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 표지 ⓒ열린책들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15년 전에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열렬히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도 주로 등하교(출퇴근)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책을 읽었더랬는데, 그 유명한 <장미의 이름> 서문을 읽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이후 본격적인 사건에 돌입했을 때는 그 어렵고 어려운 지식의 향연 속에서도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에코의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되는 서문은 충격적이었다.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이 서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점이다. 지금에야 이 서문이 가짜를 진짜처럼 쓴 '너스레' 떠는 기법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그의 소설에는 수많은 진짜 같은 가짜들이 있다. 중세를 기반으로 근현대까지 총망라 하는 각종 음모론이 넘쳐 난다. '소설'인 걸 알지만, '가짜'인 걸 알지만, '창조'인 걸 알지만, 그걸 머리로만 인지하게 될 뿐이다. 믿을 수 없게 장대하고 매혹적이지만 믿을 수 없는, 그렇지만 믿게 되는 이야기 끝에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바우돌리노>(열린책들)는 그 절정이다. 에코는 사실 아닌 것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1980년에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으로 데뷔해서 2015년 <제0호>(열린책들)를 마지막으로 내놓은 움베르토 에코, <제0호>는 그의 소설 중 가장 가볍다고 할 만하지만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고민했던 질문을 압축적으로 던진다.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
뉴스를 '창조'하는 언론의 작태
1992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신생 신문사. 실패한 글쟁이이자 대필 전문가 콜론나가 시메이 주필의 초청에 합류한다. 그는 겉으로는 시메이 다음 가는 데스크이지만, 실상 시메이의 이름으로 출간될 책의 대필 작가이다.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 <도마니>의 창간 준비 1년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마니>에 콜론나와 함께 합류한 기자들은 6명이다. 이런저런 언론사에서 이런저런 일을 도맡아 해왔던 이들로 창간 준비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 출자하는 발행인은 비메르카테라는 기업인이다. 호텔, 요양원, TV채널, 간행물 등을 소유했다. 그는 <도마니>를 통해 큰 신문을 이끄는 엘리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결국 그들의 성역에 들어가고자 한다.
시메이와 콜론나를 중심으로 <도마니> 창간 예비 판 '제0호'를 만들 준비에 들어간다. 편집 회의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들은 가관이다. 저널리즘의 본보기라고 하지만, 실상은 썩은 생선 냄새 나는 뉴스 짜깁기일 뿐이다. 황색언론의 표본,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는 선정적 기사들의 촘촘하고도 지능적인 나열.
시메이의 자칭 '멋진' 표현이 한마디로 규정한다. '우리는 뉴스를 만들어야 하고, 행간에서 뉴스가 튀어나오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뉴스가 나오는 게 아닌, 거기에 허구와 거짓을 곁들여 뉴스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기억해야 할 건 거의 없다
<제0호>는 움베르토 에코 소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감을 자랑(?)한다. 본인이 밝힌대로 그의 이전 소설들이 교향곡이라면 이 마지막 소설은 재즈에 가까운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닌 소설이 읽히는 거라고 할까. 또한 그의 이전 소설들이 가히 찬란하게 어려운 문체를 내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건조한 현대 저널리스트의 그것을 내보인다.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진짜 이유는 소설의 주제, 그리고 에코가 평생 천착한 주제와 맞닿아 있다. '제0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창조해낸 뉴스들에 많은 공력을 쏟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내용을 기억할 필요도 없고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에서 기억해야 할 건 거의 없다.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기억하지 말아야 할 만큼 딱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거짓을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 본 체하고 지나가며 자세히는커녕 겉핥기 식으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터무니 없는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면 끝나는 것이다. 에코는 천하무적 혈혈단신으로 그 음모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본인 그 누구보다 수많은 음모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꿰고는, 다각도로 직접 음모론를 가지치고 또 직접 가지를 잘라낸다. 그 과정을 여과없이 소설에 녹여내어 대중들로 하여금 속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에코는 평생 고민하고 천착하고 행동에 옮겨왔다. <제0호>는 가장 무게를 덜 잡으며 가장 지식을 덜 드러내면서도 그의 연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냈다.
언론은, 의무를 다할 때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언론은 그 강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힘을 좋은 쪽으로 써서 정의를 실현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고, 좋지 않은 쪽으로 써서 권력의 도구 또는 그 자체로 권력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완벽한 빛의 수호자, 완벽한 어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지난 2015년 개봉해 엄청난 호평 속 흥행을 선보였던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이강희 주필이 참으로 '주옥 같은' 대사를 읊었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뭐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쓰고 계십니까? 그들은 술자리, 인터넷에서 씹어댈 안줏거리가 필요한 겁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싶은 이에게 고민거리를, 울고 싶은 이에게 울거리를, 욕하고 싶어하는 이에게 욕할 거리를 주면 됩니다."
<제0호>에서는 제0호 시메이 주필이 비슷한 대사를 읊는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모아서, 전할 만한 사람에게 전해 주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어 보여서요." "뉴스들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뉴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뉴스거리가 없는 사건에서, 또는 사람들이 뉴스의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건에서 뉴스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언론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다만,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를 다할 때만이다. 권력의 압력으로부터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만이다. 언론이 그 자체로 권력이 될 때나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을 때도 언론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언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기에 반드시 스스로 내외부의 자정 작용으로 바꿔야만 한다.
제0호 -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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