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책하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민주주의'에 해당되는 글 8건

제목 날짜
  • '조슈아 웡', 홍콩 민주주의를 최후까지 수호할 그 이름 <우산혁명: 소년 vs. 제국> 2019.08.30
  •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진실에 가까운 거울 <그때 그사람들>(2) 2019.05.22
  • 그녀들에게 남았던 유일한 선택,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서프러제트> 2016.08.03
  •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사법부>(1) 2016.04.25
  •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만 정확히 따르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2) 2016.03.30
  •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 당신의 선택은? <복종>(5) 2015.08.28
  • <르몽드 20세기사> 20세기 역사의 민낯을 꼭 알아야 한다(2) 2014.10.28
  • 30년전 전설의 베스트셀러...다시 보니?(2) 2013.05.10

'조슈아 웡', 홍콩 민주주의를 최후까지 수호할 그 이름 <우산혁명: 소년 vs. 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8. 30. 08:00
728x9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우산혁명: 소년 vs. 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우산혁명: 소년 vs. 제국> 포스터. ⓒ넷플릭스



'혁명'이란 낭만적이고 옛날의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21세기, 특히 2010년대 들어서 역사적인 혁명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2010~11년에 걸쳐 일어난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을 필두로, 2011년에는 동시다발적으로 이집트혁명과 예맨혁명과 리비아혁명 등이 일어나 장기집권 세력을 몰아냈다. 2014년에는 홍콩의 '우산혁명'이, 2016~17년에는 한국의 '촛불혁명'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2019년 현재 홍콩에서 다시 치솟은 혁명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장기화되고 있다. 아직까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로 불린다. 


대만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홍콩으로 도망 온 홍콩 범죄자의 외국 송환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홍콩 당국은 '범죄인 인도법' 제정을 추진한다. 홍콩인들은 이 법이 중국으로의 정치범 송환에 쓰일 것을 강하게 우려했고, 흔들리는 홍콩의 '민주주의'를 위해 유례없이 강력하게 반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홍콩 인구 1/4가 넘게 참여한 이 시위로 홍콩 자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캐리 람 행정장관 이하 홍콩 행정부는 법안의 완전한 철회를 선언하지 않았고 때문에 시위는 절대 끝나지 않을 듯하다. 


와중에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 중 친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5년 전 우산혁명 때 불과 17살의 나이로 상징이자 스타가 되었던 '조슈아 웡'이 그다. 우산혁명 이후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던 그는, 또다시 수감되었다가 지난 6월 풀려나자마자 시위에 참여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얼마전에는 한국의 유수 방송사에서 앞다퉈 인터뷰를 할 정도로, 한국에서도 유명인사다. 물론, 우산혁명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우산혁명' 아닌 '조슈아 웡'


2년 전 넷플릭스에서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우산혁명: 소년 vs. 제국>을 제작해 내놓았다. 원제는 '우산혁명'이 아닌 '조슈아'인데, 어느 제목이 더 괜찮은지 섣부른 판단이 서질 않는다. 작품 자체로는 '조슈아'가 맞는 것 같지만, 여러 제반 사항을 들여다보면 '우산혁명'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작품은 조슈아의 조슈아를 위한 조슈아에 의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조슈아 웡이 주도적으로 창단한 학생조직 '학민사조'가 홍콩 당국의 국민교육(중국에서 건너온, 조국과 공산당을 향한 일방향적 충성 교육 과목) 필수 반대 투쟁을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으로 이끌어 학교의 자율에 맡기겠다는 수정안을 이끌어내는 데 할애했다. 그 이면에는 학생들도 시민의 의무를 다하며 홍콩의 민주·사상·언론의 자유를 지키자는 의지가 있었다. 


뒷부분은 보다 조슈아 웡에 천착하는데, 학민사조가 우산혁명을 이끄는 중심 세력 중 하나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홍콩대학 법학부 베니 타이가 이끄는 '점령중환', 홍콩의 대학들 연합 조직과 함께 중국과 약속된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의 제대로 된 이행을 중심에 두고 시위를 해나간다. 장장 79일 동안 중환을 비롯해 홍콩의 주요 지역에서 계속되었지만, 홍콩 당국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초반의 강경대응과 후반의 무대응을 두루 오가는 전략을 취했다. 결국 베니 타이 등은 자수했고 조슈아 웡 등은 시위를 철회했다. 


조슈아 웡을 들여다볼 기회


우리로선 남의 나라 혁명기와 혁명의 주세력과 주요 인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전무하다. 그저 언론의 짤막한 기사로나마 띄엄띄엄 중요한 기점의 순간들을 엿볼 뿐이다. 그조차도 여타 수많은 국내외 핫한 뉴스들 때문에 완벽히 들여다볼 수 없다. 늦게나마 다큐멘터리나 책으로 잘 정리되어 있는 걸 보는 게 관련된 것들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 면에서 <우산혁명: 소년 vs. 제국>은 굉장히 잘 정리되어 있는 다큐멘터리다. 비록 우산혁명 당시 홍콩 행정장관인 렁춘잉을 위시한 당국 관계자나 나아가 중국 당국자 누구의 직접적인 얘기를 들어볼 수 없이, 조슈아 웡을 비롯한 학민사조 수뇌부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교수와 기자들의 얘기만 들어볼 수 있었던 게 조금 아쉽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선 '우산혁명'이 아닌 '조슈아'라는 원제가 올바른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작품은, 조슈아 웡을 다룬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201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자 '리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10대 후반에 불과했지만, 어른들조차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진행했고 실패했고 해냈다. 그는 그때 이미 다음 세대를 언급하며 지금의 문제는 우리 세대에서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믿기 힘든 리더십이 아닌가. 다큐멘터리를 보면, 중국과 홍콩과 시위가 아닌 조슈아 웡만 보인다. 


