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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2019/05'에 해당되는 글 13건

제목 날짜
  •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로제타>(4) 2019.05.31
  • 미국 대마 규제의 과거, 현재, 미래 <그래스 이즈 그리너> 2019.05.28
  • 급진적 변화에 직면한 현대인의 고민을 논하다 <논-픽션> 2019.05.24
  •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진실에 가까운 거울 <그때 그사람들>(2) 2019.05.22
  • 끔찍한 연쇄, 연계 폭력에 대항하는 '파괴' <무지개 새>(2) 2019.05.20
  • 불친절하고 불쾌하며 불편한 영화, 그럼에도? <에이프릴의 딸> 2019.05.17
  • 비루한 청년세대와 파렴치한 욕망의 기성세대 <댓글부대> 2019.05.15
  • 비장애인과 구별되는 별존재가 아닌 '약자'인 장애인 <나의 특별한 형제> 2019.05.13
  •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지는 독재와 불복종의 잔혹한 이야기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2019.05.10
  • 페미니즘이 이슈를 넘어 일상이 된 지금 이곳의 연극 <환희 물집 화상> 2019.05.08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로제타>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5. 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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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로제타>

 

 

영화 <로제타> 포스터. ⓒ찬란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들 중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 칸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이 수여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단연 '황금종려상'이다. 당연히 평생 한 번 타본 감독도 많지 않을 터, 그런 황금종려상을 두 번 이상 탄 감독들이 있다. 일명, '칸이 사랑하는 감독'이다. 이 상이 만들어진 건 1955년이지만, 그 전후로 일정 기간 '국제영화상 그랑프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때까지 합치면 총 8번이다.

 

그중 한 명이 벨기에 감독 '다르덴 형제(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1996년 <약속>으로 장편영화에 데뷔한 후 9편을 내놓을 동안 칸에서 6번 수상했다. 칸의 경쟁부문 주요 상이 '황금종려상'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 '심사위원상' '감독상' '각본상' 그리고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정도가 있는데, 다르덴 형제는 심사위원상을 제외한 모든 상을 탔다. 칸의 보기 드문 애(愛)다르덴심이다.

 

그중에서도 1999년 그들의 두 번째 장편영화 <로제타>는 특별하다. 칸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게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연스레 그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 영화가 벨기에 사회에 끼친 영향이 실질적으로 엄청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또 이뤄내고자 한 걸 정확히 행할 수 있었다.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로제타

 

로제타는 계속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영화 <로제타>의 한 장면. ⓒ찬란



공장에서 일하던 18세 로제타는 수습기간을 채우고는 쫓겨난다. 이럴 순 없다고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하소연하고 부탁하고 발악해보지만 해고 통보를 받은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당장 일을 그만두고 나와야 한다. 앞날이 막막하다. 그녀는 알코올중독자 엄마와 함께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생활한다. 헌옷을 팔고 관리인 몰래 낚시를 해서 생계를 이어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렵다.

 

수습기간을 채웠을 뿐이라 실업급여도 받기 힘들다. 여기저기 아무 데나 들어가 일자리를 청해보지만 거절당하기 일쑤다. 와플과 맥주로 끼니를 때울 뿐이다. 와플 가게 사장에게 일자리를 얻어 와플 반죽 일을 시작한다. 가게에서 일하는 리케와도 친해져 친구가 된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로제타에 얼굴에 억지웃음일지 모를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녀는 일자리를 얻었고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 반죽 일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로제타는 쫓겨난다. 사장이 본인의 못난 아들을 그 자리에 대신 앉힌 것이다. 로제타는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어떻게 3일 만에 쫓아내냐고, 아들놈보다 내가 훨씬 일을 잘한다고 하며 발악한다. 하지만 달리 방법은 없다. 당장 일을 그만두고 나가는 수밖에. 로제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핸드헬드, 클로즈업, 롱테이크 

 

영화는 핸드헬드, 클로즈업, 롱테이크 등으로 로제타의 내면을 표현한다. 영화 <로제타>의 한 장면. ⓒ찬란



영화 <로제타>는 1998년 당시 청년실업률이 50%에 육박했던 벨기에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숙달된 기술과 지식을 갖추지 않은 사회초년생 청년들은 일자리를 잡기 힘들었고 힘들고 힘들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50%의 실업률은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극중 로제타의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일자리가 생계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르덴 형제는 앞으로도 그들의 영화에 계속 쓸 영화적 기법으로 로제타의 내면을 충실히 들여다보았다. 로제타의 처절하지만 특별한 사건이랄만 한 게 없는 일상에 열중하게 만든다. 화면이 심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기법은, 로제타가 두 발로 디딘 현실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어지럽기 짝이 없어 보기가 힘들지만, 그럴수록 로제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그녀의 내면은 이보다 더 어지럽겠구나.

