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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슬픔'에 해당되는 글 18건

제목 날짜
  • 홀로 이편에서 슬픔의 나락과 절망의 어둠을 응시하다 <그녀의 조각들> 2021.01.18
  • 드러나지 않지만 진정한 유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자기 앞의 생> 2020.11.30
  • 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일상이란 <한강에게> 2019.04.19
  • 부정할 수 없는 괴물, 무엇이 그 괴물을 만들었나 <몬스터> 2018.11.30
  •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 하지만 끔찍한 현실 <툴리> 2018.11.23
  • 아이들을 통해 아이들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2018.11.16
  • 자식 잃은 부부가 살아가려 한다 <래빗 홀> 2018.03.02
  •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나이, 29살의 이야기 <나의 서른에게> 2017.12.15
  • 아픔과 슬픔의 설원...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 <윈드 리버> 2017.10.05
  • 잔잔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웰메이드 성장 드라마 <몬스터 콜> 2017.09.22

홀로 이편에서 슬픔의 나락과 절망의 어둠을 응시하다 <그녀의 조각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1. 1. 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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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그녀의 조각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녀의 조각들> 포스터. ⓒ넷플릭스



출산이 임박한 부부 마사와 숀, 병원을 찾지 않고 집에서 조산사와 함께 아기를 낳기로 한다. 마사는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다리를 만드는 현장에서 일하는 숀은 아기를 볼 설렘에 들떠 있다. 마사의 엄마는 선물로 부부에게 근사한 한 대를 사 줬다. 숀의 말에 가시가 돋힌 걸로 보아 평소에 그리 사이가 좋진 않아 보이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게 잘 봉합될 터였다. 


마사와 숀이 함께 있던 저녁, 양수가 터지고 마사로선 믿을 수 없게 아픈 시간이 시작된다. 조산사 바버라한테 연락하지만, 그녀는 다른 산모의 아기를 받는 중이라 올 수 없다. 하여 다른 조산사 에바가 온다. 부부를 진정시키고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초음파를 한다. 정상이다. 이후, 출산이 처음인 부부로선 어리둥절하고 끔찍하게 아프지만 지극히 정상적이고 순조로운 출산 과정이 지나간다. 그런데, 아기 자세가 좋지 않은 듯 심박수가 희미해졌다. 아기를 빨리 꺼내야 한다. 에바는 숀에게 구급차를 부르게 하고, 마사에겐 죽을 힘을 쥐어짜라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태어난 아기, 이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곧 몸의 색깔이 변하더니 숨을 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마사는 회사로 돌아가고 숀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아기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못한 것 같다. 부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남편 숀 쪽에서 서서히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마사의 엄마가 격한 반응을 보인다. 유능한 변호사로 있는 친척과 함께 조산사 에바를 고발한 것이다. 세상에 오자마자 떠난 아기를 위해 예쁜 관으로 묘지도 잘 만들어 줄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마사의 아픔과 슬픔은 아무도 헤아리려고 하지 않는다. 아기도 마찬가지다. 아기의 넋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아기의 죽음의 원인을 찾으려 할 뿐이다. 급기야 마사는 아기의 시신을 기증하려 하는데...


비극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면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잃은 한 여자의 위로받지도 공감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한 파괴적 일상을 보여 준다. 그건 그 사건 또는 사고를 둘러싼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과 살아온 환경이 제각각이기 때문일 텐데, 그래서 일면 비극을 대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가 풍부하고 다층다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헝가리 출신이자 배우 출신이기도 한 코르넬 문드럭초의 첫 영어 장편 연출작이기도 한데, 지난 20여 년간 만들었던 작품들 대다수가 전 세계 유수 영화제들에 출품되면서 이른바 헝가리를 대표하는 젊은 감독 중 하나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칸 영화제 단골손님인 바, 2010년대 들어 급속도로 성장 중인 헝가리 영화를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정점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 <그녀의 조각들>이다. 


영화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아내 마사, 남편 숀, 마사의 엄마다. 최근 들어 <미션 임파서블> <분노의 질주> 등 역사 있는 액션 블록버스터 시리즈에 출연하며 이름을 날린 바네사 커비가 마사로 분해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할리우드 최악의 악동 샤이아 라보프가 숀으로 분해 좋은 연기를 펼쳤지만 성폭력 피소로 모든 홍보 활동에서 제외되었으며, 올해 90세로 지난 수십 년간 연극, 티브이, 영화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골든글로브와 미국·영국 아카데미와 에미상과 토니상까지 휩쓴 '전설' 엘런 버스틴이 마사의 엄마로 분해 중심을 잡았다.


그녀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돌보는 법


영화는 초반 분만 장면의 30여 분을 끊김없는 롱테이크로 채우며 강렬하게 시작한다. '롱테이크'라는 기술적인 찬사를 보내기에 앞서, 영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큰 비중에 걸맞게 구성한 면모와 배우들의 연기가 특히 돋보였던 바에 박수를 보낸다. '뭔가'에 대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혹은 감성적으로 바라보는데, 통념상 이성적인 게 올바른 것이고 감성적인 게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유명을 달리한 이 사건 또는 사고에, 숀과 마사의 엄마는 이성적으로 다가가 원인을 찾으려 했고 마사는 감성적으로 다가가 결과를 끌어안으려 했다. 


숀과 마사의 엄마는 조산사의 패착을 이유로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려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고, 마사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아이의 넋을 위로하고 또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려 하는 것이다. 방법론의 차이, 누가 맞고 누가 틀린다고 하기 힘들지만 숀과 마사 엄마의 방법에는 주체에 마사와 아이가 있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픔과 슬픔에 맞딱뜨린 사람을 향한, 마땅한 감성적 위로와 어루만짐과 돌봄이 수반되지 않는 것이다. 그녀로선 죽은 아이를 생각하고 한없이 슬퍼하며 아파하고 싶은데,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이성의 끈을 소송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택한 방법은, 사과의 씨앗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돌보는 방법, 먹다가 걸린 사과의 씨앗들을 발아시키며 조용히 응원하고 지켜보고 보살피는 것이다. '식물을 보듯 나를 돌본다'고 할 수 있을까, 에세이 <식물을 보듯 나를 돌본다>(유노북스)가 말하길 식물에게서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녀가 홀로 이편에서 슬픔의 나락과 절망의 어둠을 응시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사과가 그녀를 구했다. 제목에서 '조각들'은 슬픔, 아픔, 절망의 부정적인 조각들과 '희망'이라는 조각도 있지 않을까. 아니,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네사 커비의 진정성 어린 연기


초반 30여 분의 롱테이크와 더불어 이 영화의 또 하나의 백미는 마지막 부분의 선고 공판 장면이다. 조산사 에바를 기소한 주 정부 측의 지방검사가 첫 번째 증인으로 마사를 불러 앞으로 나선 마사, 지방검사의 심문은 에바에게 불리하게 흐르지만 에바 쪽 변호사의 심문에서 마사는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직접 모두의 앞에서 발언을 시작한다. 