허울뿐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결코 지치지 않는 열정과 에너지라는 기반 위에 흩트러지지 않는 신념으로 절대 물러서지 않을 조슈아 웡은, 앞으로도 홍콩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최전방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몸소 행동을 할 게 분명하다. 그만큼 중국 당국과 홍콩 당국은 그를 주시하고 종국에는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말한다. 홍콩의 현재와 미래는 중국이 아니라 홍콩이 결정해야 한다고. 다른 어떤 거창한 수식어나 사변적이고 어지럽고 고색창연한 논리와 이론이 아닌, 올곧고 틀림 없는 한 문장이다. 거기에 어떠한 정치적 수사도 없지만, 누군가에겐 그보다 더 정치적인 말도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뼛속 깊이 '홍콩인'으로 1997년 홍콩 반환 즈음에 태어나 자라며 자신이 중국인과 다르다는 걸 몸소 체험하며 자란 세대의 상징이다. 우산혁명이나 이번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의 주 세력이 10~20대 정도로 나이 어린 이들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우린 불과 2년 전 촛불혁명으로 사상 최악의 불법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전력이 있다. 그때 우리의 바람과 목소리와 행동이 2014년과 2019년 홍콩의 그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가치 '민주주의'가, 말 그대로 이 시대와 함께 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치여야 한다는 것이다. 허울뿐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민주주의, 사회운동, 우산혁명, 조슈아 웡, 중국, 홍콩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진실에 가까운 거울 <그때 그사람들>

오래된 리뷰 2019. 5. 22. 08:00
728x90



[오래된 리뷰] <그때 그사람들>


영화 <그때 그사람들> 포스터. ⓒMK픽처스



80년대부터 스탭으로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임상수 감독,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바람난 가족> <하녀> <돈의 맛> 등을 통해 풍자 가득한 한국형 블랙코미디의 한 장을 장식했다. 하지만 2016년부턴 영화계에서 잘 볼 수 없다. 


그중 4번째 작품 <그때 그사람들>은 큰 논란거리를 던진 한편, 임상수의 초기작 이후 마지막으로 잘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성도덕 비틀기를 정치 역사 실화로 가져가 '높으신 분들'의 건드리는데, 모자랄 것 없이 훌륭히 해냈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으로 쏴죽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박흥주 수행대령, 박선호 의전과장 등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픽션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또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재미요소이다.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그때 그 사건.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박정희, 그가 군사쿠데타 이후 18년째 권력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간단히' 진압해버린다. 시민들은 한껏 움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는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 대통령 각하와 김 중앙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과 양 비서실장이 자리를 함께 한다. 대통령 각하의 푸념에 양 실장은 비위를 맞추고 차 실장은 핏대를 세우며 김 부장은 조용히 있을 뿐이다. 이 자리의 주타겟은 김 부장, 이전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쓰는 그를 향해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이 강하게 할 것을 밀어붙인다. 


안 그래도 헬기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 각하의 옆자리에 앉지 못하고 술자리에서도 차 실장이 2인자 노릇을 해대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쌓인 게 아니다. 이내 그는 민 대령과 주 과장을 불러 거사를 명령한다. 자신이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을 쏘는 즉시 각각 경호실장과 경호팀을 제거하라고 말이다. 계획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된다. 그러곤 김 부장과 민 대령은 마침 저녁을 먹고 있었던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차를 타고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향한다. 김 부장은 왜 그랬을까.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하루를 다룬다. 그 사건을 전후로 한 준비(?) 과정과 처리(?) 과정 말이다. 하지만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면, 준비나 처리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실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김 부장은 아무런 준비 없이 당일 당시에 부하들에게 거사를 명령하고 부하들은 아무 생각없이 따를 뿐이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못될 시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모양새이다. 


김재규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 한몸 희생한 영웅적인 일이라든지 시민들에 의해 정당한 방법으로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든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권력을 찬탈하려다 실패한 것뿐이라든지 말이다. 이 영화는 당대를 비추되, 하루의 한 장소에 집약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조명함으로써 감독과 각본을 맡은 임상수만의 시선으로 보았다. 


임상수의 눈엔 그놈이 그놈이다. 민주주의를 '폭압적으로' 제압하자는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을 했다고 하지만 역시 '유화적으로' 제압해왔던 김 부장과 부하들이나, 이저저도 아닌 빈 껍데기 '술상무'일 뿐인 양 실장이나, 모두 그 자리에서 당대를 정확하게 그래서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보면, 여대생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잠드는 대통령 각하나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총에 맞아 손가락이 날라가자 화장실로 숨지 않나 비서실장이라는 작자는 총에 맞지도 않았는데 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질 않나. 김 부장은 준비도 하지 않고 거사를 치르곤, 처리하는 과정도 전혀 '프로'답지 못하다. 거사를 치르고 난 후부터 한순간도 빠짐없이 오판에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는 것이다. 답답할 노릇. 


진실에 가까운


영화는 진실에 가깝게 그때 그곳의 그사람들을 그린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결국, 그때 그사람들은 단 한 명도 '쓸모 있지' 않았다.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임상수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이보다 더 '비웃길 수 없을' 정도로 국가를 말 한 마디, 손짓과 턱짓 한 번에 좌지우지했던 그때 그사람들을 그리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과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도 생각할 정도이다. 


권력은 만들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고 겉으로나마 따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권위는 만들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지만 따르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때 그사람들의 권력이란 무소불위였을지 모르지만, 권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을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권력이 무엇이고 권위가 무엇인지. 또 권력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권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영화는 사실, 그다지 재밌진 않다. 인간군상을 그려내고자 다양한 캐릭터들의 디테일한 부분이 소소한 웃음을 주지만, 대체적으로 사건의 앞뒤 과정이 지루하긴 하다. 특히 후반부에서 시선이 급격히 분산되면서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한 초점도 흐려지고 자연스레 재미도 반감된다. 의미도 있고 논란도 많아 생각할 거리도 다양하지만, 영화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외국 영화들은 정치역사 실화를 가져와 다큐멘터리로도 영화로도 자못 훌륭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라는 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인데, 우리나라에선 많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하는 것일 테다. 관심 없는 대중이 먼저인지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창작자가 먼저인지, 그럼에도 언제나 기대하고 있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1026, 그때 그사람들, 김재규, 민주주의, 박정희, 블랙코미디, 인간군상, 혁명
  • BlogIcon 여강여호
    2019.05.22 13:19 신고

    한국 근현대사만큼 전세계적으로 내부 논란이 많은 나라가 있을까 싶습니다. 친일과 독재의 역사가 왜 논란이 되는지...청산을 못하는 우리 문화 때문이지 싶기도 하고....박정희 관련 영화 리뷰를 보고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 BlogIcon singenv
      2019.05.22 13:20 신고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도 말 하지도 못하는 게 참담해요ㅠ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그녀들에게 남았던 유일한 선택,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서프러제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8. 3. 08:00
728x90



[리뷰] <서프러제트>


지금은 당연한 것들 중 하나인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영화 <서프러제트> 포스터 ⓒUPI코리아


영화 <서프러제트>는 일방적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그들 말마따나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 건물 유리창을 박살내는 걸 시작으로, 비어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력 정치가에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건 서프러제트의 주요 활동이었다.

