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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어른이 덜 된 인격체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 결과는? <폭스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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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폭스캐처>


영화 <폭스캐처>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1990년대 후반, 뉴욕 풍경을 흑백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 <뉴욕 크루즈>로 성공을 거두며 커리어를 시작한 베넷 밀러 감독, 2000년대 중반에 장편 영화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뉴욕 대학교 시절 학우였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함께 한 <카포티>였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 등으로 유명한 천재 작가 트루먼 카포티의 충격적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였다. 이 영화로 필립은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를 비롯 미국 전역의 주요 상을 석권한다. 최고의 조연 배우로 유명한 그이지만, 이 영화로 최고의 주연 배우가 되었다. 


6년 만에 베넷 밀러가 들고온 영화는 <머니볼>으로, 역시 실화가 바탕인데 미국 메이저리그 만년 꼴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 빈의 이야기를 전한다. 기존 선발 방식을 탈피하여 오로지 데이터로만 의존해 기적을 만들어낸 빌리 빈을 브래드 피트가 연기했다. <카포티>처럼 <머니볼>도 주연배우가 꽃을 피웠는데,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후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후보에 오르는 등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인정받았다. 


다시 3년 만에 <폭스캐처>로 역시 실화를 영화로 선보인 베넷 밀러, 이 작품 역시 출연 배우들에게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게 하였다. 앞선 두 작품이 한 명을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다르게 이 작품은 세 명을 전면에 내세웠는데, 스티브 카렐과 마크 러팔로와 채닝 테이텀이 그들이다. 앞의 두 명은 커리어에서 유일무이하게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후보에 올랐고 채닝 테이텀은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스타에서 명명백백 연기파 배우로 다시 포지셔닝할 수 있었다. 그러는가 하면, 베넷 밀러는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마크와 데이브, 그리고 듀폰


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마크 슐츠,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다음 올림픽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에겐 형 데이브 슐츠가 있는데, 그 또한 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로 영웅적 대접을 받고 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도 있다. 이에 반해 마크는 혼자서 변변치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훈련은 함께 하는 그들이지만, 마크에겐 미묘한 질투와 시기심과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다. 


어느 날 마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미국 최대 재벌 가문 중 하나인 듀폰 가문의 상속자 존 E. 듀폰이었다. 그는 마크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자신의 레슬링 훈련팀 '폭스캐처'로 합류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마크는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기 싫어 필라델피아로 향하지만, 마크의 제안을 데이브는 거절한다. 그렇게 마크로서는 믿기 힘든 대우를 받고 시작한 훈련, 덕분인지 1987년 세계 선수권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 존과 마크는 더욱 돈독해진다. 


존은 코카인 권유를 받아들이기도 한 마크, 이후 그는 술도 마시고 훈련도 게을리하는 등 이전에 없던 행동을 일삼는다. 존은 마크와 친해질대로 친해졌기에 이를 두고볼 뿐이었지만, 어느 날 엄마한테서 레슬링을 포함해 이것저것 한 소리를 듣고 나서 곧바로 마크를 찾아가 심한 말로 화를 내고는 데이브를 데려온다. 이미 틀어진 존과 마크, 데이브와 마크. 좋은 관계의 존과 데이브도 틀어질 것인가?


어른이 덜 된 인격체의 충격적 실화


영화 <폭스캐처>는 충격적 실화를 가져온 사례로, 으레 그렇듯 영화에선 충격 실화가 도구이자 수단으로 작용할 뿐 정작 중요한 건 과정에 있다. '존 E. 듀폰'이라고 검색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는 실화인 만큼 사건의 전말을 밝혀도 된다고 판단, 존이 데이브를 죽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의견이 분분할 만한 사항인데, 도대체 왜 존은 데이브를 죽였을까. 


우선 데이브와 마크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선 이곳저곳을 떠돌며 함께 컸기에, 그 우애의 모습이 여타 형제와는 달랐을 거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존은 군수산업으로 번영을 이룩한 지역의 대저택에서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 비추어볼 때 어릴 때부터 친구 하나 제대로 없었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상 그를 제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엄마가 그를 한 사람의 완성된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다. 


어른이자 성숙한 인격체가 되지 못한 존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마크와 데이브를 통해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전리품으로 엄마에게 인정을 받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며 한편 데이브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크의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존은 자신이 누군가의 멘토가 되고 싶어 했다. 


'욕구하는 자기의식'에서 '인정하는 자기의식'에로의 이행을 뜻하는 '인정투쟁'은 자기의식 발전과정에서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단계인데, 존은 여전히 욕구하는 자기의식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몸은 커서 어른이 되고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도 알지만, 유독 엄마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것이다. 


숙고하게 하는 영화의 힘


영화는 유명한 실화에 내제된 고난위의 심리철학 명제를 감독 특유의 절제·관조 스타일로 들여다보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존이 엄마 눈치를 보며 대표급 선수들 앞에서 잘 하지도 못하는 레슬링 기술을 선보일 때의 그 절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절함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야말로 기묘한 탄성과 함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숙고를 하게 하는 게 이 영화의 힘이다. 자신을 인정해줄 사람 한 명 없다는 외로움, 그럼에도 그 외로움을 견디고 다른 누군가를 인정해줄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어른, 세상의 쓴맛·단맛을 알게 되었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 어렸을 때고 다 자랐을 때고 아무도 알려주는 이 없었을 때의 어려움 등.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여, 영화의 세 주인공 중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인물은 존 E. 듀폰이다. 누구도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과 행동을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누구나 그였고 그일 수 있으며 그가 될 수 있다. 겉으론 한없이 정적인 인물인 그는, 속으론 한없이 들끓며 무언가가 계속 쌓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 끝엔 무엇이 남았을까. 무엇이 남았어야만 할까. 무엇이 남아 있길 바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