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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지구를 옮긴다는 상상력에 입힌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의 비주얼 <유랑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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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랑지구>


영화 <유랑지구> 포스터. ⓒ키다리이엔티



2075년 태양이 수명을 다해 폭발을 앞두고 있다. 지구뿐만 아니라 태양계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어, 지구연합정부는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일명 '유랑지구계획'으로 지구 표면에 만여 개의 행성추진기를 건설하여 지구를 옮기는 한편, 태양에서 멀어져 한파가 닥칠 것을 대비해 지하도시를 건설해 살아남은 35억여 명을 대피시켰다. 


우주비행사 류페이창은 지구를 인도하는 우주정거장에 파견되어 17년 후 지구로 귀환할 계획이었다. 17년이 지난 현재,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한편, 베이징 지하도시에 거주 중인 류페이창의 아들 류치는 춘절을 맞이해 할아버지 신분증을 위조하여 의붓여동생 한둬둬와 함께 지상으로 나온다. 하지만 면허 없이 로버를 몰다가 체포되고 뇌물로 아이들을 빼내려한 외할아버지 한쯔양도 체포된다. 


목성을 지나고 있던 지구, 목성의 강력한 인력으로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다. 상당수의 행성추진기가 정지되었고 목성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하루빨리 복구해야 했다. 지진으로 탈옥하는 한쯔양과 아이들, 로버를 몰고 가다가 구조부대에게 징발된다. 함께 행성추진기 복구 임무에 투입된 것.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지구 밖에서는 아버지가, 지구에서는 외할아버지와 아이들이 분투한다. 


가공할 흥행력


중국 영화 역대 2위의 흥행력을 선보였다. 영화 <유랑지구>의 한 장면. ⓒ키다리이엔티



영화 <유랑지구>는 중국 최초의 블록버스터급 SF 재난 영화로, 지난 춘절 시즌에 개봉하여 역대급 흥행 수익을 냈다. 중국 내에서만 7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내 <전랑 2>(8억 6천여 달러)에 이은 역대 2위에 랭크되었고, 북미에서도 개봉해 역시 <와호장룡>에 이은 역대 2위에 랭크되었다. <와호장룡>이 할리우드 제작인 걸 감안하면, 북미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낸 중국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이 영화의 기가 막힌 흥행력엔 여러 가지 요소가 함께 했다. <유랑지구>가 중국 현지 개봉한 날짜가 2019년 2월 5일, 그로부터 한 달여 전인 1월 3일 중국 우주개발 기구 국가항천국이 지난해 12월 8일 발사한 달 탐사선 '창어 4호'가 인류 최초로 달 뒤편에 착륙했다. 대국굴기에 이은 중국의 초국가적 프로젝트 '우주굴기'가 성공했다고 해도 무방한 결과물이었다. 


우주굴기의 분위기를 노린 것인지 춘절(2월 4일~10일) 연휴 특수를 노린 것인지 혹은 둘다 노린 것인지 영화는 기 막힌 타이밍에 개봉해 엄청난 수익을 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별 감흥은 없다. 21세기 들어 중국은 이미 북미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영화시장으로 부상했으니, 중국 내에서의 수익이야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북미 시장에서도 괜찮은 성적 아니 나름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고, 그 요소로 여타 중국 역대급 흥행작들만큼 '국뽕'이 꽉 들어차 있지 않다는 것과 그동안 중국영화에서 구경하기 힘들었던 CG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과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한 류츠신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 등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이라는 프레임을 은연중에 깔았다. 영화 <유랑지구>의 한 장면. ⓒ키다리이엔티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SF 재난 영화 문법이 20세기까지의 국가를 위해 한 몸 바치는 주의에서 21세기의 가족을 위해 한 몸 바치는 또는 살아남는 주의로 바뀌는 와중에, <유랑지구>도 그 문법을 충실히 따랐다. 중국을 위한 것도, 지구를 위한 것도, 태양계를 위한 것도 아닌 그 가장 궁극적인 저변에는 가족을 위한 행동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한다는 이 문법은 국뽕을 넘어선 '(민)족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를 예로 들자면, 이 영화에서 인류는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반면, <유랑지구>에서 인류는 지구를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계획을 세운다. 사고에 대처하는 발상 자체가 다른 것, 인류가 인류일 수 있는 건 지구에 살기 때문이라는 확고한 생각의 발현이다. 


여기에 중국과 중국인을 입히면, 그게 <유랑지구>의 저변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지구를 선도하고 견인하는 중국'이라는 개념. 중국의 빅 픽처와 다름 없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외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과 딸의 3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또한 빅 픽처의 일환으로, '대를 이어서 과업을 수행한다'는 중국적 개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만하게 대놓고 중국을 내세우지만 또 모르면 모르게 은연중에 깔려 있는 듯도 하기에, 그리 거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할리우드식 국뽕과 족뽕에 길들여졌지만 탈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안팎에서 일고 있는 와중에, 이 정도는 별 감흥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역효과의 효과'를 얻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력, 비주얼, 스토리


상상력과 비주얼은 합격, 스토리는 불합격. 영화 <유랑지구>의 한 장면. ⓒ키다리이엔티



모든 외부적 요소를 거둬내고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SF 재난 영화의 20세기 버전이다. 25년여 쯤 전 1990년대 중반 정도의 수준으로, 당연히 CG야 그때보단 훨씬 좋겠지만 스토리나 캐릭터는 그때보다도 못하다. 비록 원작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각색을 거쳤지만 그래도 원작의 설정 자체가 워낙 사람을 끌어당기는 흥미를 갖추고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원작의 출중한 상상력에 발맞출 수 있었던 건 CG, 즉 비주얼이었다. 영화 성격상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했던 비주얼 부분이, 가장 열심히 일했고 걸맞은 성과를 냈다고 본다. 제작비가 '불과' 5천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던 점을 미루어 보아도 충분히 선방하고도 남음의 모습을 띤다. 이제 스토리만 갖추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야말로 '이야기의 보고(寶庫)'가 아닌가. 그 수많은 진귀한 이야기들을 표나지 않게 끄집어만 내도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앞다투어 열광할 것을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은 중국이 예전의 중국 위상을 되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어서 방향이 일반적이지 않아 그렇지, 과거 5, 6세대 감독들의 영화는 그야말로 전 세계를 호령했다. 


중국영화의 다양성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영화의 천편일률적인 적당한 흥행요소 답습 체제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게 걱정이면서도 한편 앞날을 기대케 한다. 총체적으로 보니 세계 영화계가 과도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생각들이 안팎으로 투영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관객은 행복한 비명을 지를까 지루한 하품을 연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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