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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소외와 차별의 사회문제, 화끈한 블랙코미디로 들여다보다 <개 같은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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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개 같은 날의 오후>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포스터. ⓒ순필름



4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의 어느 여름 날 5층 짜리 조그마한 아파트 단지, 전압을 이기지 못한 변압기가 터지니 주민들은 집안에서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땀을 식히고 있던 그들 앞으로 정희가 도망쳐 나오고 뒤이어 남편 성구가 쫓아오더니 때리며 끌고 가려 한다. 거친 그 모습을 보고 분노한 아파트 여자들이 모여 성구를 집단구타한다. 같이 나와 있던 남자들이 각자의 아내를 말리려 하지만, 이내 싸움에 휘말려 여자 대 남자의 싸움이 되고 만다. 


싸움이 한창일 때 경찰이 도착한다. 몇몇 남녀가 나 몰라라 도망간다. 남자들은 경찰 쪽으로 가서 사건 경위를 고하고 여자들 9명은 옥상으로 도망간다. 옥상에서 선탠 중이던 독신녀도 휘말려 10명이 된다. 그녀는 옥상에 올라온 9명의 여자들 중 한 명의 남편과 바람을 펴서 분쟁의 씨앗이 될 뻔하기도 한다. 성구는 의식불명에 처했다가 죽고 만다. 기동대장을 위시한 경찰들은 옥상으로 간 여자들을 살인범으로 취급하며 현행범 체포로 간주한다. 이에 여자들은 성구가 정희를 때린 것에 대한 정당방위임을 주장하며 옥상에서 농성하기 시작한다. 


이미 옥상에 올라와 있던 또 한 명의 여자, 아들에게 구박받던 할머니 한 분이 여자들이 도우려 했음에도 투신자살하고 만다. 여자들의 옥상 농성이 아닌 할머니의 투신자살이, '남편 구타에 응징한 여인들 경찰 진압에 투신으로 맞서'라는 식으로 방송을 크게 타면서 여성단체들이 지지하며 이른바 전국구 사건이 된다. 이 기가 막힌 대치 국면은 어떻게 진행될까? 그 끝은 어떨까?


사회문제 블랙코미디


1995년작 <개 같은 날의 오후>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산적한 사회문제들을 직설적으로 풍자적으로 풀어낸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작품의 연출과 공동각본을 맡은 이민용 감독은 청룡, 대종, 백상, 춘사 4개의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그야말로 당대를 휩쓸었던 것이다. 그 이유를 25여 년이 지난 이 작품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통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위에서 주지하지 않았지만, 40도 불볕더위 때문인지 당대 한국사회 혹은 한국사회 자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인지 폭력을 동반한 갈등 장면들이 나온다. 곧 영화의 주요 장소가 되는 아파트의 주민들로 수렴되는데, 마냥 더위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를 만한 푹푹 찌는 더위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 장면들은 뒤이어 펼쳐질 초유의 갈등과 대비된다. 앞엣것들은 차라리 낭만적인 것이다. 하물며 같은 아파트의 휴가 떠난 빈 집을 털러 왔다가 옥상 농성 때문에 출동한 경찰의 대치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된 빈집털이범들의 생각과 행동도 하찮을 정도이다. 모두 초유의 갈등이 보여주는 정당함과 당연함을 합당화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투신한 할머니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소외와 차별


영화는 보다시피 성 대결로 출발한다. 남편에게 핍박받는 여자를 구하고자 아파트 주민 여자들이 연대했고 의리를 지키고자 함께 농성하는 것이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노인으로서 핍박받은 것이니, 엄연히 농성하는 여자들과는 별개로 투신한 할머니의 사례조차 한통속으로 보일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투철하다. 동시에 영화는 이 지점부터 '소외'와 '차별' 문제도 논하기 시작한다. 


최초에 옥상에 올라간 여자들은 9명, 옥상에서 선탠을 즐기고 있던 여자 1명은 외도의 당사자이다. 이 문제를 두고 처음엔 외도가 주가 되었지만 뒤에선 독신녀로서 겪는 소외와 차별이 주가 된다. 혼자 사는 여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독신남에게로는 향하지 않을, 실제하는 소외와 차별이다. 


그러는가 하면, 그곳의 여자들보다 더 예쁘고 조신하고 착해 보이는 긴머리의 밤무대 가수 여자 1명이 있다. 기동대장에 의해 신분증 상 남자임이 밝혀져 옥상 위가 발칵 뒤집힌다. 왜 남자가 여기에 있냐,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냐, 밤무대 가수라더니 어쩐지 꺼림칙했다. 이 말에 호스티스 여자 2명이 발끈한다.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혼자 사는 소설가 지망생 여자 1명이 이 내분을 일거에 봉합할 한 마디를 던진다. "지금 우리는요. 남자냐 여자냐 그런 성 문제를 떠나서 외롭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리고 10명의 여자들은 한 층 더 높은 차원으로 진입한다. 성 대결이 아닌 소외와 차별에 대항하는 행동인 것이다.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잘 알 순 없지만 25여 년 전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만듦새 아닌 메시지를 두고 엄청난 논란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속 뉴스에서도 소개하지만, 당시는 기혼 여성의 61%가 남편한테 맞았던 경험이 있다고 할 만큼 남녀의 성차별이 당연한 걸로 생각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때 나온 전위적(혁신적, 급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작품이 어떤 몰매를 맞았을까. 틀린 걸 올바르고 당연하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틀린 게 틀린 거라고 말하는 건, 역으로 몰려 그냥 틀린 게 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오히려 그러하기에 성차별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며 페미니즘은 성차별을 넘어 성차별이라는 소외와 차별의 한 방면을 지지하는 사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성 대결 하에서의 페미니즘 관점으로만 보려 하지 말고 소외와 차별에 대항하는 이들의 생각과 사상과 행동이라는 관점으로도 봐야 한다. 영화는 영리하게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개 같은 날의 오후>를 그저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배우들이 출동해 은근 스펙터클하고 시원시원하고 재밌는 코미디 영화로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 또한 오랫동안 그러했다. 머리가 크고 무엇이 올바른지 최소한의 감각을 지녔다고 생각한 채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른 영화로 인식된다. 조금은 투박하고 직설적이긴 하지만, 굉장한 블랙코미디로 쉽게 찾기 힘들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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