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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진실에 가까운 거울 <그때 그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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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그때 그사람들>


영화 <그때 그사람들> 포스터. ⓒMK픽처스



80년대부터 스탭으로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임상수 감독,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바람난 가족> <하녀> <돈의 맛> 등을 통해 풍자 가득한 한국형 블랙코미디의 한 장을 장식했다. 하지만 2016년부턴 영화계에서 잘 볼 수 없다. 


그중 4번째 작품 <그때 그사람들>은 큰 논란거리를 던진 한편, 임상수의 초기작 이후 마지막으로 잘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성도덕 비틀기를 정치 역사 실화로 가져가 '높으신 분들'의 건드리는데, 모자랄 것 없이 훌륭히 해냈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으로 쏴죽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박흥주 수행대령, 박선호 의전과장 등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픽션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또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재미요소이다.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그때 그 사건.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박정희, 그가 군사쿠데타 이후 18년째 권력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간단히' 진압해버린다. 시민들은 한껏 움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는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 대통령 각하와 김 중앙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과 양 비서실장이 자리를 함께 한다. 대통령 각하의 푸념에 양 실장은 비위를 맞추고 차 실장은 핏대를 세우며 김 부장은 조용히 있을 뿐이다. 이 자리의 주타겟은 김 부장, 이전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쓰는 그를 향해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이 강하게 할 것을 밀어붙인다. 


안 그래도 헬기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 각하의 옆자리에 앉지 못하고 술자리에서도 차 실장이 2인자 노릇을 해대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쌓인 게 아니다. 이내 그는 민 대령과 주 과장을 불러 거사를 명령한다. 자신이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을 쏘는 즉시 각각 경호실장과 경호팀을 제거하라고 말이다. 계획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된다. 그러곤 김 부장과 민 대령은 마침 저녁을 먹고 있었던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차를 타고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향한다. 김 부장은 왜 그랬을까.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하루를 다룬다. 그 사건을 전후로 한 준비(?) 과정과 처리(?) 과정 말이다. 하지만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면, 준비나 처리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실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김 부장은 아무런 준비 없이 당일 당시에 부하들에게 거사를 명령하고 부하들은 아무 생각없이 따를 뿐이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못될 시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모양새이다. 


김재규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 한몸 희생한 영웅적인 일이라든지 시민들에 의해 정당한 방법으로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든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권력을 찬탈하려다 실패한 것뿐이라든지 말이다. 이 영화는 당대를 비추되, 하루의 한 장소에 집약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조명함으로써 감독과 각본을 맡은 임상수만의 시선으로 보았다. 


임상수의 눈엔 그놈이 그놈이다. 민주주의를 '폭압적으로' 제압하자는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을 했다고 하지만 역시 '유화적으로' 제압해왔던 김 부장과 부하들이나, 이저저도 아닌 빈 껍데기 '술상무'일 뿐인 양 실장이나, 모두 그 자리에서 당대를 정확하게 그래서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보면, 여대생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잠드는 대통령 각하나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총에 맞아 손가락이 날라가자 화장실로 숨지 않나 비서실장이라는 작자는 총에 맞지도 않았는데 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질 않나. 김 부장은 준비도 하지 않고 거사를 치르곤, 처리하는 과정도 전혀 '프로'답지 못하다. 거사를 치르고 난 후부터 한순간도 빠짐없이 오판에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는 것이다. 답답할 노릇. 


진실에 가까운


영화는 진실에 가깝게 그때 그곳의 그사람들을 그린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결국, 그때 그사람들은 단 한 명도 '쓸모 있지' 않았다.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임상수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이보다 더 '비웃길 수 없을' 정도로 국가를 말 한 마디, 손짓과 턱짓 한 번에 좌지우지했던 그때 그사람들을 그리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과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도 생각할 정도이다. 


권력은 만들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고 겉으로나마 따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권위는 만들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지만 따르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때 그사람들의 권력이란 무소불위였을지 모르지만, 권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을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권력이 무엇이고 권위가 무엇인지. 또 권력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권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영화는 사실, 그다지 재밌진 않다. 인간군상을 그려내고자 다양한 캐릭터들의 디테일한 부분이 소소한 웃음을 주지만, 대체적으로 사건의 앞뒤 과정이 지루하긴 하다. 특히 후반부에서 시선이 급격히 분산되면서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한 초점도 흐려지고 자연스레 재미도 반감된다. 의미도 있고 논란도 많아 생각할 거리도 다양하지만, 영화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외국 영화들은 정치역사 실화를 가져와 다큐멘터리로도 영화로도 자못 훌륭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라는 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인데, 우리나라에선 많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하는 것일 테다. 관심 없는 대중이 먼저인지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창작자가 먼저인지, 그럼에도 언제나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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