사건의 원인을 찾아 돈을 보상받고 평결하는 것 따위로, 세상을 떠난 아이가 돌아오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아이는 그런 목적으로 이 세상에 왔다간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순간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라는, 말로 하지 않은 마음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지방검사와 변호사의 심문과 철저히 대조되는 마사의 차분한 와중에 천천히 끌어올려지는 감정의 변곡점이 보일 듯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을 듯 세세하고 또 명확하게 보이는 듯하다. 마사 역으로 분한 바네사 커비의 진정성 어린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세련한 듯 나른하게, 나른한 듯 선명하게, 선명한 듯 흐릿하게 흐르는 이야기는 한 달 단위로 끊어지는 챕터로 인해 자연스레 이어지지만은 않는 감정의 선 때문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겠다. 초반 30여 분 이후에는 몰입할 만하면 끊어져 다른 이야기의 선으로 이어진다. 그 툭툭 끊기는 선을 그나마 보기 좋게 이어 주는 게 바로 영화 초반과 종반을 꽉 차게 이끈 바네사 커비의 연기다. <그녀의 조각들>은 바네사 커비의 배우 인생에서 큰 분기점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그녀, 바네사 커비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모아 우리에게 보여 줄 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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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조각들, 돌봄, 바네사 커비, 비극, 사과, 소송, 슬픔, 아픔,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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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지만 진정한 유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자기 앞의 생>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1. 3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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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자기 앞의 생>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자기 앞의 생> 포스터. ⓒ넷플릭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제목의 소설, 관련하여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변호사 연수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대위로 참전했으며, 외교관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많은 소설을 남겨 42살 때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해 스타로 떠오른 '로맹 가리'. 20여 년이 지나며 비평가들은 그를 두고 한 물 갔다고 했는데, 그는 다양한 필명으로 활동하며 압박을 피하려 했다. 그러던 61살이 되던 1975년에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이 공쿠르상을 수상한 것이다. 


에밀 아자르 즉, 로맹 가리는 수상을 거부했지만 공쿠르 아카데미 측에서 밀어붙였다. 공쿠르상은 같은 작가가 두 번 이상 수상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당시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문학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로맹 가리는 오촌 조카에게 에밀 아자르를 연기하게 했다. 이후 에밀 아자르는 프랑스 문학계에 엄청난 찬양을 받았고,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 표절 시비까지 나며 혹평을 면치 못했다. 1980년, 그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유서를 남겼는데, 거기에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여, 올해는 로맹 가리 40주기이자 소설 <자기 앞의 생> 45주년이 되는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배경은 프랑스가 아닌 현대의 이탈리아로 말이다. 이탈리아와 유럽은 물론 헐리우드를 포함한 전 세계 영화계 최고의 레전드인 소피아 로렌이 오랜만에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최신작이 아들 에도아르도 폰티 감독의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 역시 그가 연출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진정 눈여겨 봐야 할 이가 있었으니 소피아 로렌의 로자 역과 더불어 주인공 모모 역을 맡은 이브라히마 게예다. 


슬픔과 아픔을 지닌 이들의 만남


고아 소년 모모, 사회 복지사의 부탁으로 코엔 박사가 후견인으로 있다. 소매치기가 특기이자 취미인 듯한 그를 코엔은 더 이상 맡기가 힘들다. 코엔은 모모가 훔쳐 온 값 비싼 촛대의 주인, 로사를 찾아가 사과하면서 모모를 맡아 달라고 간청한다. 입양할 가정을 찾을 때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칼에 거절한다. 나이도 많이 든 그녀는 안 그래도 매춘부 아이들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모모도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약을 취급하는 동네 아저씨가 모모에게 접근한다. 코엔 박사네에서 나와 로사 아줌마네로 오면 일을 줄 수 있다고 말이다. 모모로선 돈이 필요해 평소에 안면을 트고 지냈는데 잘됐다 싶었다. 자존심을 굽히고 로사네 집으로 향하는 모모, 동시에 뒤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로선 로사네 집에서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었다. 로사는 물론이고 로사가 맡은 아이들과도 잘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로사가 비를 맞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녀는 슬픔 이상의 공허를 지닌 채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모모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자 온몸으로 웃기려 했고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이후 모모는 조금씩 마음의 덧창을 열기 시작한다. 로사가 소개시켜 준 잡화점에서 주인장 하밀 씨를 도와 간간이 일도 하고 로사가 맡은 아이들과도 잘 지내 보려 한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또다시 로사의 이상 현상을 목격하는데 그녀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걸 눈치 채고 그녀를 감싸 주는 모모다. 


특별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영화 <자기 앞의 생>은 소설 원작과 상당히 다른 결을 가진다. 누군가는 다른 결이라고 할 테고, 누군가는 영화를 잘 만들지 못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모모라는 캐릭터의 복잡다단하고 입체적인 면모를 한껏 살려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주로 로사와의 관계에서인데, 둘의 관계가 보여 주는 롤러코스터 감정이 특히 그랬다. 반면 영화는 모모의 캐릭터 자체도 그렇고 로사와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뭔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감독의 '잘못'이 크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전적으로 로사 역의 소피아 로렌과 모모 역의 이브라히마 게예다. 영화가 그리 잘 나오진 못했기에 오히려 두 주인공의 연기가 돋보이는 게 아닌가 싶지만, 연기만 따로 떼어 놓고 봐도 손색이 없다. 칸, 베니스, 베를린, 미국·영국 아카데미, 골든 글러브 등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받은 전설적 배우 소피아 로렌은 그렇다고 쳐도 듣도 보도 못한 이브라히마 게예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수훈이다. 