 

가상의 인물 ‘모드 와츠’가 어떻게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어 과격한 폭력 활동까지 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나를 앞뒤 가릴 것 없이 직진하는 식으로 그려낸 영화는, 심오한 고민이나 산재한 문제들을 뒤로 하고 현상에 집중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한 면과 본질을 무시한 것인데,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서프러제트를 이끈 전설적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그녀에게 감화된 수많은 여성 중 한 명을 가상의 인물로 내세운 점만 봐도 그렇다.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될 때까지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는 걸 안다. 그중 하나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다. 특히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과 결이 완전히 반대인바,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흔한 여성 노동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까지


영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동자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가 남성 고용주의 부당한 심부름(남자가 해야 하는 일을 떠맡김)을 가는 도중 서프러제트에 의한 폭력 활동을 목격하며 시작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남녀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우연히 엉겁결에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되는 모드,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 증언했다는 진심어린 말이 여기저기 회자된다. 때문에 정부에서 찍은 요주의 인물이 된다.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종다인 모드 와츠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의 폭력 활동을 목격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여성 참정권 가부 발표가 있던 날 현장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는 모드, 감옥에서 여성의 굴욕을 맛보고는 발을 빼려 한다. 하지만 더 심해진 차별을 보고 다시 현장으로 향한다. 그때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듣고 감화된다. ‘물러서지 말아요,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이길 거예요. 노예가 되느니 반역자가 됩시다!’ 한 번 더 잡혀갈 위기에 처한 모드, 그런데 감옥이 아닌 집 현관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남편한테 맡기면 알아서 할 거란 말과 함께.


남편의 행동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부가 행하는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편은 그녀를 쫓아내고는 아이를 혼자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 보내 버린다. 남자인 남편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사상, “‘내’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들이 맞서야 했던 건 참정권이 아니라 세상 거의 모든 남자, 나아가 여자들에게도 뿌리박힌 그와 같은 사상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지금은 물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참정권은 돌아갔지만, 뿌리 깊은 사상은 아직 인 것 같다. 여전히 여자를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로만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 내기, '폭력'

 

쫓겨난 모드가 갈 곳은 서프러제트 일원의 집뿐이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에게까지 한순간에 내팽개쳐진 그녀는 서프러제트 활동에 매진한다. 아무도 그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상황, 가장 뼈아픈 건 같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현실을 바꿀 마음이 없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게 운명이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활동한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남은 건 뭘까. 격렬히 시위하고 유리창을 깨고 의회에 청원해도 그녀들의 목소리는 속절없이 묻히지 않는가. 정부는 그 행위를 ‘관심을 얻어 보려는’ 수작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차원을 달리하는 행동이다. 그들이 행하는 짓보다 더한 행위, 힘없고 무능하다고 여기는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유능한 행위인 ‘폭력’말이다. 그것도 생각하기 힘든 폭력.

 

폭력은 격렬한 고민을 수반한다. 아니,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폭력이라는 건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악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폭력을 목소리로 인지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편으로 말이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남성이었기에.

 

지금 한창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페미니즘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말할 필요가 있겠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페미니즘에 속해 있긴 하지만, 여성 참정권은 겉으로 드러난 활동이자 시작일 뿐이다. 거기서 끝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다름없다. 진정 쟁취할 건 ‘남녀평등’에 있겠다. 아직 여러 면에서 남녀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하라

 

남녀평등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조심하는 편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할 때는 가끔 말을 더듬기도 할 정도다. 조심도 조심이지만, 스스로 남녀평등에 대해 절대적이리만치 선을 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는-’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남자를 옹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민감한 사항인 군대, 결혼 얘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여자들이 ‘여자니까 ~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영화에서 남자들의 생각에 당연한 듯 동조하는 여자들의 심리처럼 말이다. 그런 이들이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남자는~’이라고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남녀평등’이 흔들리곤 하는 것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해 수많은 논란이 오고간다. 이 영화는 그 시작이 성스러웠음을 보여준다. 비록 폭력을 동반했지만, 합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했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영화는 그런 나의 고민을 붙들어 주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여성 참정권’을 되찾기 위해 전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성스럽게 다가왔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엔 많은 고민과 고충이 뒤따르겠지만, 실제로 뒤따랐겠지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보여주지 않았다. 행동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남자, 민주주의, 서프러제트, 에멀린 팽크허스트, 여성, 여성 참정권 운동, 차별, 페미니즘, 폭력, 행동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사법부>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4. 25. 08:00
728x90



[서평] <사법부>



<사법부> 표지 ⓒ돌베개


2015년 말 경 대법원 소속 사법정책연구원이 일반국민 1,100명과 재판 당사자 300명을 상대로 한 '국민의 사법절차에 대한 이해도 및 재판에 관한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법원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5점 척도 답변에 평균 3.04점을 줬다. 즉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60.8점인 것이다. 낙제점을 겨우 면한 정도 또는 낙제 수준의 점수다. '헌법의 수호자'이자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수호자'인 사법부가 왜,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된 것일까.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사법권에 대한 독립을 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사법권의 독립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사법권이 독립되지 않는다는 건 국민이 기댈 최후의 보루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건, 민주주의가 발을 붙이기 힘들었던 과거의 시기엔 사법권의 독립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걸 의미한다. 한국 현대사는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삼권은 국가 권력의 핵심이다. 이들 삼권을 분립하여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시킴으로서 국가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막는 건 민주주의 국가를 이끌어가는 기본 원리다. 이중 사법권은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수호자이면서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법권은 항상 정치권력의 침해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사법권을 쉽게 장악하고 휘두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법권의 독립은 반드시 행해져야만 한다.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에 거침없는 죽비를 내리쳐 왔던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사법부>(돌베개)는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라 할 수 있겠다. 책의 태반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사법부에 대한 부당한 압력과 개입으로 채우고 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다는 악명 높은 권력의 최정점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뭔들 못했겠느냐마는, 그 중심에 사법권 장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법부야말로 거꾸로 창을 겨누면 누구보다도 쉽게 헌법을 파괴할 수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을 텐데, 그걸 장악한 자 또한 그와 같은 짓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서슬퍼런 와중에도 많은 이들이 사법권 독립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한 것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그리도 어려웠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법복을 벗고 법조계를 떠났다. 한홍구 교수는 그들의 일 또한 속속들이 보여준다. 물론 반대되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 권력에 승복해 행정부의 시녀와 같은 역할을 자임하는 데 앞장 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들의 입장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던 만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책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쓴 만큼 어렵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저자의 말대로 '화끈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고 그나마 있는 자료들도 기대만큼 확실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보의 단순한 나열로 비추기 일쑤이다. 그래도 울분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개개의 긴박함과 함께, 사이다 같이 속 시원하게 평을 해주는 한홍구 교수의 말 한마디가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다. 


