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큐레이터'S PICK] <논-픽션>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명망 있는 출판사의 잘 나가는 편집장 알랭은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급격히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종이책으로는 한계가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그는 회사 디지털콘텐츠팀에 젊은 마케터 로르를 데려온다. 그녀는 곧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여 모든 게 바뀔 것을 확신한다. 알랭은 로르와 불륜 중이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는 아름다운 중년의 스타 배우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준 드라마 ‘결탁’의 차기 시리즈에 계속 출연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다. 유명세와 돈이 뒤따를 것이 분명하지만, 감동도 없고 성취감도 없다. 그 캐릭터에 머무르고 안주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알랭의 출판사와 깊은 관계에 있는 소설가 레오나르는 자신의 사생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소설로 늘 구설수에 오른다. 그래서 유명해진 것도 있지만, 그는 모든 작가들의 창작물엔 다소간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또 주장한다. 셀레나와 레오나르는 꽤 오랜 시간 불륜 중이다.
레오나르의 아내 발레리는 진보 쪽 국회위원의 비서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정치가 주체가 되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레오나르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도 결국 돈을 벌기 위한 한 개인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실을 바꿀 수 없을 뿐더러,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를 포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말의 향연
말의 항연.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영화 <논-픽션>은 출판사 편집장 알랭, 디지털콘텐츠 마케터 로르, 스타 배우 셀레나, 소설가 레오나르, 국회위원 비서 발레리를 위시로 한 ‘말의 향연’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사무실, 거실, 카페, 음식점, 서점, 라디오 스튜디오, 별장, 야외 할 것 없이 수많은 장소에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종류 또한 토론, 문답, 추궁, 부탁 등 다양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관통하는 스토리라인을 한마디는커녕 한 줄이나 한 문장으로 규정하기 힘들다. 불가능에 가깝다.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오직 ‘말’로만 이끌어가는 영화인만큼, 주요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주장 그리고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맥락이 잡힐 것이다.
알랭과 셀레나 집에 초대된 이들의 대화에 실마리가 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는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고도로 약속된 대사일 것이다. 작가 한 명이 자신의 독자수보다 시시콜콜한 내용을 끼적이는 블로그 방문자수가 많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답한다. 누군가는 인터넷도 유료 콘텐츠는 존중받는다고 응수한다. 인터넷 덕분에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영화가 이후 선보일 말의 향연은 이 대화의 변주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말의 향연을 시전하는 당사자들의 고민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기도 할 테고, 그들의 암묵적인 관계가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기도 할 테다. 큰 맥락에서, 이 영화를 이끄는 건 ‘변화’와 ‘선택’이다.
변화와 선택
변화와 선택.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현대사회의 특징 중 단연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빠름’이 아닐까. 유행과 대세는 우리를 스쳐지나갈 뿐이고, 변화와 선택은 생각이라는 걸 동반하지 않고 빠르게 대처해야 할 사항들이다. 충분한 토론은커녕 정리된 생각을 발현하는 대화도 불가능하다. 자연스레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없다. 앞날의 불확실성을 담보로 어떤 선택도 도박이 될 수밖에 없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어떤 길을 옹호하는가.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오랜 세월 종이책에 의존해온 출판사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차피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팔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현실에 안주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여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고, 전자책으로 재편될 것을 예상하고 발 빠르게 갈아탈 준비를 하기도 한다.
한편, 보다 개인적인 변화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이들도 있다. 재미도 감동도 성취감도 없지만 보장된 안정과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한 불안 사이의 고민 말이다. 그래도 잘할 수 있는 걸 잘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하는 게 낫지 않을까. 불확실에 몸을 맡기는 건, 비록 그것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어렵다.
이는 알랭-로르, 셀레나-레오나르 불륜 커플의 양상과도 겹친다. 그들은 불륜이라는 불확실의 영역을 더 이상 넓히려 하지 않고, 그곳으로 깊이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불륜을 ‘변화’의 양상이자 변주라고 한다면, 이들 모두 종국엔 변화 아닌 현실에의 안주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의외이자 요주의 인물이 로르인데, 그녀는 현실에의 안주가 아닌 급진적 변화를 주장한다. 그런 그녀인데 현실에의 안주 양상을 보인다고? 그럴 수는 없다. 이 영화가 대단한 측면이 여기에서 보이는데, 알랭에게는 현실에의 안주이지만 로르한테는 극중 대사이기도 한 ‘아무것도 안 변하려면 모든 게 변해야 한다’는 개념의 양상인 것이다. 진보와 보수, 변화와 안주는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가 서로를 향한다.
현대인의 자세
현대인의 자세.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종이책과 전자책의 양상이라는, 영화 속 변화와 선택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를 현실로 가져와 들여다보자. 미래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현재 우리나라는 여전히 전자책보다 종이책 수요가 압도적이다. 전자책유통업체는 5곳에 불과하다. 콘텐츠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넷플릭스의 출현과 더불어, 전자책 시장에도 ‘구독경제’ 시스템이 불고 있기에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은 ‘공존’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논-픽션>은 현재의 이런 공존 상황을 말의 향연으로 공유하고 인물들의 관계로 보여준다. 제목으로도 암시하고 있는데, 프랑스어 원제인 ‘Double vies’는 이중생활‘이라는 뜻으로 양립과 공존과 경계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이는 곧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영어 원제이자 한국어 제목인 ‘Non-Fiction’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Nonfiction’에서 Non과 fiction 사이에 대시(-)를 넣어 구분을 지었다. 이 역시 허구(Fiction)와 허구 아닌 것(Non-Fiction)의 양립과 공존과 경계 등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얽히기 싫은 불확실한 미래 상황은 일단 그냥 두고 보자고 말한다. 알랭이 로르에게 말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겨울빛> 속 목사의 모습이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회에서 홀로 목회를 하는 목사야말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지금 이 시대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올리비에 아샤야스 감독은 텅 빈 교회의 목사 같은 자세를 취하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가 관찰한 결과 현대사회 현대인의 자세가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내 모습을 반추해본다. 어떠한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가? 100에 99는 ‘아직은...’ ‘두고 보자’ 하며 상황이 획기적으로 변할 때까지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세는 인간의 오래된 관습에서 비롯된다. 100에 99가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극중 대사이기도 한 ‘관습과 기준을 넘어선 인간의 재발견이 디지털의 과제다’라는 개념화가 뇌리에 꽂혔다. 디지털은 인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인간은 디지털 세상에서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대사는 다분히 디지털이 주체적이지만, 나는 다분히 인간이 주체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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