소피아 로렌이라는 대배우와 밀착해 연기를 펼치는 데 위축되거나 어색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80대 중반으로 50년대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해 60년대 전성기를 보낸 '옛날 사람'이기에 오히려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어설프게 유명하거나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배우였다면 완전히 다른 케미와 퍼포먼스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말 못할 아픔을 아주 깊숙이 간직한 채 천천히 아파 가는 로사, 모모 역시 어리디 어린 나이지만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픔을 지니고 있다. 결이 같은 아픔이었을까 아니면 아픔은 아픔을 알아보는 걸까, 모모는 로사를 감싸 주고 받아들인다. 로사는 겉으론 힘들다 못한다 싫다고 하지만, 진작 모모를 감싸 주고 받아들였다. 


이 영화의 아이러니


뭘 하든, 남기고 싶은 게 있다면 단 하나면 족하다. 이 영화 <자기 앞의 생>을 보고 나서 남은 게 뭔지 생각해 본다. 소피아 로렌과 이브라히마 게예의 훌륭한 연기가 주는 풍만함만으론 어딘가 조금 아쉬운 마음이다. 그들의 연기를 통해 일으킨 뭔가가 있을 것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유대감'이 아니었나 싶다. 보는 우리는 물론, 로사와 모모 서로도 서로의 진짜 아픔을 추측만 할 뿐이다. 


바로 그 지점이다. 드러내지 않는 아픔을 로사와 모모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주 잘 아는 듯하다. 그 유대감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감정이자 인간과 인간이 교류하고 교감하는 최고의 감정교환일 것이다. 그 지점을 알아 차릴 수 있다면 이 영화는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 밖에서 보는 우리로선 알아 차리기가 쉽지 않다. 아주 미묘하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만 공유하고 영화 밖으로 나오지 않는 느낌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잘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아주 불친절했다는 것.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이 영화가 충분하다고 느끼게 하는 지점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영화가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싶지만, 만약 친절했으면 이 영화에서 남는 건 훌륭한 연기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부디 이 영화를 보며, 영화 안으로 침참해 들어가, 로사와 모모의 드러나지 않는 아픔과 그들만의 감정선을 파악하여, 진정한 유대감을 조금이라도 엿보길 바란다. 그러 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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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선, 고아, 로맹 가리, 불친절, 소피아 로렌, 슬픔, 아픔, 연기, 유대감, 자기 앞의 생,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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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일상이란 <한강에게>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4. 1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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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한강에게>


영화 <한강에게> 포스터. ⓒ인디스토리



진아(강진아 분)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첫 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녀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술도 마시고, 합평회나 낭독회에도 나가 자리를 빛낸다. 하지만, 왜인지 잘 타던 자전거를 팔아버린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녀에겐 10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친구 길우(강길우 분)가 있었다. 하필 그와 크게 싸우던 나날이 이어질 때 그에게 사고가 났다. 결과는 의식불명, 진아는 사고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자기 탓인 것만 같다. 매일, 매순간이 괴롭다. 시가 써지지 않는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녀의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묻는다, 괜찮냐고. 안 괜찮다고 할 수 없으니 괜찮다고 말하는데, 사실 전혀 괜찮지 않다. 10년 동안 헤어질 거라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과 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다툼을 벌인 후 영영 볼 수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일련의 과정.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뒷걸음칠 수도 없다. 


멈춰버린 시간


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시인 진아. 영화 <한강에게>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한강에게>는 생각지 못한 사고로 모든 게 멈춰버린 시인 진아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영화의 첫 장면이 광화문에서의 416 낭독회인 만큼, 5년 전 그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가 아니고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일상이란 무엇일까. 


그래도 감히 상상해본다.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인식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눈물만 흘리고 있을 것 같다.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할 것 같지만, 한편으로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며 위로를 바라고 싶을 것 같다. 끝없는 모순에 흔들린다. 


무엇보다 죄책감이 들 것이다. 그동안 잘해주지 못했던 것, 잘해주기는커녕 심술부리고 짜증내고 화를 내며 멀리하려 했던 말과 행동이 하나하나 떠올라 가시처럼 박혀올 것이다. 이 정도가 감히 상상해본 멈춰버린 시간이다. 쓰는 것으로도 아프다. 연기는 어떨까. 


아픔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다


진아는 아픔을 안고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 <한강에게>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느니, 그래도 살아진다느니 하는 말이 있다. 누구나 언젠가 나보다 더 또는 나만큼 소중한 사람을 잃을 것이기에 저런 말들은 고깝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위로를 위한 위로가 아닌 경험에서 나온 말일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의 극렬한 경험이라고 해도 고스란히 전해져 완벽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전하는 바는 꽤 적확한 편이다. 아픔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진솔하게 전달된다. 처절할수록 조용하고 아플수록 움츠러들며 슬플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영화는 느리면서도 긴 호흡의 롱테이크를 전반적으로 사용해 시인 진아의 상태와 상황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게 또 전달받을 수 있게 하였다. 먹고 싸고 자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게 있을 테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할 텐데, 와중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과거의 기억들이 애처롭다. 


슬픔을 소화하는 태도


이 영화가 유의미한 건 진아가 슬픔을 소화하는 태도가 아닐까. 영화 <한강에게>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한강에게>가 유의미한 건 진아가 아픔을 대하고 슬픔을 소화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녀는 외부성으로서의 일상을 계속 살아간다. 떨쳐버릴 순 없을지라도 과거의 기억을 끌어안고 현재에 두 발을 굳건히 붙인 채 말이다. 누군가에겐 괜찮다고, 누군가에겐 괜찮지 않다고 말하며. 


하지만, 그녀는 내부성으로서의 일상을 영위하기 힘들다. 시인인 그녀에게 외부의 일상 아닌 내부의 일상은 곧 '시'일 텐데, 전혀 진전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다 거짓말 같고 또 한없이 죄책감만 들 뿐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라면 본인의 경험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간다고 하며, 이런 큰 경험이야말로 기막힌 자산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사람을 향해, 조용히 그리고 정중하게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 같냐고. 