1971년에 있었던 사법파동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해 6월과 7월,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내리고 서울형사지법에서는 시국 사건에 대해 연이은 무죄판결을 내린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었고, 정부가 어떤 수를 쓰든 이에 대해 손을 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해 검찰이 영장을 청구한다. 


1971년 7월 말 경,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울형사지법의 판사와 참여서기 등 세 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판사들은 격앙했고 집단사표를 제출한다. 37명이었다. 나중에는 사표를 제출한 법관의 수가 100명을 넘었다. 사법파동의 양상이 점차 법원과 검찰의 대립으로 치닫자 수습에 나섰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결국 법관들은 가장 단호한 무기라고 생각했던 사표 제출을 철회하고 투쟁을 그쳤다. 사법파동의 허무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후 중앙정보부원들은 판사실을 대놓고 들락거리게 되었고, 사법부의 독립성은 사실상 무너졌다. 그렇지 않아도 1972년 10월부터 유신시대가 시작될 것이었다. 


사법권 흔들기를 제지할 수 있는 건 사법부 그리고 국민 뿐


오늘날의 사법부는 어떤 모습인가. 민주화 이전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로부터 수많은 압제를 받으면서 그래도 지키려고 애쓴 사법부의 독립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길을 져버리지 않았는가. 외려 옛날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그 권력과 위치를 사법부가 꿰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국민들이 체감하는 지금의 사법부가 그렇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예전의 사법부가 국민이 아닌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건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내부의 요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지난 10여 년 간의 보수 정권 하에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판결을 많이 내린 모습이 눈에 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압력으로 독립성을 침해당하고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독립성이 침해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 모습이야말로 사법부가 제일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그러는 한편 이 나라를 움직이는 보수 세력의 사법부 때리기 또한 여전하다. 사법부가 보수 세력의 생각과 다른 독립적인 판단으로 판결을 내릴 경우, 그들 세력이 뿌리내려 있는 입법부, 행정부, 언론까지 총동원해 사법부를 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사법부로선 흔들리지 않고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를 제지할 수 있는 건 사법부 그리고 국민 뿐이다. 사법부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킨다는 의무와 명분 하에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그들 자체적으로도 특권적 지위나 계급적 입장에서 멀어져야 한다. 국민은 사법부에 대한 관심과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펴야 하겠다. '법'과 '정의'는 이와 잇몸처럼 한 몸 같은 관계이다. 정의가 구현되려면 법이 잘 지켜져야 하고, 법이 잘 지켜지기 위해선 사법부가 독립적인 판단으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야 하며, 그래야 세상은 살 만하다. 국민은 살 만한 세상에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국민, 민주주의, 법, 사법권, 사법부, 안기부, 정의, 중앙정보부, 한국 현대사
  • BlogIcon T. Juli
    2016.04.29 01:37 신고

    법 집행자가 문제지요.
    시대적 오류도 많은 법
    생각하게 합니다.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만 정확히 따르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3. 30. 09:05
728x90



[서평]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표지 ⓒ문학동네


혁명. 대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피 튀기는 투쟁 끝에 독재자를 끌어내린다. 자연스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독재 정권 아래서 힘들게 살아왔던 이들이 활짝 기지개를 편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꿈 같은 현재를 즐기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혁명, 이토록 좋은 세상을 주는데 누구든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가. 


먼저,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혁명에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자신의 모든 걸 뒤로 한 채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세상을 바꾸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혁명에 동참할 사람이? 5,000만 명의 인구에서 5만 명이라도 있다면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장렬히 산화한 이들이 많다. 


어떤 방법으로든 독재자를 끌어내렸다고 하자. 그런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지? 이 독재 정권을 파괴하는 데만 해도 벅찬대 어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게 다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독재자를 끌어내려고 또 다른 독재자가 그 자리를 꽤 찰 것이다. 이 역시 역사를 들여다보면 무수히 발견할 수 있는 경우다. 


과연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체계적인 계획으로 훌륭한 민주주의 정권을 세웠다고 하자. 그렇게 하면 끝나는 걸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까? 저절로 행복한 미래가 만들어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혁명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폭력 투쟁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가


'혁명'하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는가. 체 게바라, 레닌, 마오쩌둥. 반면 간디, 넬슨 만델라, 마틴 루서 킹은? 이들은 모두 혁명의 세기인 20세기 인물들로 인류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이들이다. 다만, 앞의 세 명은 유혈이 낭자한 폭력 투쟁을, 뒤의 세 명의 비폭력 투쟁을 하였다. 그런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폭력 혁명가들이다. 그들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그들의 삶은 화려하다. 반면 비폭력 투쟁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진정한 투쟁인가? 이에 세르비아의 세계적인 비폭력 운동가 스르자 포포비치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문학동네)를 통해 비폭력 혁명을 설파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방법'을 설명하는데, 먼저 비폭력 투쟁의 모습과 특징을 보여주며 이어 비폭력 투쟁을 적용하는 실질적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먼저 저자에 대해 말하자면,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세르비아의 세계적 반독재 비폭력 운동 단체 오트포르!의 리더였으며, 비폭력 행동주의와 전략 응용 센터인 캔바스를 설립해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오트포르!'와 '캔바스'의 활동, 그리고 '직접적인 도움'과 함께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비폭력주의 운동 사례가 함께 한다. 