 

클로즈업에 이은 롱테이크는, 그런 로제타의 무표정을 비춘다. 그녀는 생계도 유지하고 엄마도 챙겨야 하는 와중에 일자리를 얻으려는 몸부림을 친다. 그야말로 치가 떨릴 정도로 어지러운 현실인데, 표정은 딱히 없는 것이다. 모든 걸 초월한 듯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다. 그녀의 속사정을 아는 만큼, 그녀의 무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이다.

 

대사를, 특히 로제타의 대사를 거의 찾을 수 없는 와중에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건 비단 영화적 기법들 덕분은 아니다. 세상에 내놓은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국내개봉에 성공한 것처럼, 20년 전 당시의 벨기에 청년과 지금 한국 청년의 상황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공감도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쉽게 좋아지지 않나 보다.

 

로제타 플랜 

 

영화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타는 등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자 벨기에 정부는 '로제타 플랜'을 가동한다. 영화 <로제타>의 한 장면. ⓒ찬란



영국의 켄 로치 감독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다르덴 형제. <로제타>는 그들의 초창기 작품인 만큼, 사회주의 성향에 기반해 상당히 투철하게 현실비판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실이라면 다름 아닌 '자본주의'가 아닐까 싶다. 오로지 개인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로제타를 보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리인으로 '기업'을 내보인다. 로제타를 쫓아내는 사장들 말이다. 하지만 그건 기업을 이끄는 오너의 개인적 마인드이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영화가 그들을 내보인 이유는, '정부'에게 그들을 컨트롤하라고 항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기업들이 이따구로 행동해서 청년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렇게 생활하고 있으니 너네가 나서라, 하고 말이다.

 

영화가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에서 보란듯이 최고 상인 황금종려상을 타면서, 벨기에의 현실이 전 세계에 알려진 마당에 정부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벨기에 정부는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시행하고 있던 청년실업대책을 더욱 강화해 2000년부터 '로제타 플랜'을 가동한다.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에겐 일자리훈련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기업에게는 일정 이상의 청년 고용을 의무화했다.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말을 현실로 옮긴 가장 정통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다르덴 형제는 지금도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으로, 어쩌면 영화를 수단으로 생각하며 영화를 찍고 있을 것이다. 다 좋은데, '로제타 플랜'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언론에 오르내리며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씁쓸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로제타 플랜만으로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 아닌 개인의 안위, 장기 아닌 단기만을 보고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건 세상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마인드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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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다르덴 형제, 로제타, 롱테이크, 모모 큐레이터, 일자리, 청년, 클로즈업, 핸드헬드, 황금종려상
  • BlogIcon 여강여호
    2019.05.31 17:37 신고

    20세기 끝자락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요즘 우리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네요.

    • BlogIcon singenv
      2019.05.31 17:40 신고

      그러게나 말이에요ㅠ 그것이 지금에 와서 개봉한 이유일 텐데, 씁쓸합니다

  • BlogIcon 컴알모옷
    2019.06.01 10:00 신고

    깊은 생각을 한번 해보게 하는 영화네요. 구독했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9.06.01 10:04 신고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구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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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마 규제의 과거, 현재, 미래 <그래스 이즈 그리너>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5.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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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그래스 이즈 그리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그래스 이즈 그리너> ⓒ넷플릭스



지난해 캐나다는 의료용으로 뿐만 아니라 식품과 음료 등 모든 형태로 대마 사용을 합법화시켰다. 미국에서도 30개 주 이상이 의료용 대마 사용을 합법화했고, 10개 주에서는 기호용 대마 판매와 사용까지 전면 합법화했다. 태국이 작년 동남아시아 최초로 의료용 대마 사용을 합법화시킨 데 이어. 한국도 올해 50여 년만에 대마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서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 목적으로 대마 성분 의약품 구입을 합법화시켰다. 


캐나다와 미국의 대마 합법화 '열풍'으로 국내외 여행객들의 국내 대마 밀반입 사례가 수백% 늘어났다는 보도가 줄을 잇기도 했다. 그야말로 대마가 전 세계의 핫이슈가 되어 가고 있다. 그것도 '대마 규제'가 아닌 '대마 규제 완화' 또는 '대마 합법화' 말이다. 한쪽에서는 승리라 자축하며 눈물을 흘리고 환호를 부르고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때맞춰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 <그래스 이즈 그리너>를 선보였다. 대마초 합법화 바람이 부는 지금, 곡절 많은 역사를 되짚는다는 설명과 함께. 사실 대마 합법화에 강력하게 찬성하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는 보고 나면 어느 정도 동조하게 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는바, 대마가 불법인 나라나 대마 합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굉장히 불쾌하고 도발적이고 위험하다 하겠다. 더불어 다분히 미국 유색인종 입장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미국의 대마 규제와 금지 그리고 인종차별


다큐멘터리는 '미국은 왜 이제서야 대마초 사용을 용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그 시작은 1930년대 재즈 뮤지션, 미국의 대마초 역사를 미국의 음악 역사와 긴밀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 재즈 뮤지션 거의 모두가 대마초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노래에도 쓰인 바, 지금까지도 쓰이는 다양한 은어를 창조해냈다. 