세상에, 인간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강은 흘러간다. 나는 멈춰버렸지만 언제나 한강은 흘러간다. 바다는 갔다 왔다 하지만, 한강은 그런 바다를 향해 끝없이 흘러간다. 강을 보고 있으면 동일반복되는 흘러감에 답답하기도 하지만 흘러가는 모습 자체에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흘러가기만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극 중 시인 진아가 쓴 '한강에게' 일부를 옮겨본다. 박근영 감독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책의 첫 장에 그 사람을 써서 보냈다

그가 손목을 잡아 당겼다

그의 말이 떠오르고

떠오르는 모든 것을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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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 슬픔, 시간, 시인, 시집, 아픔, 일상, 한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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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 없는 괴물, 무엇이 그 괴물을 만들었나 <몬스터>

오래된 리뷰 2018. 11.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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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몬스터>


영화 <몬스터> 포스터.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에일린(샤를리즈 테론 분)은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13살 나이에 창녀가 된다. 그 사실을 안 동생들에게서 쫓겨난 그녀는 고향을 떠나 떠돌며 창녀 생활을 계속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마감할 결정을 한 그녀, 마지막으로 목을 축이러 들어간 바에서 셀비(크리스티나 리치 분)을 만난다. 사랑에 굶주린 에일린과 레즈비언 셀비는 사랑에 빠진다. 


에일린은 달라진 게 없다. 그녀가 가야 할 곳은 여지없이 길 위, 그리고 창녀 생활. 어느 날 에일린은 남자 한 명을 죽인다. 그는 에일린을 묶고 학대와 가학적인 섹스를 행했던 것이다. 이후 에일린은 셀비와 함께 일주일만 함께 하자는 말로 하여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도피 행각을 벌인다. 


도피 행각 도중 문득 깨달은 에일린은 창녀 생활 아닌 일반적인 일자리를 구하고자 한다. 그게 가능하지 않을 것을 안 셀비는 반대하지만 에일린은 바로 시작한다. 하지만 에일린에게 돌아오는 건 매몰찬 거절과 가혹한 냉대뿐. 모욕을 참지 못한 에일린은 다시 창녀 생활로 돌아선다. 


하지만 에일린의 창녀 생활은 이전과 다르다. 온갖 트라우마가 뒤섞여 그녀로 하여금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게 하여 연속적인 살인과 강도 행각으로 이끈다. 과연 에일린의 삶은 어떤 곳으로 향할까. 에일린과 셀비가 함께 하는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셀비가 에일린의 살인과 강도 행각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할까.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실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에일린 원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 <몬스터>의 한 장면.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영화 <몬스터>는 유명 미드 <안투라지> <킬링>의 시즌 1을 연출하고 영화 <원더 우먼>으로 세계적인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른 대표적 여성 감독 패티 젠킨스의 데뷔작이다. 그녀가 갓 30대에 들어선 때에 선보인 이 영화는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에일린 워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실제 그녀는 불우하기 짝이 없는 평생을 보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빠는 소아성애를 일삼다 구속된 후 자살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친오빠와 친할아버지에게 학대와 강간을 당했고 14세 때 강간으로 임신을 했지만 기를 수 없어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집에서 쫓겨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창녀 생활뿐...


끔찍하고도 끔찍하고도 끔찍한 에일린 워노스의 어린 시절 그리고 이후의 삶, 비록 영화는 불우하고 끔찍한 어린 시절의 그녀를 직접적으로 그려내진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고 그래서 더욱 처참하게 다가온다. 영화의 기저엔, 에일린이 그런 생활을 하고 살인과 강도 행각을 벌이게 된 기저엔, 그 시절 그 삶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연쇄살인을 옹호하지 않고 보는 우리 또한 그녀의 연쇄살인을 옹호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그 어떤 연유로도 살인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수는 없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많을 테지만, 그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같은 프레임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가해자들, 몬스터들


그녀되 괴물이었지만, 그녀를 그렇게 만든 수많은 이들도 모두 괴물이 아닐까. 영화 <몬스터>의 한 장면.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 프레임을 빗겨간다. 이 프레임이 아닌 다른 프레임으로 그녀를 바라보려 한다. 전자가 에일린을 주체로 놓아 그녀로 하여금 '남혐'을 중심에 놓고 주체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에일린을 주체이자 주체적 가해자 아닌 최소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말해 인지하게끔 한다. 


그녀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악마이자 괴물이었다는 점에'만' 천착하는 것과 그녀가 형용할 수 없는 짓을 당한 최악의 피해자였던 점'도' 인지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우리 모두 그녀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와중에 그녀가 어떤 짓을 당했는지 아는 게 필요한 것이다. 


그녀는 영화 제목대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몬스터'였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앞으로도 절대 부정할 수도 변경될 수도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또 다른 몬스터들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영화는 에일린이 아닌 그들, 그녀로 하여금 괴물이 되게끔 한 그들 즉 그녀에게 강간을 하려한 남성들과 사랑을 가장해 그녀에게 계속된 창녀 생활을 중용한 셀비'도' 몬스터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 


1992년에 제작된 에일린 워노스에 대한 다큐멘터리 <에일린: 연쇄살인범의 삶과 죽음>은 그들뿐만 아니라 에일린에게 적절한 사랑과 보호를 주지 못한 미국을, 그녀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의 굴레만을 씌운 언론을, 그녀를 어떻게든 연쇄살인범에 합당한 죄를 물어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법부야말로 몬스터가 아니냐고 묻고 있다. '진짜' 몬스터는 누구인가 묻는 게 아닌, '몬스터'란 무엇인가와 누가 '몬스터'인가 묻는 게 먼저이고 중요하다 하겠다. 


한없이 슬퍼진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없이 슬퍼진다. 영화 <몬스터>의 한 장면. ⓒ무비즈 엔터테인먼트



'난 대스타가 될 줄 알았어. 아니면 그냥 아름다운 여자라도. 그래, 나도 꿈이 많았어.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꿈을 속으로만 간직하게 됐어. 하지만 당시에는 철썩 같이 믿고 살았어.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언젠가 다 알게 될 거라 생각하면 행복했어. 마릴린 먼로만큼 키워주긴 힘들더라도 날 믿어만 준다면 내 가능성을 봐주고 아름답다 생각해준다면... 그럼 지금과는 모든 것이 다른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으로 날 데려가줄 수 있지 않을까.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어. 어느 날 다 끝나버렸지.'


영화가 시작되면서 에일린의 과거를 비춘다. 에일린의 내레이션이다. 꿈이 있던 시절, 사랑을 믿었던 시절, 행복을 바랐던 시절... 몬스터들은 그녀를 몬스터의 세상으로 끌고와 그녀로 하여금 다시 없을 몬스터가 되게 만든다. 그럼에도 영화는 몬스터와는 하염없이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은 사랑과 행복을 말하려 한다. 