저자의 '강의'를 요약해보자. 먼저 이길 수 있는 작은 전투가 무엇인지, 내 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세울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싸움의 절반에 불과하고 나머지 절반은 새롭게 얻은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비전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비전에 그들이 바라는 바를 포함 시켜야 한다. 사람들에게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로소 비폭력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권력을 지탱하는 기둥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비폭력 투쟁 이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미국학자 진 샤프의 이론을 들어, 모든 정권은 몇 안 되는 기둥에 유지되며 기둥 한두 개에 압력을 가하면 체제 전체가 붕괴된다고 말한다. 모든 독재자는 경제적 기둥에 의지하며, 다름 아닌 평범한 국민들에 의해 유지된다. 즉, 평범한 국민들에 의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면 독재자는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웃음과 유머 전략, 역풍 전략을 얹어라. 


당신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제일 먼저 이야기하기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통합'이다. 운동을 하려면 언제나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2011년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을 대표적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뽑았는데, 이 운동을 엄청난 유명인들이 지지했지만 미국 내에서 매우 구체적인 특정 계층에게만 큰 호소력을 지녔다고 일침 한다. 이는 제대로 된 통합을 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러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의 야권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의 대신이다. 제발 좀 통합합시다. 더 광범위하게. 당신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비폭력주의 운동의 역사적 인물인 넬슨 만델라는 본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섰다. 그러다가 몇 번이나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이후 극단적 폭력주의자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공격을 감행했고 정부의 가장 두려운 적이 되었다. 그는 다시금 체포되어 27년 간 투옥되었는데, 노선을 완화해 다시금 비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폭력으로는 그와 국민이 누리고자 하는 미래를 성취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숫자 상으로도 비폭력 투쟁의 성공 확률이 폭력 투쟁의 성공 확률을 앞선다고 한다. 26%대 53%다. 저자는 통합, 계획, 그리고 비폭력이 성공적 투쟁의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마무리가 있다. 위에서 말했던 '혁명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라는 생각과 이어진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성과는 제대로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는 과제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승리로 간주될 수 있다는 얘기다. 원하던 목적을 이룬 순간이 언제인지 파악하고 제때에 승리를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잊으면 안 된다. '독재자 퇴진'이 끝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만 정확히 따르자


우리나라는 4.19 혁명, 부산마산 항쟁, 6.10 항쟁을 통해 우리 힘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민주화를 달성한 역사가 있다. 그 정신은 1919년 3.1 혁명으로부터 이어진, 굉장히 유서 깊은 '전통'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혁명의 깃발을 내세우고 시위에 나선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부터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그들을 지지하지만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 상당수가 특정 정당을 응원하며 선거를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낫다거나, '어쩔 수 없이' 찍고 있는 것 같다. 나부터 그러니까. 이 역시 '우리'와는 상관 없는 '그들' 만의 리그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뜻을 보태야 하겠다.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 만이라도 정확히만 따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수단의 운동 단체 기리프나의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난다', 오트포르!의 2010년 메시지 '그는 끝났다' 같은 여러 이익 단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광범위한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싸워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넬슨 만델라, 독재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민주주의, 비폭력 투쟁, 정치, 폭력, 혁명
  • BlogIcon 空空(공공)
    2016.03.30 09:21 신고

    4월 13일이 그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 BlogIcon singenv
      2016.04.12 16:48 신고

      이제 내일로 다가왔네요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 당신의 선택은? <복종>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5. 8. 28. 08:00
728x90



[서평] <복종>



소설 <복종> 표지 ⓒ문학동네


'21세기 한반도에서 제2차 한국전쟁이 벌어진다.'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현실이 아닐까 싶다. 그럴리 없다던가 전쟁이 나도 우리가 쉽게 이긴다던가 하는 말은 큰 위로가 되지 않는다. 60년 전 이미 겪었던 일이고, 그것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북한 공포증'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 때문인지 북한은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유럽에는 어떤 공포증이 존재할까.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경제 공포증'을 제외한다면 '이슬람 공포증'이 가장 클 것이다. 2015년 1월 파리와 6월 리옹에서의 테러는 그 공포증을 증대시키며 현실화시키기도 했다. 안전 지대란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이슬람을 통으로 묶어 테러리즘의 집합소로 전락시키는 건 합당하지 않지만, 이성적으로 분리하기 쉽지 않은바 '이슬람 공포증'은 단순히 테러를 넘어 이슬람의 전반적인 문화, 역사, 종교에 대한 공포로 확대된다.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슬람 공포증'이 현실로


미셸 우엘벡이라는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 '이슬람 공포증'을 현실로 옮긴 소설을 출간했다. 제목은 <복종>. 다름 아닌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는 내용이다.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슬람 정권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그들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디스토피아'인지를.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는 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현실이다. 세계를 이끌어가는 몇몇 국가 중 하나인 나라가 뭐가 아쉽다고 가장 증오해마지않는 이슬람이 중앙을 차지하게 놔두겠는가?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경제. 프랑스 또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서 결코 빗겨갈 수 없다. 경제 위기 때는 언제나 극우가 출현해 큰 인기를 얻는다. 


<복종>의 시대는 2022년 즈음인데, 대선에서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이 크게 활약한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좌파와 우파가 사이좋게(?) 나눠서 정권을 유지해왔다. 그런 체제가 깨질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에 좌파와 우파는 힘을 합쳐 극우 정당이 아닌 이슬람 정당을 밀어준다. 극우와 이슬람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선. 결과는 이슬람 정당의 승리. 폭력이 아닌 '민주주의' 형식에 의한.


이슬람 공포증의 실체는 '복종'에 있다


문제는 이 다음에 있다. 이슬람 공포증의 실체도 여기에 있다. 명백히 '민주주의' 형식에 의해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자 사회는 대대적인 변화로 요동친다. 모든 공립학교는 이슬람학교로 대체된다. 주인공 프랑스와 교수는 이슬람교로 '개종'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일부다처제가 시행되면서 여자는 가정에 전념하게 되고 이는 곧 '실업률의 감소'로 이어진다. 프랑스를 괴롭히는 이민자 문제와 테러 문제는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 해결되는 기미가 보인다. 


