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8마일>
영화 <8마일> 포스터. ⓒUPI 코리아
미국의 래퍼로 힙합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인 '에미넴', 그의 이름 또는 그의 노래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빌보드 선정 2000년대 아이콘이기도 할 정도로 2000년대 초반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인기를 구사했고, 2010년대에도 여전히 활동하며 전설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그 누구보다 암울했다고 전해진다.
에미넴은 5살 때 디트로이트 슬럼가로 이주해 '백인 쓰레기' 계층으로 살았다고 한다. 흑인 빈민보다 아래에 위치한 도시 지역 백인 빈민. 생후 6개월 때부터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한부모 가정이었는데, 어머니조차 백인 마약중독자였다. 희망 없는 디트로이트 슬럼가의 유일한 성공 창구는 힙합이었는데, 그나마도 백인 아닌 흑인이 잡고 있었다. 백인 에미넴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에미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본격적인 래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언더에서의 고난 너머 고난, 현실과 꿈의 간극이 멀게만 느껴진다. 그때 그 시절이 어땠을지 대략이나마 상상이 가는데, 영화로 접할 수 있다. 에미넴의 언더그라운드 시절을 모티브로 한 <8마일>이다. 2002년작으로, <L.A. 컨피덴셜>로 유명한 커티스 핸슨 감독이 연출했다. 모든 힙합퍼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디트로이트 빈민가의 힙합 청년
디트로이트 빈민가의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엄마, 어린 여동생과 함께 사는 지미 스미스 주니어(에미넴 분), 'B. 래빗'으로 불리는 그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며 래퍼로 성공하려는 꿈을 꾸는 백인 청년이다. 절친 중 한 명인 퓨처의 설득으로 쉘터에서 펼쳐지는 랩배틀에 출전하지만 긴장한 것도 모자라 관객들의 일방적인 야유로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내려온다. 현실로 돌아간 그는 우연히 만난 알렉스에게 첫눈에 반한다.
래빗은 엄마에게 시달리며 여동생을 돌본다. 돈 벌어올 궁리는 하지 않고 빙고로 한 탕을 꿈꾸며 아들 래빗의 고등학교 동창이 보험금을 크게 탈 거라는 이유로 동거를 시작한 엄마다. 한편, 친구 윙크는 인맥을 이용해 래빗을 성공시켜줄 수 있다고 꼬득인다. 절친들은 윙크의 믿을 수 없는 헛소리에 속지 말라고 래빗에게 당부한다. 래빗은 꿈과 현실에서 방황한다.
계속해서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다. 공장, 집, 쉘터에서 가족, 절친, 알렉스 그리고 래퍼 갱 집단 프리월드 크루와 말이다. 즐겁고 설레고 열받고 암울한 일들이다. 하지만 래빗이 현실에 두 발 붙인 채 공장을 다니며 가장 역할을 하고 동시에 더욱더 뛰어난 실력을 선보여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래퍼로서의 끈을 놓지 않는 걸 저지할 수 없다.
유명한 대사와 주제곡
영화 <8마일>은 여러모로 유명하다. 에미넴이 단독 주연이다시피 한 점도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자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품은 대사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가 유명하다. 무엇보다 그가 직접 만들고 부른 주제곡 'Lose Yourself'는 힙합 장르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수상했고, 12주 동안 빌보드 1위를 기록했던 에미넴 최고의 흥행곡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수놓은 'Lose Yourself'의 인트로와 아웃트로는 곱씹을 만하다. 'Look, if you had on shot, one opportunity. To seize everything you ever wanted, in one moment. Would you capture it or just let it slip? yo,'(이봐, 네가 단 한 번, 단 한 번의 기회로 원했던 모든 걸 얻을 수 있게 된다면 그 기회를 잡겠어, 아니면 그냥 날려버리겠어?) 'You can do anything you set your mind to, man'(마음만 먹으면 너도 뭐든 할 수 있다고, 친구)
극중에서 많은 이들이 디트로이트를 떠나고 싶어 한다. 힙합을 하고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이들 모두가, 진정 힙합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성공하여 디트로이트를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그러고 있을 것일 테다. 힙합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성공의 수단이자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런 와중에 래빗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한다. 여기에서 '방황'이란, 진정 힙합을 좋아하는 래빗으로서는 수단이자 도구로 전락한 '힙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래빗에겐 기가 차는 가족과 집이라는 성공의 이유가 있지 않는가. 하여 <8마일>에서 현실과 꿈은 단순히 이룰 수 없는 높은 꿈을 꾸는 패배자 혹은 일반인의 그것이 아니다.
현실과 꿈
대다수의 사람들이 꿈은 꾸지만 도달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살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꿈은 높이 가져야 해' 혹은 '헛 꿈 꾸지 마'라고 극단적인 생각을 서슴없이 전한다. 둘다 꿈 또는 현실이 '네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의 대부분은 꿈과 현실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꿈은 꿈인 채로 준비를 계속하되 너무 높이 가지 않고 언제든 현실로 돌아가 삶을 지탱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8마일>이 전하는 바도 이와 다름없다. 래빗도 당연히 성공해서 디트로이트를 떠나고 싶지만, 엄마의 허무맹랑하고 이기적인 행각 즉 말도 안 되는 꿈을 좇긴 싫은 것이다. 그럴 수도 없고 말이다. 그는 단 한 번의 기회도 놓치지 않게 모든 게 완벽해질 때까지 실력을 갈고닦으며 준비하고 동시에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뒤돌아보지 않고 현실로 향한다. 그 단단한 모습이, 겉멋만 잔뜩 들어간 곳에서 일면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존경스러울 정도인 건 부인할 수 없다.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절대 실패자이자 패배자일 수 없다. 다만, 꿈을 꾸지만 기회가 왔을 때 놓친다면 실패자이자 패배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의 시선도 빗겨가고 비난도 담아두지 말고 자신만의 꿈을 꾸되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라. 누구나의 성공이 아닌 자신만의 성공을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투박하지만 진실 어린 조언이 몸소 담겨 있는 영화 <8마일>을 새삼 다시 다르게 본 이유다.
'오래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외와 차별의 사회문제, 화끈한 블랙코미디로 들여다보다 <개 같은 날의 오후> (0) | 2019.09.18 |
---|---|
벨기에의 아름다운 도시 브뤼주의 킬러들 <킬러들의 도시> (0) | 2019.09.14 |
택시기사 맥스와 청부살인업자 빈센트의 황량하고 건조한 동행 <콜래트럴> (0) | 2019.09.07 |
쿠엔틴 타란티노의 걸출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 (0) | 201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