끔찍했던 시절의 에일린이지만, 그녀에겐 셀비가 있었다. 셀비와 함께 하는 꿈, 셀비와의 사랑, 셀비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바란 에일린, 인생의 절정이었을까. 마지막 불꽃이었을까. 하지만 셀비라는 또 다른 몬스터는 꿈과 사랑과 행복을 빌미로 에일린으로 하여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고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쯤 되면, 에일린이 희대의 살인마라는 사실은 더 이상 머릿속에 없다. 그저 한없이 슬퍼진다. 무엇이 그녀를, 그를,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회의론에 빠지면 디테일한 면면들을 볼 수 없게 되는 우를 범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의 힘일까, 이 영화가 주는 영향일까. 그건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그게 무슨 대수랴 싶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만큼은 모든 걸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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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몬스터, 불우, 슬픔, 여성 연쇄살인범,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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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 하지만 끔찍한 현실 <툴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1. 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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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툴리>


영화 <툴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두 아이를 키우는 임산부다. 큰딸은 의젓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기에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하고 챙겨주어야 한다. 둘째 아들은 조금 특별하다, 조금 다르다. 예민한 게 정도를 지나칠 때가 많다. 와중에 그녀는 이제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운명이다. 육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가 태어나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 돌입한다. 큰딸을 최소한으로 챙기고 둘째 아들에게는 여전한 관심을 쏟는 와중에, 정녕 밤낮 없이 셋째 키우기가 계속된다. 와중에 남편은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고는 게임 삼매경이다. 끝이 없을 것 같고 변함도 없을 것 같다. 사소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모든 게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 


마를로의 오빠는 자신들이 야간 보모의 손에 키워졌다며 마를로에게 야간 보모를 권유한다. 어떻게 되든 아이는 엄마 손에 키워져야 한다고 생각해 완강히 거절하는 마를로, 하지만 나날이 지쳐가며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오빠의 권유를 받아 들인다.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 분)가 등장한다. 


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가 케어해줄 거라 말한다. 이 당돌함 또는 당당함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점점 믿음직하게 와닿는다. 마를로는 툴리에게 마음을 열고 아이를 맡기며 한껏 여유로운 나날을 만끽한다. 하지만 툴리의 정체는 가히 궁금하다. 그녀는 누구이길래 마를로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를로 본인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케어할 수 있는 것인가? 


끔찍한 현실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끔찍한 현실을 그려내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툴리>는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이자 끔찍할 수 있는 현실을 끔찍하리만치 여지없이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했던 그때 D-Day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찬사를 받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육아 전쟁' 편을 보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툴리>의 그것이 더 끔찍했다. 


데뷔 후 쉬지 않고 열일 중인 샤를리즈 테론이 세 아이의 엄마 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22kg나 찌우는 투혼을 불살랐던 게 이슈가 되는 와중에, 이 영화의 제작도 한 그녀는 <몬스터>의 에일린,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잇는 대반전 변신 캐릭터로 분했다. 이 영화들에서 그녀가 공통적으로 변신 공력에 맞먹는 연기 공력을 선보였듯, <툴리>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에 얼굴을 비치며 '찌질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론 리빙스턴이 마를로의 남편 드류로 희한하게 중심을 잡는 와중에, 툴리 역의 맥켄지 데이비스는 특유의 저음과 표정으로 샤를리즈 테론과 훌륭한 짝을 이룬다. 


한편 감독 제이슨 라이트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전히 젊은 나이이지만 10대 때 연출 데뷔를 한 만큼 다수의 연출작을 보유한 그는, 우리에게 <주노> <인 디 에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에 특화된 그는, 지극한 현실의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잘 캐치해내어 건드려 내보인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인지하게 되며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많은데 <툴리>도 그러하다.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키는 엄마의 모습


엄마의 모습은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킨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남자, 남편으로서 아직 아이는 없지만,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지만 이 영화에서 마를로로 보여지는 엄마의 실질적인 모습들을 보고 참담, 경악, 슬픔의 감정을 복잡다단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전쟁 같은 아이들 돌봄의 광경은 참담함을 야기시켰고, 밖으로 드러내기 힘든 엄마의 모습은 경악을 불러일으켰으며, 반전을 통해 보여준 여자, 엄마, 아내의 복합적인 자장에서는 슬픔이 밀려왔다. 


내 한 몸 온전히 건사하기 힘든 게 세상사는 이치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와 차라리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는 아이와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 세 아이를 온전히 키워낸다는 건 한없이 불가능의 영역에 수렴된다. 매일같이 한시도 쉼없이 똑같은 전쟁을 치르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 그 자체이다. 영화의 시작은 참담이다. 


영화는 점차 그 참담함을 들여다본다. 디테일들은 경악이다.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함의 일환일 테다. 그럴수록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경악일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줄 젓을 짜는 유축기 사용 장면은, 사용자 엄마의 태연하고 하릴 없는 모습과 대비해 충격을 준다. 제때 젖을 짜주지 않아 가슴 아파하는 엄마의 모습도 그렇다. 실로 많은 걸 배운다. 충격과 경악은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슬픔을 수반한다. 


이 영화가 주는 슬픔은 말할 수 없는 반전과 함께 온다. 말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면 2/3 지점에서 갑자기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올 때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바로 그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가장 이해되고 가슴에 와닿게 된다. 그러며 세 아이의 엄마가 여자이자 아내라는 걸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치유와 위로의 긍정적 목적


영화는 치유와 위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의 참담-경악-슬픔의 감정라인은 당사자에겐 치유, 보는 이들에겐 위로의 궁극적 목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치이다. 당사자인 주인공 마를로, 마를로로 대변되는 '엄마'는 자신의 엄마로서의 모습을 누구한테고 보여주기 힘들다. 거기에 부정이나 긍정, 무관심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대응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를로는, 샤를리즈 테론은 가감없이 대신해주었다. 그 자체로 치유다.


보는 이들이 이 영화에, 마를로의 모습에 마냥 감동 종류의 감정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그런 현실은 애써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맞대면 했을 때는 나서기 힘들기에 어떤 식으로든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비록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져왔다시피 했지만 '영화'로서의 함의를 잊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로의 감정 영역에 들게 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영화가 대신해주는 치유의 역할에 묘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이기적인,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위로. 


사실, 이 영화의 대상은 엄마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엄마에게 이 영화는 또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서 공감 어린 끄덕끄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혹은 끝나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이를 보러 가야 한다. 


