로 유명세를 치른 김성수 감독,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인지 시대를 잘못 읽었기 때문인지 그의 10편도 채 되지 않은 장편연출작들 중 많은 작품들이 뒤늦게 진가를 발휘하곤 했다. <아수라>가 대표적이라 할 만하고, 비교적 최신의 <감기>나 20여 년 전 <무사>도 그러했다. 그만큼 그만의 스타일이 확고하다는 반증일 수 있겠다. 


그의 연출작 7편 중 배우 정우성이 차지하는 바가 절대적이다. 초기 3편과 최근작 1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정도면 페르소나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인데, 정우성의 말없는 눈빛 연기가 주는 절대적 강렬함이 김성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과 맞아떨어졌다고 하겠다. 이 조합에 대중들은 열광했고 <비트>와 <태양은 없다>는 자타공인 성공에 <무사>와 <아수라>는 겉보기에는 실패지만 사후비평과 2차판권에서 성공했다. 


나아가 이 영화들은 당대를 상징하는 컬트적 인기를 도맡아 했으니, 단순히 성공과 실패라는 도식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가치를 만들어낸 것에 모든 의미를 부여해도 충분하다. 적절한 흥행작은 남지 못해도 컬트 인기작은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20년 전 1999년 개봉작 <태양은 없다>는 김성수 감독과 정우성 배우의 전작 <비트>에 이어 90년대를 대표하는 컬트작으로 남아 있다. 


가진 것도 미래도 없는 청춘들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자질을 가진 도철(정우성 분), 후배한테 지고선 권투를 그만둬버린다. 펀치 드렁크 증후군을 앓게 된 그는 돈이 성공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관장 소개로 흥신소에서 일하게 되고 또래 홍기(이정재 분)를 만난다. 돈이 성공의 전부라고 믿는 그는 6년 만 있으면 30억 짜리 빌딩을 살 거라고 떠벌리지만 현실은 도박을 일삼으며 동네깡패 병국 일당에게 쫓기는 신세일 뿐이다. 


한편 도철은 홍기가 매니저 일을 봐주고 있다는 내레이터 모델 배우 지망생 미미에게 끌린다. 그녀도 도철과 홍기와 마찬가지로 가진 것 없이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청춘이다. 홍기가 흥신소 돈을 빼돌리는 바람에 도철까지 함께 그만둔다. 되는 일 하나 없던 그들에게 우연치 않게 돈이 생기는데 홍기가 가지고 도망가 버린다. 도철은 그만두었지만 계속 마음이 가던 권투를 다시 시작한다. 


도철과 홍기와 미미는 따로 또 같이 분란을 일으키면서도 관심을 가지고 만나고 챙기고 각자의 꿈을 향한다. 하지만 홍기는 도박에서 계속되는 실패와 무시무시하게 조여오는 병국 일당의 압박에 못 이겨 또 다른 도둑질까지 한다.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홍기, 그의 태양은 떠오르지 않을 건가. 도철과 미미는 권투선수와 배우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계속 꾸며 거머쥘 수 있을 건가. 


영화를 넘어 문화로 자리잡다


영화 <태양은 없다>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청춘들의 되는 일 하나 없이 나날들을 담아냈다. 되는 일이 없더라도 착실하면 언젠가 자리를 잡을 수 있겠지만, 청춘에게 방황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듯 그들은 너나없이 비틀거리기만 할 뿐이다. 영화 자체가 상당히 두서 없는 줄거리를 자랑(?)하는데, 청춘의 방황을 표현하려는 의도라면 굉장하다 할 것이고 그저 각본의 한계라면 실망일 것이다. 


영화는 청춘을 방황과 함께 멋진 한때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정우성과 이정재라는 2020년대에도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지킬 것 같은 배우들의 20년 전 '리즈 시절'을 완벽히 보여주는데, 영화 안 캐릭터가 아닌 영화 밖 배우에 집중한 세련되고 화려한 구도와 영상을 선보인다. 이는 영화가 영화로 끝나지 않고 문화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물론, 영화를 문화가 아닌 예술의 한 영역으로 보기도 하기에 <태양은 없다>는 비판 당할 요소가 차고도 넘친다. 도식적이고 관습적이며 개연성을 찾아볼 수 없거니와 중심이 잡히지 않는 영화로서, 끝까지 '참고' 봐주기가 힘든 것이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하게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이정재의 홍기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웃음을 자아낼 만한 연기를 내보이는 주조연들이 볼썽사나울 뿐이다. 


이는 영화를 보는 시선의 호불호 문제가 아닌 영화를 대하는 방법론의 차이라는 게 위로라면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이 불과 몇 년만 늦게 나왔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안 봐도 뻔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김성수 감독의 시대 선구안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으니 20세기 마지막의 그때 그시절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한 것일 테다. 


IMF 시대의 청춘을 그린 컬트작


<태양은 없다>가 개봉한 건 1999년 1월이니 제작한 건 1998년일 테다. 당시 한국사회의 시대상을 간략히나마 조명해 보면 이 영화가 왜 그때 그시절에 가능했는지 영화 밖 또 다른 시선으로 유추해볼 수있다. 다름 아닌 1997년 11월의 IMF 외환위기이다.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한국 사회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청춘들의 방황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미래로 귀결된다. 


사회에 발을 디디고 합당한 미래를 꿈꾸어야 할 청춘들은 이미 방황을 끝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을 받아줄 준비는커녕 언제 끝날지 모를 오리무중 상황에 진입했고 청춘들은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양은 없다>가 보여주는 청춘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니라 유임되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이 하는 일련의 '나쁜 짓'들로 그들을 가해자 취급해선 안 되며 그들이야말로 피해자이기도 한 것이리라. 


이 영화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론으로 IMF 시대의 청춘이라는 도식을 대입해 보았는데, 영화에서 내보이는 현실과 그리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진 않다.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면 영화를 영화적으로만 봐야 한다는 건대, 그러기엔 영화 자체만으론 별로인 게 어리둥절한 것이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영화는 왜 이렇게 만든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90년대 한국사회 아닌 한국문화를 상징하고 대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표 컬트작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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