전 세계적으로 '대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그 이름, 힙합 전설이자 대마초 사업가로 유명한 '스눕 둑'이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터 그는 대마를 찬양하며 뮤지션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만들어낼 때 대마가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내 영혼을 꺼내 보는 느낌이죠.' 그밖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에 동조하는데, 하나같이 대마가 최고의 모습을 꺼낼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1910년 미국에 대마가 들어왔을 때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흑인과 멕시코인을 위시한 이주민들이 대거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대마'를 하는 그들이 백인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워 규제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금지화의 아버지' 해리 앤슬링어 출현한다. 그는 금주국 소속 직원에서 1930년대 마약국 수장이 되어서 전면적인 마약 금지화를 시작한다. 문제는 그가 뼛속까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 그 이면엔 온갖 음모론도 도사리고 있다. 


1937년 사실상 대마초는 금지되지만, 같은 시기 뉴욕의 라과디아 시장이 의뢰한 대마초 종합 보고서는 앤슬링어가 대마초에 대해 말한 게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의 목적은 미국인의 마약 중독을 막기 위해 대마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인종차별에 기반해 대마를 금지하는 것이라는 뜻. 즉,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대마 규제와 금지 역사엔 인종차별이라는 키워드가 반드시 언제나 함께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 문화와 연관된 미국의 대마 역사


미국 대마의 역사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깊이 연관된다. 1960년대 잭 케루악, 앨런 긴즈버그를 위시한 '비트 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트 세대는 재즈의 기풍을 문학에 녹여내어 문학적으로 창의적인 표현을 가능케 했고, 반사회와 반문화의 키워드로 누구나 행하는 대표적 불법인 대마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 이미 대마초 합법화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1970년대 초중반 리처드 닉슨과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마 금지뿐만 아니라 대마를 위시한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혁명의 시대 60년대, 자유의 시대 70년대를 지나, 억압과 규제의 시대 80년대가 도래한 것이다. 마약, 아니 대마초는 그 논란과 쟁점과 전쟁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표적은 흑인과 라틴계로 향했다고 다큐멘터리는 말하고 있다. 


그 억압과 규제를 뚫고 나온 또 하나의 저항 문화가 바로 힙합이다. 힙합과 대마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그것들을 잘 알지 못하는 누구라도 대략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을 테다. 그 사이 밥 말리를 위시한 레게도 대마와 깊은 관련이 있는 건 물론이다. 대마의 역사를, 재즈와 비트 세대와 마약과의 전쟁과 힙합의 역사와 접목시켜 알기 쉽고 흥미롭게 보여주는 건 탁월한 선택과 그에 따른 구성이었다고 본다. 


아쉬운 건, 반대 의견을 단 한 가지도 듣지 못해 형평성에 있어서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 대마초가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마초 자체로는 설혹 오히려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을 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대마초로 시작해 '진짜' 마약인 필로폰, 헤로인, 코카인 등으로 갈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하나로도 대마초의 위험성은 충분하다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그마치 15년 전에 유현이라는 저자가 <대마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내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차라리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낫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 책에서 보이는 '진실'과 '근거' 그리고 펼치는 '논리'와 '주장'이 <그래스 이즈 그리너>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다. 물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주장하고 받아들이는 주체들의 생각과 힘과 영향력 등이 모두 판이하게 다르다고 하지만, 두 콘텐츠 모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거라 보지는 않는다. 다만, 대마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과 시대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에 대한 환기를 시키는 데는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대마의 현재와 미래


<그래스 이즈 그리너>가 놓치지 않는 부분이 대마의 역사뿐만 아니라 대마의 현재와 미래이다. 이 부분이 사실 보다 충격적이었는데, 정부에서 판단하기에 합법이든 불법이든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이 피고 있는 대마초이기 때문에 그럴 바엔 차라리 수면 위로 올려 세금 장사를 하는 게 여러 모로 이득이 되는 시점에 왔다고 본 것이다. 


이는 다분히 자본주의적 생각의 발현으로, 몇십 년 동안 인종차별의 주요 방편으로 사용했던 대마 규제를 푼 게 아니라는 점이 와중의 이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발맞춰 경영자와 자산가와 기업가들이 대마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불법의 늪에 빠져 대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업에 뛰어들기는커녕 제대로 된 인생조차 살 수 없게 된 유색인종들에겐 먼 일이라는 것. 