반면, 당장의 엄마가 아닌 모든 사람은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실상을 한순간, 한 장면의 디테일을 통해서라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달라진다. 달라져야 한다. 엄마를 보는 시선이. 나아가 아내를 보는 시선이. 궁극적으로 여자를 보는 시선이. 더 이상 '여'전사(女戰士)는 없다. 전사(戰士)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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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 샤를리즈 테론, 슬픔, 엄마, 위로, 육아, 참담, 치유, 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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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통해 아이들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1.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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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프리다의 그해 여름>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포스터. ⓒ디스테이션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아이의 생각과 시선과 행동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내가 아닌 아이들이 바라보고 대하는 무엇에는 관심이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아이는 특별하고 신기한 존재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짓게 하기도 하지만 분노를 일으키게 하기도 하는.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들은 참으로 답답할 존재일 것이다.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일삼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동물 아닌 인간인 바 어떤 식으로든 소통이 가능하다. 어른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아이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유추하고 내보인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일까. 


창작 콘텐츠에 한해, 글과 그림 하다못해 사진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인지의 맞고틀림은 차치하고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직접 보여주어야 하는 영상은 가히 힘들다. 아이들을 콘트롤하기 힘든 만큼, 아이들을 통해서 아이들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어른의 시선 아닌 아이의 시선이 주가 되는 영화는 그 존재 자체로 위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표현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해냈다. 2016년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 <우리들>도 생각난다. 올해 개봉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 <홈> 등이 아이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발 하나를 걸쳤다. 


엄마 잃은 소녀, 프리다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불꽃놀이가 한창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밤, 여섯 살 난 여자 아이 프리다는 무심한듯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최근 엄마를 잃었다. 아직은 슬픔보다 공허함이 인 듯하다. 곧 엄마의 유언에 따라 시골의 외삼촌네로 간다. 다정하게 맞는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사촌동생 안나, 프리다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한 가족이 된, 셋이 아닌 넷. 셋과 낯설지 않지만 인숙하고 친밀하지도 않은 프리다는 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관심과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는 다정하게 대할 뿐 그 이상의 무엇을 주진 않는다. 또는 못한다. 반면 안나는 당연한듯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공허함 아닌 외로움이 프리다를 장악한다. 


프리다의 외로움은 어느새 외삼촌과 외숙모에서 아빠와 엄마로 불리게 된 그들을 직접적으로 향한다. 통하지 않자 본능적인 시기와 질투를 동반해 안나로 향한다.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방법들. 이 또한 통하지 않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공허함, 외로움, 시기와 질투의 시간을 지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엄마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언제쯤일까.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영화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아이가 행할 수 있는 감정표현은 많지 않다. 지극히 단편적이고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유추할 수밖에 없다. 한 아이의 시선이 지극히 들어 있는, 그래서 짐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프리다의 그해 여름>을 보면서도 상당 부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이 공허함, 외로움, 시기와 질투 순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짐작.


영화는 최선을 다한다. 아이의 시선을 따르며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유추하고 짐작하려고.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프리다의 얼굴만을 비춘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무표정하다. 그때마다 아주 미묘한 감정선이 흐른다. 그때마다 영화 밖으로 나와 프리다를 연기한 라이아 아르티가스에게 감탄을 하게 된다. 


프리다가 바라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지고 그녀의 생각 갈래가 어디로 퍼져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의 핵심에 가닿아 있는 부분인데, 아이의 시선과 여러 감정들에의 짐작과 유추가 시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아이가 지켜보는 모습을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카메라는 프리다의 뒷모습을 흔들리며 쫓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표정을 알 수 없고 감정선을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작디작은 뒷모습, 그 뒷모습을 미세한 흔들림이 감지되는 핸드헬드로 비출 때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프리다의 어린 나이와 작은 모습이 거대한 슬픔에 안으로부터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침표 아닌 쉼표가 이어지기를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이 영화를 반드시 끝까지 지켜보고는 바로 처음부터 다시 볼 것을 권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프리다를, 아니 영화에 보여진 프리다의 감정선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아!' 하는 감탄사는 우리를 영화의 처음으로 이끌 것이다. 비로소 영화를, 프리다를, 아이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면에서 '출중'하고는 거리가 먼 영화일지 모른다. 어느 면에서 '가장' 출중한 영화일지 모른다. 어느 면에 중점을 두는 건 보는 이의 자유지만, 감독은 후자에 방점을 찍었다. 그 면에는 절대적으로 '아이'가 있다. 프리다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아이가 전부는 아니다. 사실 그 부분도 이 영화의 '출중'에 큰 몫을 차지한다. 


프리다와 대면하는 외삼촌과 외숙모, 프리다가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들 말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프리다가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거나 친밀하지 않다. 그들도, 즉 어른들도 시간이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다. 영화는 아이의 시선에서 바로보면서도 어른의 입장을 놓치지 않는다. 


한정적인듯 참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부디 최대한 많은 것들을 찾아내어 깨닫는 기쁨을 누리길. 아이, 어른, 아이와 아이, 아이와 어른, 어른과 어른까지, 그 치밀하고 섬세하고 미묘한 관계들에 마침표 아닌 쉼표가 이어지기를.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그 감정들의 앙상블이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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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잃은 부부가 살아가려 한다 <래빗 홀>

오래된 리뷰 2018. 3. 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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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래빗 홀>


영화 <래빗 홀> 포스터.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조용하고 한적한 교외의 큰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베카(니콜 키드먼 분)와 하위(아론 에크하트 분). 하지만 그들에겐 불과 8개월 전 크나큰 일이 있었다. 네 살 된 아들 대니가 달려가는 개를 따라가다가 차에 치여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들은 애써 밝은 척 괜찮은 척 하고 비슷한 일을 당한 부부들 모임에 나가 위안을 받으려 한다. 


쉽지 않다. 아니, 너무 어렵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베카는 대니에 대한 흔적을 지워나가며 과거를 뒤로 한 채 나아가려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하위는 매일같이 대니의 살아생전 동영상을 보며 과거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차이 때문인지 그들 사이는 알게 모르게 점점 벌어진다. 


문제만 일으키던 베카의 여동생이 임신을 해 남자친구와 함께 엄마 집에 머무르게 된다. 한편, 베카 하위 부부와 절친했던 데키 릭 부부, 하위와 릭은 여전히 잘 만나고 대니를 포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베카와 데키는 연락이 끊긴 상태다. 