뭐가 문제라는 것인가? 뭐가 '이슬람 공포증'이라는 말인가? 전보다 살기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진 건 없어 보인다. 여기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 갖는 미덕이 엿보인다. 그건 바로 제목에 있다. '복종'. 복종하여 편안한 삶을 살 것인가? (남자에 한해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또 다양한 부인도 얻고. 그야말로 편안한 삶이다. 단, 자신을 버리고 완전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무신론은 있을 수 없고 이슬람이 모든 걸 판단하고 모든 것의 우위에 있는 그런 삶. 


유럽이, 기독교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이슬람. 어떻게 저리도 반대일까 할 정도의 극명한 대조의 두 종교. 역사적으로 이 두 종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해왔다. 어느 한쪽에 의한 다른 한쪽의 지배와 복종 또한 계속되어 왔다. 지금은 백중세다. 서양(기독교)의 문화적 우세(우수함이 아니다. 그냥 대세적으로 그렇단 거다.)과 이슬람의 물질적 우세.  


과연 <복종>은 '디스토피아 소설'인가?


겉으론 이렇지만, 어느 한쪽의 우세가 다른 한쪽의 우세를 잡아먹었을 때는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용인할 수 없는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디스토피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복종은 이슬람이 서양 기독교의 한복판에 들어앉았을 때를 그리고 있는 것 뿐이다. 반대가 되어도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뽑는데, 미셸 우엘벡의 <복종> 또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화적 상대성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불러야 하겠다.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부를 수 없는 것일까? 확실히 <복종>의 보편성은 확연히 떨어진다. 지극히 논쟁적인 동시에 지극히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하지만 상대성을 들이민다면 이슬람을 증오하는 것 또한 자유로운 게 아닌가. 


소설 <복종>이 출간된 날과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난 날이 같다고 한다. <샤를리 에브도>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활개를 쳐왔는데 급기야 마호메트를 건드렸다. 마호메트를 비하하는 만평을 실었고 곧바로 테러를 당한다. 샤를리 에브도의 자유에의 외침이 정답인가, 마호메트를 비하하는 자유를 누린 이를 테러한 이슬람이 잘못인가. 샤를리 에브도가 선을 넘어 지나친 짓을 한 것인가, 그에 대해 이슬람은 정당한 방위를 한 것인가. 정답이 없는 이 대립이 꺾일 때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복종 - 10점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문학동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개종, 디스토피아 소설, 미셸 우엘벡, 민주주의, 복종, 샤를리 에브도, 이슬람 공포증, 프랑스
  • BlogIcon 空空(공공)
    2015.08.28 09:41 신고

    전쟁 일어나서는 안될일입니다
    이슬람 정권도 생각하기 싫습니다 ㅋ

    • BlogIcon 조아하자
      2015.08.28 15:12 신고

      갠적으로는 기독교 이슬람 다 싫어합니다. 기독교도 이슬람 못지않게 배타적이고 다른 종교 인정 안해주는 사악한 속성의 종교지요.

    • BlogIcon singenv
      2015.09.06 17:45 신고

      흠... 언제나 논쟁이 있죠. 배타적인 종교.

  • BlogIcon 조아하자
    2015.08.28 14:50 신고

    글쎄요... 저는 대학교때 영어동아리를 간 적이 있는데 그 곳이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안했지만 알고보니까 영어를 빙자한 기독교동아리였어요. 거기서도 개종을 요구했는데 전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러면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세계 전쟁을 조장하는 종교라서 싫다 라고 이야기했었어요. 안그래도 북한때문에 우리나라 상황이 뒤숭숭한데 저 두종교마저 우리나라에서 판치면... 우리나라에서 언제 전쟁나서 또 몇조각나고 나라가 망할지 모르겠네요. 절대 아니될 일입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 이슬람 뿐 아니라 기독교세력들도 싸그리 다 없애버리고 싶어요.

  • BlogIcon 조아하자
    2015.08.28 15:11 신고

    갠적으로는 유일신을 강조하는 종교는 다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른 종교와 나아가서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행위와 같다고 보니까요.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에서 유독 전쟁이 많은(특히 유럽 말고 좀 못사는 나라들...)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의 교리 자체가 잘못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래서 기독교 이슬람 다 싫습니다.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종교는 싸그리 다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르몽드 20세기사> 20세기 역사의 민낯을 꼭 알아야 한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4. 10. 28. 07:00
728x90




[서평] <로몽드 20세기사>


<르몽드 20세기사> ⓒ휴머니스트

우리는 21세기의 1/6.5 시기를 보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 훗날 21세기를 규정할 때 이 시기는 어떻게 불릴까 자못 궁금하다. 2001년에 역사적인 9·11 테러가 있었으니, 미국에서는 테러의 시대 비슷하게 규정할지도 모른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비약적인 기술의 발달로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생활 패턴을 바꿨으니 스마트폰의 시대라 명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것은 사실 이 시대를 포괄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경제 위기의 시기는 어떨까? 그나마 가장 이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설명인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반의 시기는, 20세기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위에서 말한 테러, 과학 기술의 발달, 경제 위기까지 모두 지난 20세기에 이미 거쳤던 바 있다. 


20세기를 통틀어 전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전쟁(테러를 포함한)이 있었고, 과학 기술 전반에서 너무나 급격한 변화가 있었으며,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경제 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런 것들이 21세기 초반에 다시금 일어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21세기 초반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명제가 떠오르는데, '변화'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볼 수 있다. 점점 더 빨라지는 변화의 속도 말이다. 


20세기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태어난 책


<르몽드 20세기사>는 우연하게도 필자의 생각을 공유하며 그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즉, 21세기의 한복판인 지금 우리는 20세기와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많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20세기를 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20세기의 연장선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태어났다. 


이 책은 20세기를 4개의 시기로 나눈다. 광기의 시대(1910년대~1929년), 암흑의 시대(1930년~1945년), 적색의 시대(1945년~1970년대), 회색의 시대(1980, 90년대). 알기 쉽게 굳이 년도를 구분해 놓았지만 정확하지도 않고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 시기들은 서로 칼 같이 구분되지 않고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알면 까무러칠 사건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라는 언론관으로 유명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획 하에 만들어진 만큼 4개의 시대에 속한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한 개씩만 간략히 소개해본다. 먼저 광기의 시대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두 차례의 학살이 있었고, 20만 명과 100만 명이었다. 그 중 20세기 초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주범국에 속해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그 패배의 책임을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돌린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 주민을 시리아 사막으로 이주 시켜 약 100만 명 가량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사에 기록된 첫 대량 학살이다. 터키 정부는 이 범죄를 부정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공개적인 토론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대량 학살은 없었다. 다만 폭력 행위로 인해 30만 명이 희생되었다. 설혹 대량 학살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바로 터키를 배반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다." (본문 중에서)


암흑의 시대에는 단연 제2차 세계대전이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생각지도 못한 후원자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파시스트 정권은 반자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금에 와서 보면, 당시 승전국들인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이 모두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돈의 힘(지주, 기업가, 은행가 등)을 빌려 힘을 키워나갔고 이후 이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후하게 보상 받았다고 한다. 


