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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아내가 "고마워!"를 연발한 책 <썅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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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표지. ⓒ위즈덤하우스



아내가 고맙다고 말할 때가 있다. '결혼해줘서' 고맙고, 돈 벌어 오느라고 '고생해줘서' 고맙고, 집안일을 '도와줘서' 고맙고... 그럴 때마다 어깨가 으쓱하지만 한편으로 쓰윽 내려가는 무언가가 있다. 사실 난 잘 난 게 없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 나보단 아내가 훨씬 능력이 뛰어난대... 하는 자격지심 비슷한 것들. 


아내가 요즘 가장 고마워할 때가 있다. 그런 내 생각을 전할 때,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난 '한국의 전형적인 남자'처럼 자존심 쎄고 능력 있어 보이려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굉장히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기 때문인데, 가끔 그런 모습이 요즘의 남자와 여자 또는 여자와 남자 사이의 조류와 맞게 보이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런 나조차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 아주 많다. 아무리 애를 쓰고 기를 써도 각인되어 낙인이 찍인 것들은 지워지지도 가려지지도 않는다. 진정한 남녀평등은 내 가슴속에서 평생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고맙다고 한다. 그럴 땐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씁쓸해진다. 


<썅년의 미학>(위즈덤하우스)이라는 책을 읽었다. 순식간에 두 번. 첫번째는 별 생각 없이 읽다가 '남자로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뿌려지는 때가 많았고, 두번째는 정독을 하면서 '인간으로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아니, 정확히는 공감을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솔직히 쉽지 않았지만 정말 많이 '배웠다'.


이 책을 소개시켜준 이가 다름 아닌 아내인데, 내가 책을 집어들 때마다 책을 볼 때마다 이례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책을 다 보고 나서는 물론, 중간까지 보고 책을 잠시 덮어놓을 때도 다가와 물었다. "어때? 어떤 생각이 들어?" 그러고는 또 고맙다고 한다. "오빠가 이 책을 관심 갖고 봐주시까 너무 좋다. 정말 고마워!"


책을 두 번 정도 보니까 알겠다. 아내가 고맙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 책은 분명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을 향한 책이고 나아가 자세히는 자신을 위해 욕망하는 여성들을 응원하는 책이다. 거기에 남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남자가 어딜? 껴들 자리를 보고 껴들어'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움츠러 들었다. 여성들에게 미안해서? 남성인 내가 쪽팔리고 창피해서? 그것보다 '두려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과연 괜찮은 남자, 좋은 남자, 멋진 남자, 최고의 남자일까, 하는. 이제까지 '~~ 남자'가 아닌 남자 자체가 훌륭한 수식어가 되는 세상에서 살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남자로서 이 책에서 가장 크게 와닿은 부분은, '우리는 괜찮은 남자를 원해' 칼럼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싫다. 못생긴 남자가 싫다. 꾸미지 않는 남자가 싫다. 자기 관리를 안 하는 남자가 싫다. 술이라고는 싸구려 국산 병맥주와 소주밖에 모르는 남자가 싫다. 인생에서 해본 최고의 모험이나 경험이 주체적이지 못한 남자가 싫다. 여행을 가보지 않은 남자가 싫다. 책을 안 읽고 영화를 안 보고, 콘텐츠를 즐길 줄 모르는 남자가 싫다. 경험에 쓰는 돈을 아까워하는 남자가 싫다. 자기 취향이 뭔지 모르는 남자가 싫다. 남의 취향을 존중할 줄 모르는 남자가 싫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인지 못하는 남자가 싫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도 사과하지 않는 남자가 싫다. 1년 후에 뭐하고 있을지, 5년 후에 뭐하고 있을지 물어봤을 때 아무 대답도 못하는 남자가 싫다. 대충대충 사는 남자가 싫다. 미래가 없는 남자가 싫다. 싫다. 싫다."(59~60쪽 중에서)


나는 이중 90% 이상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며 나는 이중 50%, 아니 30% 이상만 해당되는 남자들을 싫어한다. '남자가 되서 뭐하는 거냐. 찌질하게.'라면서.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배운' 것에 따르면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공부하고 드러내려 하는 제대로 된 인간상의 하나가 아닌가. 


나는 한편 소심과 낮은 자존감을 방패 삼아 욕망을 배제시켜, 남자로서 목소리를 드높이지는 않지만 여성한테도(대부분 아내한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려고 한 게 아닌지. 그래서 여성들한테는 얼핏 '괜찮은' 남자로 비춰질 테지만, 스스로는 평범하지 않은 경계 위에서 헤매고 있는 게 아닌지. 그곳에서 대놓고 아닌 은근하게 여전히 남자만 갖고 있는 유리한 점들을 행사하고 있는 게 아닌지. 


사실 <썅년의 미학>을 본 지는 꽤 되었다. 몇 개월 되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떻게 생각을 전달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정확히는, '남자로서' 이 책을 평할 수 있을까, 나 같은 남자 즉 여성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남자로서 이 책을 평할 수 있을까. '나 같은' 남자로서 또 한 번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우리에게 페미니즘에, 여성에게 공감은 필요 없다. 어차피 사람은 타인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몰라도 괜찮다. 손잡아주지 않아도 되고, 눈물을 닦아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 정말 정말, 그래도 돕고 싶다면, 좀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의 입을 막지 말고, 여성의 앞길을 막지 말고, 여성의 인생을 막지 마라. 돕겠답시고 나대지 마라. 지금 당장 보이는 아군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223쪽 중에서)


여러 가지가 느껴진다. '나는' 이 책으로 배우고 공감하려 애쓰고 나아가서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을 하는데 반해, '그들'은 모든 걸 다 걸었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역시 내가 낄 때가 아니구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 또, 확실히 내가 아내로 치환되는 여성의 입과 앞길과 인생을 막고 있다는 생각... 


아직 난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과연 진심으로 준비를 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많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반드시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헤게모니를 최소한 완전히 잃을리는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는, 나 같은 남자는, 알 수 없고 알기 힘들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남자는, 다시 나는, 쪽팔리고 창피하고 싶지 않다. 여성을 위하는 척만 하기 싫고, 남자의 권위가 내세워지게끔 방치하는 것도 싫다. 참기 힘들다. 


나름대로 방도를 찾아보려 한다. 아니, 찾아보자. 돕겠다고 나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보이는 아군이 되지도 못할 테지만, 나만의 방법을 계속 찾아보겠다고.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인지 상하좌우를 계속 살펴보겠다고. 


썅년의 미학 - 10점
민서영 지음/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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