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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으로서 추구하는 평화' <총구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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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총구에 핀 꽃>


<총구에 핀 꽃> 표지. ⓒ아시아



'평화'의 시대다. 밑도 끝도 없이 에둘러서 이렇게 표현하는 건, 평화를 염원하고 있지만 평화가 도래하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불과 30여 년 전까지 전 세계가 둘로 나뉘어 수많은 비극을 탄생시켰던 것처럼 지금도 그리하고 있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사태는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평화'는 요원하다. 철학적인 의미로 한정했을 때 무력 항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한다면 인류 역사에서 이전에도 지금도 이후에도 평화는 절대적으로 요원하였고 요원하며 요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평화를 서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살고 왜 살겠는가. 영원히 끌어안을 수 없는 평화이지만 영원히 끌어안으려 발버둥칠 것이다.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소설이 나왔다. 1980년 데뷔 이래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문제를 치열하게 짚어온 이대환 소설가, 데뷔 40주년을 앞두고 실존인물 '김진수'를 모델로 한 장편소설 <총구에 핀 꽃>을 들고 왔다. 김진수는 한국전쟁 중 부모를 잃고 미군에 의해 입양되었다가 본인이 미군이 되어 베트남에 파병된다. 휴가를 맞이해 일본에 왔다가 탈영하여 주일쿠바대사관과 베헤이렌 활동가의 집에 머물다가 소련으로 간다. 다시 스웨덴으로 가서는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손진호로 실존인물 김진수를 형상화한다. 


'작가'로서 탐구하는 진실


소설은 액자소설 형식을 취한다. '나' 손기정이 아버지 손진호와 함께 한국과 일본을 여행하는 현재가 한 축을 이루고, '나' 손기정이 학위논문을 대체하고자 아버지 손진호의 파란만장 과거에 대해 쓴 소설이 한 축을 이룬다.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주로 접하고 또 방대하고 촘촘한 의미를 받아들여 축적하게 되는 건, 손기정이 손진호에 대해 쓴 소설일 것이다. 


<박태준 평전>을 집필한 적도 있는 작가는 왜 <김진수 평전>이 아닌 소설 <총구에 핀 꽃>을 내놓은 것일까. 작 중 손기정의 입을 통해 말했듯, '그 그릇이 최후로 담아내야 하는 실체는 어떤 사실들의 배후를 관장하는 진실과 그 진실의 핵을 이루는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진실을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손진호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삶의 궤적은 당연히 김진수와 거의 일치한다. 다만, 소설은 사유를 위해 서사를 창조했다. 손진호는 한국전쟁 중 부모를 잃고 떠돌다가 포항의 송정원으로 가 어린 시절을 보낸다. 미군에 입양되어 히피문화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던 손진호는, 미군에 입대하여 베트남으로 파병된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에서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이 떠올라 총을 들 수 없게된 손진호는 일본으로 휴가를 나와선 탈영한다. 이후 주일쿠바대사관과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활동가의 집에서 머물다가 그들의 도움으로 소련을 거쳐 스웨덴으로 간다. 백인 여자와 결혼한 뒤 낳은 아들이 장성해 한국으로 유학을 와 아버지의 일대기를 소설로 써서 학위를 받으려 한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 손진호를 초청해 함께 일본과 한국을 여행한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자료의 '사실'을 말하면, 아버지는 오류를 바로잡고자 '진실'을 말해준다. 


개인과 평화


작가는 2000년대 초반, 1960년대 베트남전 기간에 베헤이렌을 이끌었던 오다 마코토를 몇 차례 만나 '김진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15년여 동안 김진수를 소설에서도 살아가게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베트남전쟁을 반대하고, 미국, 일본도 소련, 북한도 선택하지 않은 채, 제3국 스웨덴으로 망명한 한국 출신 김진수의 삶이 50년을 훌쩍 지난 지금에도 소구점이 있을 거라 확신한 듯하다. 


자연스레 생각나는 건 최인훈의 <광장>이다. 한국전쟁 전 이명준은 광장은 없고 밀실만 남았지만 진정한 개인의 밀실은 존재하지 않는 남한과 그런 남한에 반(反)해 이상적인 광장을 꿈꾸며 향했지만 사회적 광장만 존재할 뿐 역시 진정한 개인의 밀실은 존재하지 않는 북한을 경험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참전하는데 포로로 잡히게 된다. 정전 후 제3국을 택해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투신자살한다. 


타락한 밀실(개인)과 타락한 광장(사회)에 모두 실망한 이명준이 택한 선택은 제3국도 아닌 무(無)였다. 반면, 손진호는 입양되어 겪는 자기정체성 확립 문제에서 국가와 개인(나)에 대해 깊게 고민하며 국가보다 개인에게 더 큰 가치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 즉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크게 작용하여 베트남전쟁을 벗어나 탈영을 결심, 결행한다. 


한편, 작중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건 다름 아닌 송정원이다. 손진호가 생각하는 어린 시절, 전쟁의 끔찍한 상처와 더불어 천국과도 같았던 송정원 생활이다. 부모의 부재가 촉발한 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라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지만, 작가가 창조한 여러 일화들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이 시대의 평화


국가와 대비되는 개인, 개인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 즉 '개인으로서 추구하는 평화'는 결코 50여 년 전 어느 일개 개인의 돌출되고 돌발적인 바람과 행동이 아니다. 평화가 최대 화두로 떠오른 지금, 가장 중점에 두고 생각해봐야 할 주제이다.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가. 물론, 그전에 평화란 게 무엇인지, '이 시대'의 평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아는 게 우선일 것이다. 


작중 '송정원'에서 한 측면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구에 핀 꽃>에서 거의 모든 인물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반면, 송정원을 이끄는 '흰 수염 푸른 눈 신부'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다. 이 신부야말로 소설의 사유와 서사 핵심을 이루는 인물인데 이름이 없다는 건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해설을 쓴 이경재 문학평론가는 '국가라는 상징계를 벗어난 절대적인 존재를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했다. 이어 '흰 수염 푸른 눈 신부'가 송정원 아이를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선 통곡하는 장면에선 '국가와 같은 공동체에 얽매인 도덕이 아니라 전인류적 차원의 윤리를 지향'한다고 보았다. 


작가는 소설을 빌려 이 시대의 평화란 국가 아닌 인류에 속한 개인으로서 영혼을 구원해주는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다 마코토가 이끌었던 베헤이렌 활동가가 생각하는 '작은 인간'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알갱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이 시대의 평화는 개인과 맞닿아 있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데모스 여행>이었다. 작중에서도 언급되는 '데모스'는 다수 또는 대중이지만 결국 작은 인간들이란 뜻으로 개인이 없으면 데모스도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손진호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작은 인간들의 여행으로 치환한 것이다. 즉, 본래 이 소설은 평화보다 개인을 중점에 두었다. 이후 최종 제목을 <총구에 핀 꽃>으로 결정한 바, 개인보다 평화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총구에 꽃을 꽂은 퍼포머스를 펼친 손진호 자신이 지극히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작은 인간'인 바, 개인이 곧 평화이고 평화가 곧 개인이라 하겠다. 


1961년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라고 외쳤다. 이를 빌어, "국민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라고 외칠 수 있을까? 아니, <총구에 핀 꽃>에서 개인은 국민을 뜻하지 않을 테다. 대입이 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의 슬로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여기에 맞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태의 반전이 주는 충격을 뒤로 하고 다시 이상적인 형태로 돌려놓으면 곧 <총구에 핀 꽃>의 주제가 될 듯하다. 평화, 자유, 지(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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