적색의 시대에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을까? 역시 냉전 체제와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946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영어권 세계의 공동유산인 자유와 인권의 위대한 원칙'을 내세워 소련의 '독재'를 규탄했다. 이어 1947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은 '미국이 전 세계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의 대외 정책 노선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모순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엄연히 정반대의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호 아래 구축된 자유 세계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독재 정권에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 면면을 열거하자면 포르투갈, 도미니카공화국, 니카라과, 쿠바,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에콰도르, 온두라스,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이 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 세력을 옹호했다. 


앞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 '기억과의 전쟁'


마지막으로 회색의 시대는? 사실 이 시대의 많은 부분들이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알릴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자, 질문 하나 해본다. 나치즘이 더 나쁜가? 스탈린주의가 더 나쁜가? 딱히 누가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그러면 그냥 둘 다 똑같다고 해두자.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가 똑같다는 생각. 


미국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즘에 대항한 '같은 편'이었다. 하지만 승전 후 곧바로 백색과 적색으로 갈라진다. 이후 이들이 한 짓은 정말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백색이 승리했고, 적색은 과거의 나치즘과 다를 바 없는 족속이 된다. 와중에 전쟁 당시 소련의 적군에 맞서 싸우거나 학살 당한(또는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나치스 독일과 손을 잡았던 이들이다. 이들은 '애국'이라는 명제 아래서 나치스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회색의 시대에서 물타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련이 단순히 미국에게 졌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소련의 수많은 잘못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이용해 '기억'을 전복 시키고, '역사'를 수정하려는 행위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초중고 시절에 자주 보곤 했던 '사회과부도'를 생각나게 하는 이 책은, 단순히 한눈에 살펴보기 쉽게 그려 놓은 그림, 지도, 그래프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전혀 아니다. 글을 먼저 읽어보면 그런 그림 따위는 솔직히 전혀 눈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 글이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 충격의 이유는 일종의 두려움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구나',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수정되어 있을 수 있구나', '시간이 흐르면 나라는 사람의 역사도 손쉽게 바뀔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들. 그래도 알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천지 차이가 아닌가.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꼭 봐야 한다. 꼭 보고 20세기 역사의 민낯을 알아야 한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20세기, 광기, 나치즘, 독재, 르몽드 20세기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무솔리니, 민주주의, 백색, 스탈린주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암흑, 적색, 진실, 회색, 히틀러
  • BlogIcon 여강여호
    2014.10.28 08:55 신고

    어차피 21세기도 20세기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면
    꼭 알아야 할 과거이지 싶네요.
    르몽드에서 펴낸 책이라 더 신뢰가 갑니다.

    • BlogIcon singenv
      2014.10.28 18:16 신고

      오랜만에 좋은 책 읽은 것 같아요.
      강추입니다.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30년전 전설의 베스트셀러...다시 보니?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3. 5. 10. 18:06
728x90


[지나간 책 다시읽기] <은하영웅전설>① 여명편2011년에 <은하영웅전설 완전판>(디앤씨미디어)가 발간되어 골수팬의 향수를 자극했다. 평자는 비록 이 소설을 광적으로 접하기에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팬이라고 하기에는 어패가 있지만,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작년 말, 대선이 끝나고 새삼 이 소설이 생각났다. 이왕 읽을 거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판으로 보기를 원했고, 겨우겨우 2000년도 판 <은하영웅전설>(서울문화사)을 구하게 되었다. 

<은하영웅전설>① 여명편 표지 ⓒ 서울문화사

1편만 봐도 알 수 있는 이 책의 메시지. 누가 봐도 우주 공간 위에서 펼쳐지는 SF 공상 과학 소설에 불과하겠지만, 그 인기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1991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출간되어, 소설을 접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전제주의 대 민주주의'의 피 부르는 토론을 제공했더랬다. 우리나라가 민주화에 성공한 해가 1987년. 이 소설이 일본에서 출간된 해가 1982년. 10여년의 차이를 두고 출간된 건 아마 민주화의 시기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소설의 배경은 현재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 정세와도 꽤나 흡사하다. 인류 사회가 근본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인식 하에, 인류는 '독재'라는 이름의 극약처방으로 즉효가 나타나길 원했다. 그 결과 독재자가 출현해 거대한 제국, '은하제국'이 탄생한다. 열악한 유전자는 모조리 배제해 버리는 등의 아주 효율적인 정책으로 제국은 점점 더 발전하지만, 그로인해 배제된 사람들은 비참해진다. 결국 그들 중 참지못한 사람들이 탈출해 만든 것이 '자유행성동맹'이다. 

자유행성동맹은 은하제국의 전제주의 독재와 맞서, 민주주의를 택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오히려 스스로의 덫에 걸려 무능해지기에 이른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축 세력인 '페잔'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군주제의 은하제국이든 민주공화제의 자유행성동맹이든 결국에는 살육과 파괴의 수단 말고는 나라를 지킬 방법이 없는, 낡은 폐습에 사로잡힌 저능아들"에 불과한 것이다. 

페잔은 은하제국이나 자유행성동맹과는 달리, 무력이 아닌 경제력으로 이 둘 사이에서 미묘한 밸런스를 맞추고 있다. 그 경제력의 파워는 이 두 나라 안의 경제에 상당한 입김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치 지금 세계 경제력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듯이 말이다. (이 소설이 쓰여질 당시에는 세계 경제에서 '일본인'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제주의이지만 아주 효율적이라면? 민주주의이지만 아주 무능하다면? 이 주제를 다시 끄집어 낸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가 중요한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전제주의 독재를 실현한 박정희이기 때문이고.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무능한' 민주주의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저번 대선에서 48%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그들 민주주의 세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259쪽을 잠시 들여다본다. 은하제국의 어떤 영토를 자유행성동맹에서 빼앗고, 이에 동맹군의 선전 장교가 남아 있는 농민이나 광부들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다. 

