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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비장애인과 구별되는 별존재가 아닌 '약자'인 장애인 <나의 특별한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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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특별한 형제>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포스터. ⓒNEW 



어려서 당한 사고로 얼굴 아래로 전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 세하는 엄마를 잃고 아빠에게서 버려져 장애인보호시설 '책임의집'로 온다. 그곳에 엄마에게서 버려진 지적장애인 동구가 있었다. 그는 5살 정도의 지능을 지녔는데, 수영을 좋아하고 또 기똥차게 잘했다. 세하가 물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동구가 구해준 걸 계기로 그들은 특별한 '형제'가 된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20년 뒤 책임의집을 이끌던 박 신부가 돌아가시자 지원금이 끊겨 폐쇄될 위기에 처한다. 세하와 동구는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세하는 돈을 받고 자원봉사시간 인증을 해주는 자못 파렴치한 활동을 서슴지 않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우연한 기회에 구청 수영장에서 열린 사회인 수영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게된 동구, 세하는 이 기회를 발판삼아 상금과 더불어 후원금을 조달하고자 한다. 


평소 안면이 있던 구청 수영장 알바생 미현과 자원봉사, 코치경력 거래를 한다. 동구를 훈련시켜 주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자립의 조건을 충족시켜 나가던 그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구의 엄마 정순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구를 데려가겠다고 나선다. 당연히 세하는 버릴 땐 언제고 이제 나타나 데려가겠다는 것이냐고 맞선다. 다시 한 번 헤어질 위기에 처한 세하와 동구, 어떻게 될까?


괜찮은 관객 만족도와 전문가 평가


관객 만족도와 전문가 평가에서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한 장면. ⓒNEW 



영화 <어벤저스: 엔드 게임>이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흥행 신기록을 모조리 새로 작성하고 있던 최고조의 2주차에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가 용감하게 출격했다.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먼 저예산 코미디이기에 굉장히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보이는데, <어벤저스>로 쏠린 시선과 피로감 그리고 전혀 다른 장르의 신선함 등의 반사이익을 기대했을 것이다. 


결과는 성공, 아니 대성공. 이 영화와 비슷비슷한 사이즈와 이야깃거리를 장착한 영화들이 늘어서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돋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지금 이 영화는 <어벤저스>에 버금가는 관객 만족도와 나쁘지 않은 전문가 평가에 힘입어 작품 자체가 갖는 착하고 행복한 이미지가 좋게 부각됐다. 100만 명이 넘는 흥행을 이끌었고 지금도 쾌속 중이다. 


육상효 감독이 <방가? 방가!>를 통해 주었던 소외되고 약한 존재의 주체적 휴머니즘과 웃음이 다방면에서 발전되어 나타났다. 감독의 오래된 영화 철학과 그에 따른 고민이 집약적으로 나타나기도 한 바, 한국 코미디 영화 역사에 획을 그었다거나 계보를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정도라면 언제든 그의 영화를 찾을 관객은 많을 것이 분명하다. 


장애인의 독립화 주체화 구체화


영화는 장애인의 독립화 주체화 구체화를 꾀했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한 장면. ⓒNEW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와 큰 인기를 끈 한국영화들이 많다. 1000만 명을 넘긴 <7번방의 선물>이 대표적이고, 200만 명과 300만 명과 400만 명을 넘긴 <맨발의 기봉이> <그것만이 내 세상> <말아톤>도 생각난다. 설경구와 문소리의 신들린 연기를 볼 수 있었던 문제작 <오아시스>도 있다. 외국영화는 훨씬 오래된 대표작들이 있다. <레인맨> <여인의 향기> <포레스트 검프> <길버트 그레이프> <제8요일> <언터처블: 1%의 우정> 등 주로 90년대 선보였던 명작의 대명사들이다. 


주지한 한국영화들과 외국영화들의 차이점이 눈에 띌 것이다.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똑같을지 모르지만, 한국영화는 장애인을 대상화 객체화 수단화시키는 반면 외국영화는 장애인을 독립화 주체화 구체화시킨다. 그런 면에서 <나의 특별한 형제>는 한국 장애인 영화의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게 아니라, 주인공이 장애인일 뿐이다. 


영화는 장애인을 자기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로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들을 그저 지켜줘야 할 존재로 보이지 않게, 비장애인과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가 아니게, 연민 또는 웃음 또는 슬픔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한다. 육상효 감독의 조심스럽고 사려깊은 시선이 건강한 휴먼 코미디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세하와 동구뿐만 아니라 미현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비장애인이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단기알바생인 그녀는, 그들을 대상화시키지 않는다. 그들을 같은 세계에 사는 조금 다른 존재로 대한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나아가 영화는 그들 셋을 한데 모아 '약자'로 포진시킨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구별되는 별(別)존재가 아닌, 약자로 수렴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개념이겠지만,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그러지 않았다는 걸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족의 의미


비루한 청년세대와 가족의 의미도 현실적으로 그렸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한 장면. ⓒNEW 



영화는 지금 이곳의 이슈성 있는 현실을 옮겨 놓아 나름의 답을 내놓기도 한다. 주지했듯 세하와 동구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미현을 통해 비루한 청년세대의 각박해질 뿐인 현실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영화 중후반부 가장 중심되는 이야기인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동구를 버리고 갔던 엄마 정순이 20여 년만에 나타나 동구를 데리고 가려는 것. 


정순은 여전히 동구의 합법적 부모다. 동구와 함께 살 권리가 있다. 하지만 동구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살아왔다. 태반을 세하와 살아왔다. 물론, 동구는 움직일 수 없는 세하의 모든 것을 뒤바라지해왔다. 같이 사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한다. 누구와 사는 게 동구를 위한 길이고, 동구는 누구와 살길 원하는가. 


5살 지능을 가진 동구이지만 법적으론 성년이기에 선택은 오롯이 동구의 몫이지만, 적어도 영화는 정순 아닌 세하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은 하늘이 내린 천륜이 아닌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걸 말이다. 시대에 조응하면서도 시대에 편승하지 않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살피는 약자 세하와 동구 그리고 미현의 사례에 편승시키는 데 쓰였다. 영화의 영어 제목인 'INSEPARABLE BROS' 즉, '갈라놓을 수 없는 형제'를 보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특별한 형제>는 앞으로 한국영화에서 장애인을 다룰 때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는 동시에 고민할 게 늘 것이다. 흥행이 보장되다시피 했던 장애인 영화이지만, 예민하고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었으며, 이 영화 이후로는 거기에 더해 장르융합에 따른 작품성도 유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층 더 재미있고 의미있고 감동적이고 영리한 영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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