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아는 여자>
영화 <아는 여자> 포스터. ⓒ시네마서비스
장진 감독, 자타공인 2000년대 한국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영화들을 각본, 감독, 제작하였다. 데뷔작은 아니지만, <간첩 리철진>으로 영화판에 이름을 날렸고, <킬러들의 수다>로 흥행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후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장진식' 코미디 영화로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연출보다 각본에서 더 두드러진 행보를 보였으니, 각본에만 참여한 <동감> <강철중: 공공의 적 1-1>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건 오히려 그런 영화들이 장진만의 연극 작가주의적 연출을 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영화계에 진출하기 전 연극판에서 거물급 영향력을 끼친 어린 천재였는데, 영화계로 진출하면서 연극적 요소를 가감없이 거의 그대로 가져왔었던 것이다.
2010년대 와서도 오래된 자기 복제의 철 지난 영화들을 연달아 내놓아 탄탄한 마니아층조차 떨어져 나가 영화계에서 연극계와 방송계로 자리를 옮겼거나 영역을 확대했거나 하였는데, 그야말로 '한때를 풍미한 완성형 천재'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2004년에 내놓은 영화 <아는 여자>는 한국 로맨스 영화 역사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장진 감독 영화 역사에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는데, 특이하게도 장진식 코미디가 가장 집약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와중에 코미디를 수단으로 로맨스를 비추는지, 로맨스를 빌미로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주려는지 줄타기를 한다.
이 얼마나 한심하지만 공감가는 친구인가
영화 <아는 여자>의 한 장면. ⓒ시네마서비스
오래전 한때 잘 나갔던 투수였지만 지금은 두산 베어스 2군에서 외야수로 뛰고 있는 동치성(정재영 분), 연인에게 갑작스레 이별 통보를 받는다. 같은날 3개월 시한부 판정까지 받아버린 그, 단골 바에 가서는 평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 석잔에 뻗어버린다. 바텐더로 일하는 한이연(이나영 분)은 그를 여관으로 옮겼다.
다음 날 어김없이 야구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사연이 들려오는데 지난 밤의 자기 이야기인 것 같다. 사연은 사랑고백으로 끝난다. 동치성은 한이연한테로 달려가 추궁한다. 다음 날 알게 된 사실은, 한이연이 동치성과 오래전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것이다.
한이연은 오래전 어릴 때 동치성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를 사랑해왔던 것, 그들은 사랑 아닌 호감의 감정으로 같이 영화도 보고 동치성이 생각 없이 도와준 도둑 때문에 한이연의 집으로 피신해 있기도 한다.
동치성은 3개월 후면 죽고 없기에 집을 담보로 1억 대출도 받고 도둑도 도와주고 야구 연습 때 공도 받지 않는다. 자기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다는 이름 모를 아는 여자도 만난다. 이 얼마나 한심하지만 충분한 공감이 가는 친구인가,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뜻대로 풀려지는가? 과연 동치성은 그의 '바람대로' 내년을 맞이 하지 못하고 3개월 후에 죽고 없어질 때까지 원 없는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
결이 다른 로맨스이자 결이 다른 코미디
극중 초반, 동치성은 말한다. "나는 오늘 남들에게 다 있는데 나는 갖지 못한 세 가지를 알았다. 나는 첫사랑이 없고, 나는 내년이 없고, 나는 주사가 없다." 그리고 극중 종반, 동치성은 말한다. "나는 오늘 남들에게 다 있는데 내게 없던 세 가지가 생겼다. 나는 내년이 생겼고, 나는 주사가 생겼고, 나는 첫사랑이 생겼다." 영화는 아이러니와 변화와 사랑을 말하고자 한다.
<아는 여자>는 결이 다른 로맨스 영화이자 결이 다른 코미디 영화이다. 코미디의 외형을 띄며 로맨스의 내면을 말하고자 하는데, '코미디'가 그 자체로 코미디로서의 형체를 잃지 않은 채 로맨스까지 잘 감싸주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다.
많은 진지한 장면들에 끊김의 동적 편집과 멈춤의 정적 편집을 적절히 배치시키는 장진식 연극적 연출로, 힘 안 들여 보이게 웃기는 상황 코미디가 핵심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코미디가 코미디로, 진지함으로, 드라마로, 로맨스로 다양하게 다층적이게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쉽게 편입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더할 나위 없는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하게 되며 영화 본연이자 핵심인 로맨스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가지 않게 되는데, 그 적절함들이 영화에 부담을 전혀 주지 않게 도와준다. 아주 편안하고 평온한 상태로, 동치성의 인생을 바꿔놓을 아이러니와 한이연의 일편단심 사랑의 이면과 동치성, 한이연의 풋풋하고 순수하기만 한 사랑의 모양들을 흘러보내듯 바라볼 수 있다.
평범한 사랑, 특별한 사랑
장진과 정재영, 영혼의 단짝이라 할 만한 이들. 정재영은 <아는 여자>뿐만 아니라 1990~2000년대 장진 감독이 관여한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했다. 다양하다면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삶에 기막힌 아이러니를 담은 비슷한 캐릭터로 분했다. 정재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가 정립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아는 여자>에서의 동치성은 그 모체이자 정점이다.
한편, 지금은 누구나 알 만한 배우들이 이 영화를 통해 대거 데뷔했다. 장영남 배우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류승룡과 이민정은 몇 마디 대사 있는 단역으로. 류승룡과 장영남은 이후 장진 사단의 일원이 되어 장진이 관여한 많은 작품에 특별출연, 단역, 조연, 주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 모로 볼 거리가 많은 이 영화, 흔치 않게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다 보고 난 후 지체없이 다시 보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 같고 보고 또 봐도 계속 보고 싶어질 것 같으며 항상 따뜻하고 포근하고 알알하게 마음을 감싸안아줄 것 같다.
영화는 사랑의 방정식과 그 해법이 아닌 '그저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한 사랑, 어떤 수식어도 붙일 필요가 없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 앞에는 '어떻게'나 '왜' 따위는 붙이지 않는다. 사랑 앞에는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다. 아주 평범한 사랑, 하지만 그건 가장 특별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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