"우리는 그대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약속한다. 이제 전제주의의 압제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다. 그대들에게는 모든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고 자유로운 시민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중략)농민 대표가 말했다. 
"정치적 권리인가 뭔가보다는 먼저 살 권리를 줬으면 좋겠구만. 식량이 없단 말야. 갓난아이를 먹일 우유도 없어. 군대가 모두 가져가 버렸다구. 자유나 평등은 나중에 주고 먼저 빵과 우유나 좀 주게."

'자유와 평등'보다 '빵'을 원하는 현재, 아니 전인류 전세대의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전제주의하이든 민주주주의하이든 무엇이 문제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민주주의였으면, 무능하지 않은 민주주의였으면 하고 바라고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유능하고 제국의 시민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은 은하제국의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이에 대항하는 자유행성동맹의 영웅 '양 웬리'. 여기서 말하는 게 무엇인가? 라인하르트의 능력과 인기는 곧 은하제국의 능력과 인기와 비례한다. 반면 양 웬리의 능력과 인기가 반드시 자유행성동맹의 능력과 인기를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무능한 자유행성동맹(민주주의)에서 유능한 영웅도 한낱 시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민중들은 이제 편안해지고 싶다. 그 바람을 누가 이뤄줄 수 있을까? 양 웬리의 아버지가 했던 말처럼 자신들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디선가 초인이나 성인이 나타나 자신들의 모든 고생을 혼자 떠맡아 주기를 바랄까? 이를 누군가가 이용해, 독재자가 출현할까? 아니면 민중들이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가며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문제를 해결하길 바랄까? 

30년 전 전설의 베스트셀러를 다시 보기 시작하며, 1권에서 느끼게 된 모순의 전말이다. 그 모순의 파노라마는 어떻게 끝날까.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민주주의, 베스트 셀러, 은하영웅전설, 전제주의, 책으로 책하다
  • BlogIcon Z9
    2013.08.23 18:35 신고

    2011년에 완전판이 출간 되었었군요. 제가 이 작품을 감상한게 15살 때였나 나이가 어려 민주주의나 전제주의 보다는 한창 전략과 전술에 관해 초점을 맞춰 재미있게 감상했었는데, 20년쯤 지난 지금 다시 감상하면 또 다른 포인트가 있겠네요.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3.08.23 21:39 신고

      지나간 책을 다시 읽을 때,
      항상 느끼는 거지요~
      다른 환경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블로그 이미지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by singenv

공지사항

  • 댓글에 대한 공지
  • [책으로 책하다 도서 목록]
  • <오마이뉴스> 서평/리뷰 송고 방침
  • 모든 이미지는 인용 목적으로 사용⋯

    최근...

  • 포스트
  • 댓글
  • 트랙백
  •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
  •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살린 그,⋯
  • 홀로 이편에서 슬픔의 나락과 절망⋯
  •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두 거대 인맥⋯
  • 역사에 길이 남을 연쇄 살인마 '요⋯
  • 더 보기
  • 감사합니다~ 시즌3를 기대하고 있⋯
    singenv ㆍ 2020
  • 재미있게 읽었어요 지금 시즌2 보⋯
    개구리 ㆍ 2020
  • 감사합니다! 맞구독합니다~
    singenv ㆍ 2020
  • 구독과 하트 누르고 갑니다 맞구독⋯
    아마추어 리뷰어 ㆍ 2020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래 전 서평⋯
    singenv ㆍ 2020

태그

  • 아포리즘
  • 소설
  • 여성
  • 제2차 세계대전
  • 재미
  • 죽음
  • 역사
  • 성장
  • 사랑
  • 전쟁
  • 넷플릭스
  • 영화
  • 현실
  • 일본
  • 인간
  • 삶
  • 피해자
  • 욕망
  • 책
  • 책으로 책하다
  • 연기
  • 천재
  • 미국
  • 만화
  • 청춘
  • 관계
  • 중국
  • 가족
  • 캐릭터
  • 희망

글 보관함


  • 2021/01
    (9)

  • 2020/12
    (13)

  • 2020/11
    (11)
«   2021/01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링크

카테고리

다양한 시선 (1412)N
신작 열전 (603)N
신작 도서 (303)
신작 영화 (300) N
넷플릭스 오리지널 (132)N
모모 큐레이터'S PICK (36)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오래된 리뷰 (202)
생각하다 (231)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그대 그리고 나 (17)
서양 음악 사조 (8)
인권 선언 문서 (4)
조선경국전 (5)
중국 영화사 개괄 (5)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카프카의 편지 (6)
팡세 다시읽기 (14)
명상록 다시읽기 (12)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감독과 배우 콤비 (10)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궁극의 리스트 (8)
제9의 예술, 만화 (14)
독립영화의 힘 (4)
생생 스포츠 (10)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첫 문장-아포리즘 (8)

카운터

Total
2,071,715
Today
59
Yesterday
164
방명록 : 관리자 : 글쓰기
singenv's Blog is powered by daumkakao
Skin info material T Mark3 by 뭐하라
favicon

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 태그
  • 링크 추가
  • 방명록

관리자 메뉴

  • 관리자 모드
  • 글쓰기
  • 다양한 시선 (1412) N
    • 신작 열전 (603) N
      • 신작 도서 (303)
      • 신작 영화 (300) N
    • 넷플릭스 오리지널 (132) N
    • 모모 큐레이터'S PICK (36)
    •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 오래된 리뷰 (202)
    • 생각하다 (231)
      •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 그대 그리고 나 (17)
      • 서양 음악 사조 (8)
      • 인권 선언 문서 (4)
      • 조선경국전 (5)
      • 중국 영화사 개괄 (5)
      •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 카프카의 편지 (6)
      • 팡세 다시읽기 (14)
      • 명상록 다시읽기 (12)
    •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 감독과 배우 콤비 (10)
      •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 궁극의 리스트 (8)
    • 제9의 예술, 만화 (14)
    • 독립영화의 힘 (4)
    • 생생 스포츠 (10)
    •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 첫 문장-아포리즘 (8)

카테고리

PC화면 보기 티스토리 Daum

티스토리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