베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대니를 치인 장본인 제이슨을 만나 위안 아닌 위안을 받고자 하는데, 아들을 잃었던 엄마와 아이를 갖게된 여동생과는 계속 부딪힌다. 하위는 모임에서 알게된 개비를 만나 동질감에서 오는 위안을 받고자 한다. 여기서 방식의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서로 각자만의 방식으로 위안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죽음이라는 아픔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 <헤드윅>과 <숏버스>를 통해 자못 파격적인, 그만의 언어로 고민을 드러내고 편견을 부수고자 했던 존 카메론 미첼이 <래빗 홀>을 통해서 '아픔'을 말했다. 아픔을 대하고 견디고 이겨내는 방식을 고민하고 또한 편견을 부수고자 한다. 지루하다 할 만큼 정적인 대응일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아픔을 대하는 방식으론 파격적이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가족을 잃는다는 것,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나의 자식을 잃는다는 것. 죽음에 차등이 있일 수 있겠냐마는, 남겨진 이가 가장 아픈 건 아마도 자식 잃은 부모의 사례가 아닐까. 영화는 죽음에 관한 최고 수위의 아픔을 받고 견뎌내야 하는 한 부부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누구나 누군가를 잃지만 이런 류의 끔찍한 상실을 겪어본 이는 많지 않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 영화를 완전한 몰입 하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그럼에도 상실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 이상의 위로와 위안 없이도 그 자체로 더할나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방식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자식 잃은 아픔에 대항하는 두 부부의 방식 차이를 우리에게 내보인다. 베카가 미래지향적이고 하위가 과거지향적이어서,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하위는 지니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베카가 과거의 인연을 끊으려 하면서 자신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려고 하는 반면 하위는 과거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며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동질감 어린 위안을 받고자 한다. 


한편, 현재 대니는 떠나고 없다. 베카는 대니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도망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이슨이라는 아픔의 가장 큰 축을 대면하는 용기도 보인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과 그를 만나서 대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차이가 있다. 그녀의 행동은 정녕 위대하다.


하위가 보이는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또한 지극히 일반적이고 인간적이다. 누구라도 자식을 상실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싶다. 아니,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상실의 때 이전으로 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제이슨과 마주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그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우리가 보인다. 


영화는 말한다. 그럼에도 베카와 하위는 모두 힘들다고 말이다. 위대한 베카와 일반적인 하위 모두 이 속절없는 상실과 아픔과 슬픔 앞에서 한없이 힘들다고 말이다. 과연 이 앞에 '어떻게'를 붙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아픔을 이겨내야 하는가' 따위의 물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게 맞긴 할까. 


영화가 건네는 답


영화 <래빗 홀>의 한 장면. ⓒ프리비전 엔터테인먼트



답을 주진 않지만, 아니 답을 줄 수 없지만, 답을 찾아보자. 제목에서 찾을 수 있고, 뜻밖에 베카 엄마의 경험에서 묻어나오는 무심한듯 진정어린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화 내내 스치듯 지나가는, 제이슨이 그리는 만화책 '래빗 홀'.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래빗 홀을 통해 가게 된 그곳에 나의 다른 버전이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고통은 베카와 하위 부부를 단 한 순간도 놔두지 않을 것이다. 출구는커녕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더라도 단언할 수 있지만, '래빗 홀'에 대한 상상이 순간이나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분명하다. 영화가 건네는 답 아닌 답이다. 


베카 엄마에겐 아들이 있었다. 서른 살에 헤로인 과용으로 죽은 아들이. 베카에게 '아들의 죽음'이라는 동질감으로 비교하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려 하지만 반감만 살 뿐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죽음'이 주는 치명적 아픔은 같은 것, 베카는 엄마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녀의 말이 영화가 건네는 또 다른 답이 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만 하게 되지.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해. 그러다 또 문득 생각나서 보면 거기 있는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끔찍할 수도 있지.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야. 그건 뭐랄까, 아들 대신 너에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그렇지만... 사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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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나이, 29살의 이야기 <나의 서른에게>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2.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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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서른에게>


퇴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서른'. ⓒBoXoo 엔터테인먼트



'서른'이라는 나이,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백세 시대에 서른이 갖는 의미가 클 수 없는 것이다. 예전 삼십대가 인생의 최절정기라고 했다면, 요즘 삼십대는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서른에게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예전부터 이어온 관념 때문이다. 


서른이라는 말이 들어간 콘텐츠는 소설, 시, 노래, 영화 등 부지기수이다. 1992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의 상징성을 특유의 감정선으로 내보내 만민의 호응을 얻었다. 


요즘 서른에 투여하는 바는 많이 다르다. 일례로 얼마전 출간되어 꽤 호응을 얻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삼십대가 된 주인공을 내세워 청춘세대론을 설파하고 있다. 와중에 홍콩에서 날아온 영화 <나의 서른에게>가 눈길을 끈다. 예전의 서른과 요즘의 서른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부여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29살,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서른을 앞둔 시기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방황하는, 즉 충분히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기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오랫동안 사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으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괜찮은 외모를 가진 '29살' 임약군, 그녀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서른을 앞두고 그녀에게 온갖 일들이 생긴다. 


팀장으로 승진한 그녀에겐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친한 친구의 '서른 살' 생일 축하 파티를 소소하게 해주며 서른 살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긍정적이지만은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가 부쩍 심해진 아버지이지만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할 뿐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부쩍 소원해진 느낌이다.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게 결정적이다. 


갈 곳 잃은 임약군이 향한 곳은 일면식 없는 이가 잠시 내놓은 집. 그곳은 황천락이라는 동갑내기가 파리로 잠시 여행을 떠나면서 빌려준 집이다. 영화는 임약군의 이야기에서 황천락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녀의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는 임약군처럼 다사다난하지 않다. 그녀는 10년 동안 음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서른을 맞이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여행을 가려는 듯하다. 


서로 전혀 다른 외모에, 가정환경에, 능력에, 삶을 산 임약군과 황천락.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날 서른이 된다. 그런데 임약군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황천락은 행복에 겨워 웃음꽃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랑했으면


영화는 이왕이면 보다 행복한 서른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을 29살에게 보낸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원제는 <29+1>이다. 영화 제목처럼 30이 주(主)라기보다 30이 되기 전의 20에서의 마지막이 주(主)라고 할 수 있다. 막상 되면 전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래와 엄청난 변화가 함께 올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약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가 봐도 그녀의 삶은 괜찮은데, 그건 오로지 남에게 보여지는 삶의 부분 부분들 뿐이었다. 그 부분들을 괜찮게 보이려고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황천락은 특별한 게 없다. 아니, 남들만큼 못한 삶이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나. 여튼 직장도 변변치 않고 남자친구도 없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기록하기로 한다. 그 모든 게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여기에 옳고 그름은 통용되지 않는다. 임약군은 정녕 열심히 노력했고 잘했다. 그녀가 굳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녀는 그저 지쳤을 뿐이다. 황천락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황천락처럼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다들 비슷한 선에서 출발했다면 29, 30이면 누구나 그럴 나이이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이다. 


