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독자에게] 메도루마 슌 장편소설 <무지개 새>
메도루마 슌의 <무지개 새> 표지. ⓒ아시아
1995년 9월 4일, 오키나와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 해병대원 2명과 미 해군 1명이 12세 여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것. 미일지위협정으로 미군 셋의 신병은 인도되지 않는다. 오키나와 미병 소녀 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억눌려 있던 반미, 반기지 감정이 폭발한다.
이 사건으로 반미군기지 운동이 전개되어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설이 현실화되는 듯싶었는데, 미봉책으로 남부의 기지를 북부로 옮기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이 강행된다. 오키나와 북부 출신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메도루마 슌은 작가가 아니라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을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데, 1995년의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중차별의 정치적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1995년 전까지 메도루마는 일본과 오키나와에 대한 중단편소설을 주로 썼는데, 1995년 사건 이후로 미군기지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지개 새>는 이런 자장 하에서 쓴 메도루마의 첫 장편소설이다. 1998년부터 쓰기 시작해 2006년에 내놓았다. 이 사건은 내년이면 발발 25주년이 되지만, 그로 인해 촉발된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시아 출판사는 오키나와가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며 유명 관광지가 되어 가는 지금, 25년 전 충격적 사건을 다시 불러낸 소설 <무지개 새>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에 의한 절망을 오키나와 내외부로 수렴하는 현실을 그린 소설은 전체적으로 '끔찍'하다. 소설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쉽게 읽히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원한을 들어보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폭력과 미군으로 향하는 분노와 원한
소설의 주인공은 조직폭력배 일원 가쓰야와 그가 관리하는 성노예 미성년자 마유이다. 가쓰야는 마유같은 소녀를 이용해 성매매를 한 남자의 사진을 찍고 그걸 미끼로 돈을 뜯어내 보스 히가에게 상납한다. 어느 날 마유는 매춘 현장에서 자신의 성을 산 남자를 상대로 잔혹하고 엽기적 방식으로 성폭력을 가하곤 몸져 눕는다.
가쓰야는 마유를 버리고 새로운 성노예를 이용해 돈을 뜯어 상납해야 하지만, 마유를 보살피는 한편 엄마한테 돈을 빌려 상납한다. 하지만 마유가 회복해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는 한 히가에게 들키는 건 시간 문제, 가쓰야가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와중에 오키나와는 미군병사가 북부에서 벌인 소녀 성폭행 사건을 규탄하는 데모가 한창이다. 하지만 마유 같은 이를 구해내진 못한다.
소설은 폭력과 범죄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탈피하려면 절대적 피해자에 의한 파괴밖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즉, 다른 누구도 아닌 마유 본인에 의해서 말이다. 마유는 오키나와에 응집된 분노와 원한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듯한대, 그렇다면 가쓰야는 오키나와 자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노와 원한은 오키나와가 아닌 폭력이라는 추상과 미군이라는 구체로 향한다.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오키나와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추상과 구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파괴'와 '신생(新生)'을 제시한 이 소설, 다분히 현실적으로 오키나와의 진짜 현 상황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다(多) 층위가 존재하고 각각으로 수렴한다. 이 소설에서 층위라 하면 폭력의 층위를 들 수밖에 없는데, 학교폭력과 성매매 유착 폭력, 전쟁 폭력 등이 그것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 가쓰야는 성매매 유착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그 피해자인 마유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이 연계된 폭력은 정점에 서 있는 히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 모두도 미군과 일본이라는 공동정범 가해자에 의해 영원히 피해 받을 거대 피해자 집단의 오키나와 일원이다. 이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촘촘히 짜인 구조적 폭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견고하다. 저자가 말하는 파괴의 방식은 참으로 저열하고 또 절망적이지만 다른 방도는 없다.
메도루마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오키나와 미병 소녀 폭행 사건은, '1995년 오키나라'라고만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선 미선이 '사고'을 떠올리게 한다. 우발적 사고라는 이유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고발된 미군 책임자 여섯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신병이 인도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시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불거질 때면 자발적으로 참여해 비폭력평화시위를 시행했다. 14년 후 촛불집회는 우리나라를 바꿨다. 우리나라는 비폭력 구조로 이루어진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반면, <무지개 새>에서 비폭력시위나 데모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오키나와 폭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히가와 가쓰야 일당조차 인지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들은 미군과 일본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훨씬 더 추악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식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방법은, 사실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또 멋대로 이해해 버려도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을 고수하고 밀어부치는 이유는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폭력 근절과 평화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저자의 염원이 그만큼 지독한 저항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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