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킬러들의 도시>(In Bruges)
영화 <킬러들의 도시> 포스터. ⓒ(주)시너지하우스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완고한 세계를 구축한 영화감독들이 있다. 일일이 열거하긴 힘들고, 다만 그런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서 자라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를 우린 잘 안다. 그 이름, 쿠엔틴 타란티노. 여기 제2의 쿠엔틴 타란티노라 부를 만한 이가 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영화광이었고 희곡작가를 거쳐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잘 모르겠지만, 사실 잘 안다. 작년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화려하게 수놓은 작품 <쓰리 빌보드> 말이다. 완벽에 가까운 블랙코미디로, 마틴 맥도나 감독 자신만의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구현·구사했다. 우린 그저 감탄하고 넋 놓은 채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이 비단 그뿐 아닐 것이다. 들여다보니, 장편영화로는 2편이 더 있고 자그마치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탄 데뷔 단편영화도 있다.
그중 장편영화 데뷔작 <킬러들의 도시>는 앞으로 마틴 맥도나 감독이 펼쳐 선보일 유일무이한 영화 세계의 시작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희곡계에서 유례없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고 영화계로 넘어와 만든 첫 장편영화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이보다 더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상황에서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기대에 부응했을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중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부응했다.
벨기에 브뤼주의 킬러들
아름다운 중세건물이 많은 관광도시 벨기에 브뤼주, 30대인 듯한 남자 한 명과 40대인 듯한 남자 한 명이 도착한다. 40대 남자 켄(브렌단 글리슨 분)은 도시를 즐기지만 30대 남자 레이(콜린 파렐 분)는 도시를 즐기지 못한다. 알고 보니 그들은 영국에서 대주교를 암살하고 도망친 청부살인집단의 킬러들이다. 보스 해리(랄프 파인즈 분)가 2주 동안 브뤼주에 있으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던 것이다.
켄은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해 느긋하게 관광을 계속하는 반면, 레이는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안절부절 못 하며 갈팡질팡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와중에 레이는 정체불명 비밀에 싸인 네덜란드 여인 클로이와 만남을 가진다. 알고 보니 레이는 대주교를 죽이는 과정에서 아이를 죽이는 실수 혹은 용서받지 못할 짓을 벌였다. 조직 내 철칙에서 아이 살인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레이 본인에게도 돌이킬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는 죄를 의미했다.
켄과 레이의 브뤼주 2주 관광은 해리가 내린 관대한 명령이었던 것이다. 켄에게 시켜 레이를 죽이기 전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브뤼주를 최대한 즐기게끔 계획을 짰던 바, 조직의 철칙 아닌 스스로의 신념으로 괴로워하는 레이가 도시를 즐길리는 만무하다. 레이, 켄, 해리에게 어떤 결말이 닥칠 것인가? 레이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고, 레이가 죽지 않으면 켄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또 해리에게 있다.
킬러들의 킬 이후의 이야기
종종 겪는 처참함인데,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킬러들의 도시'라니 제목에 낚인 관객들도 많았을 거라 짐작된다. 브뤼주가 '도시'라는 단어에 어울릴 것도 만무하지만, 마치 킬러들이 속속 모여들어 피 터지는 액션을 펼칠 것 같은 느낌을 풍겨야 하는 이유가 뭘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원제인 'In Bruges'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그 아름다움과 선명히 대비되는 킬러 둘의 처연한 상황.
더불어, 화끈한 한국어 제목 때문에 이 영화를 보다 더 지루하게 느끼고 액션이나 스릴러 면에서 뭔가 더 있을 것처럼 생각했을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유명한 한국어 제목의 영화가 생각난다. 우디 앨런의 'Vicky Cristina Barcelona'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둔갑한 사례이다. 전자는 범죄 드라마가 액션 스릴러로 둔갑했고, 후자는 낭만 로맨스가 더러운 불륜으로 둔갑했다.
각설하고, 영화는 엄연히 킬러들이 주인공이지만 킬러들은 냉혹하거나 비열하기는커녕 순수한듯 나사가 빠진 듯 휘청거리는 느낌이다. 으레 그렇듯 거시적으로 총격신다운 총격신도 나오지 않고 미시적으로 캐릭터들에 천착한다. 영화는 눈썹으로도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의 현재 심정과 점차 변해 가는 심정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포착한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착하다고. 이 영화가 바라보는 시선이 착하다고 말이다. 킬러들은 사람을 죽이는 간악하기 그지 없는 일을 하지만 그저 일로만 할 뿐 그 이면 또는 이상은 선하다는 것이다. 아니, 선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킬러들이 죽인 이야기가 아니라 죽이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산적한 죽음
영화엔 죽음이 산적해 있다. 킬러들이 주인공인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할 텐데, 배경이 브뤼주라는 점에서 당연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벨기에 브뤼주가 아닌 범죄 영화에서 주요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는 미국 LA였다면 별 반발심 없이 당연했을 테다. 브뤼주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이 암살집단의 살인을 끊어내는 장소로 제격인 듯하다. 영화는 종국엔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그런가 하면 브뤼주는 해리가 켄에게 명한 레이의 죽음 직전 평화로운 2주를 영위하기에도 제격인 장소이다. 죽음 자체는 평화로울지 모르나 죽음 직전이 평화로운 건 어불성설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죽음 직전의 평화라는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설명하기에 이 장소가 제격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달 순 없을 듯하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세 장편영화가 모두 '범죄, 코미디, 드라마' 장르인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시작인 <킬러들의 도시>도 정확히 그 장르에 속하며, 그 중심엔 '블랙코미디'가 자리하고 있다. 범죄에는 한 발 정도만 걸쳐 있고 사실은 다분히 인간에 천착한 드라마인 것이다. 인간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는 건 매우매우 어렵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를진대, 고루 공감을 얻으면서도 특별함을 선사해야 하니 말이다.
<킬러들의 도시>는 아름다운 중세풍 도시에 온 인간적인 킬러들을 내세워 보편과 특별을 두루 선사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그곳에 오게 된 경위와 그곳에서 겪는 소소한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희한하게 아니면 의도한 대로 영화를 보고 나니 벨기에 브뤼주를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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