흔하디 흔한 우리네 삶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임약군의 이야기도, 황천락의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 뿐,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영화가 노린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만인의 서른이 이 영화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삶도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흔한 워너비 커리어 우먼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보편적 전형. 솔직담백한 이 영화에 참으로 적당한 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에서 탈피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서른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며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보이며 규정하진 않는다. 각자 다른 답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왕이면 '함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운을 뗀다. 그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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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슬픔의 설원...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 <윈드 리버>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0.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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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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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웰메이드 성장 드라마 <몬스터 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9.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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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몬스터 콜>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되는,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 <몬스터 콜>. ⓒ롯데엔터테인먼트



2년 전 개봉해 찬사를 받은 명품 애니메이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무스타파라는 현자가 말하는 삶의 진리와 사랑 이야기를 9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최대한의 시너지로 풀어내었다.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진리의 향연이 90여 분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내내 계속되기에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현자 같은 이(몬스터)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는 애니메이션화되어 이해를 도우며 결국 삶의 진리와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생각나게 하는 <몬스터 콜>은 다양한 은유의 결정체다. 현재를 기반으로 하되 다분히 판타지, 그것도 다크 판타지적인 세계관이 이를 가능케 한다. 


'성장'과 '가족'을 주요 키워드로, 인생과 작별과 마음 등의 키워드가 뒤를 받힌다. 데인 드한이 생각나게 하는 연기를 펼친 루이스 맥더겔이 주인공 코너를, 익숙한 이름들인 펠리시티 존스와 시고니 위버가 코너의 엄마, 할머니 역을 맡아 영화의 품격을 높혔다. 무엇보다 목소리만으로 극의 중심을 잡은 리암 니슨은 CG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몬스터에 확실한 활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진실 뒤에 찾아오는 거대한 슬픔과 깨달음


어린 나이, 하지만 너무도 힘든 삶의 코너. 그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장통이자 통과의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집에선 암에 걸려 죽어가는 엄마가 있고, 학교에는 사정없이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 그 때문인지 코너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또래와는 뭔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 집에서 멀리 보이는, 공동 묘지 한가운데의 큰 나무가 몬스터로 변해 집으로 들이닥친다. 그러곤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다 듣고 나서는 코너보고는 진실된 네 번째 이야기를 해야 한단다. 


코너에게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외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코너를 데려가고자 한다. 아무래도 딸에게 큰 가망이 있는 것 같진 않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코너는 그게 너무나 싫다. 엄마가 죽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다. 아니 그는 엄마가 금방 나을 거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다. 


밤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몬스터가 들려주는 세 가지 이야기는 코너의 일상과 묘한 병렬을 이룬다. 코너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걸까. 몬스터는 진짜일까 그저 꿈 속의 환상일까. 코너 안에 내재된 또 하나의 코너일까. 그런 와중에 엄마의 병은 악화되고 코너는 점점 엇나간다. 할머니는 물론 이혼한 아빠와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코너를 이끄는 건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도 아닌 몬스터다. 코너도 그걸 느꼈는지 몬스터를 만날 12시 7분을 기다리는 것도 모자라 시계를 돌려 몬스터를 억지로 불러낸다. 그리고 코너는 결국 네 번째 이야기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거기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그 후에 찾아오는 깊은 깨달음이 있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어마어마한 불행이 덮치려 한다. 헤어나올 수 없다. 마주볼 수 있을까? 마주보아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불행은 다른 무엇도 아닌 불행 자체로 나타난다. 우린 대부분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넋 놓고 불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곤 곧 불행을 덮어둔 채 시선은 불행이 덮친 나를 향한다. 하지만 그건 이미 내가 아니다. 불행한 나일 뿐이다. 애초에 잘못된 것이다. 


불행이 우리를 덮칠 때 우선 불행을 마주보아야 한다. 나중에야 이미 불행한 나로 시선을 향하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니, 일단 불행이 덮치면 모든 게 달라지므로 불가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훈련이라도 하란 말인가. 그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영화는 말한다.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하며 공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기쁨은 함께 하고 슬픔은 나누라는 말일 테다. 어렵기는커녕 지극히 쉬운 이 명제를 영화는 소년의 눈높이에 맞게, 그렇지만 유치하지 않게 그려낸다. 코너가 대화해야 하고 대화하게 되는,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 대상들이 어른들이기 때문에 그 어른들 또한 나름의 성장을 하는 것이다. 


코너가 말해야 하는 네 번째 이야기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뭔가 크나큰 비밀이 있는 것일까. 절대 말할 수 없는 잔인하고 기가 막힌 비밀일까. 불행과 슬픔, 모순적 마음, 성장에 관련된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은 코너만의 비밀이라고만 말해둔다. 당연히 죽어가는 엄마와 항상 불안에 떨고 불편하고 불만에 차 있는 코너의 표정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가리라


불행은 곧 작별이다. 작별 뒤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저래도 '삶'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코너의 엄마는 죽어 간다. 죽는 게 확실하다. 그 자신도 알고 코너의 할머니도 알고 코너도 안다. 즉, (죽음에 의한) 영원한 작별이 멀지 않다는 걸 다들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작별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미 누군가와의 작별을 해봤을 게 분명한 어른들도, 누군가와의 작별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잘 모르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 반드시 당면하게 될 건 다름 아닌 '작별'이다. 분신과도 같은 사람과의 작별이라도 그건 명백한 진실, 하지만 맞닥뜨리면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진실이기도 하다. 몬스터는 그 모든 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마음에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진실이라고 말한다. 


우린 사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과정까지도 모두 꿰뚫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꿰뚫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삶의 요소들이 변주되고 은유로 표현되는 장면 장면들은 이 영화의 것만도 코너의 것만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잔잔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그리고 새롭게 다가오는 건, 영화를 보는 우리들 현재 삶의 결이 영화 주인공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잊지 않고 좋은 일 슬픈 일 모든 걸 기억해야 한다. 또한 그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그 기억을 공유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그곳엔 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는 우주를 구성하는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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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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