대마는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왔다. 그 주인은 유색인종 아닌 백인일 것이 자명하다. 아니, 계급적으로 높은 사람들의 것이 될 테다. 대마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했던 '그들'은, 앞으로도 다른 식으로 대마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할 것이다. 비단 '대마'뿐일까, '마약'뿐일까 생각해본다. 규제를 통해 계급을 유지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규제를 푼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닌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도록 '그들'이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다. 결국 바뀌는 것 없을 것이기에, 너무 많이 파고 들어가고 싶어지지 아니하고 너무 많이 알고 싶어지지 아니하며 너무 많이 관여하고 싶어지지 아니하게 된다. 그것 또한 '그들'이 원하는 것일 테고,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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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 이즈 그리너, 넷플릭스, 대마초, 마약, 문화, 미국, 위험, 음악, 인종차별,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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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변화에 직면한 현대인의 고민을 논하다 <논-픽션>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5.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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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논-픽션>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명망 있는 출판사의 잘 나가는 편집장 알랭은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급격히 디지털화되는 세상에서 종이책으로는 한계가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그는 회사 디지털콘텐츠팀에 젊은 마케터 로르를 데려온다. 그녀는 곧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여 모든 게 바뀔 것을 확신한다. 알랭은 로르와 불륜 중이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는 아름다운 중년의 스타 배우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여준 드라마 ‘결탁’의 차기 시리즈에 계속 출연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다. 유명세와 돈이 뒤따를 것이 분명하지만, 감동도 없고 성취감도 없다. 그 캐릭터에 머무르고 안주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알랭의 출판사와 깊은 관계에 있는 소설가 레오나르는 자신의 사생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소설로 늘 구설수에 오른다. 그래서 유명해진 것도 있지만, 그는 모든 작가들의 창작물엔 다소간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또 주장한다. 셀레나와 레오나르는 꽤 오랜 시간 불륜 중이다. 


레오나르의 아내 발레리는 진보 쪽 국회위원의 비서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정치가 주체가 되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레오나르와 그의 친구들은 정치도 결국 돈을 벌기 위한 한 개인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실을 바꿀 수 없을 뿐더러,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를 포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말의 향연


말의 항연.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영화 <논-픽션>은 출판사 편집장 알랭, 디지털콘텐츠 마케터 로르, 스타 배우 셀레나, 소설가 레오나르, 국회위원 비서 발레리를 위시로 한 ‘말의 향연’이 주를 이룬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사무실, 거실, 카페, 음식점, 서점, 라디오 스튜디오, 별장, 야외 할 것 없이 수많은 장소에서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종류 또한 토론, 문답, 추궁, 부탁 등 다양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관통하는 스토리라인을 한마디는커녕 한 줄이나 한 문장으로 규정하기 힘들다. 불가능에 가깝다.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오직 ‘말’로만 이끌어가는 영화인만큼, 주요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주장 그리고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맥락이 잡힐 것이다. 


알랭과 셀레나 집에 초대된 이들의 대화에 실마리가 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대화는 중구난방으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고도로 약속된 대사일 것이다. 작가 한 명이 자신의 독자수보다 시시콜콜한 내용을 끼적이는 블로그 방문자수가 많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답한다. 누군가는 인터넷도 유료 콘텐츠는 존중받는다고 응수한다. 인터넷 덕분에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영화가 이후 선보일 말의 향연은 이 대화의 변주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말의 향연을 시전하는 당사자들의 고민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기도 할 테고, 그들의 암묵적인 관계가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기도 할 테다. 큰 맥락에서, 이 영화를 이끄는 건 ‘변화’와 ‘선택’이다. 


변화와 선택


변화와 선택.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현대사회의 특징 중 단연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빠름’이 아닐까. 유행과 대세는 우리를 스쳐지나갈 뿐이고, 변화와 선택은 생각이라는 걸 동반하지 않고 빠르게 대처해야 할 사항들이다. 충분한 토론은커녕 정리된 생각을 발현하는 대화도 불가능하다. 자연스레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없다. 앞날의 불확실성을 담보로 어떤 선택도 도박이 될 수밖에 없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어떤 길을 옹호하는가.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오랜 세월 종이책에 의존해온 출판사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차피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팔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현실에 안주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종이책과 전자책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여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고, 전자책으로 재편될 것을 예상하고 발 빠르게 갈아탈 준비를 하기도 한다. 


한편, 보다 개인적인 변화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이들도 있다. 재미도 감동도 성취감도 없지만 보장된 안정과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한 불안 사이의 고민 말이다. 그래도 잘할 수 있는 걸 잘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하는 게 낫지 않을까. 불확실에 몸을 맡기는 건, 비록 그것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래도 어렵다. 


이는 알랭-로르, 셀레나-레오나르 불륜 커플의 양상과도 겹친다. 그들은 불륜이라는 불확실의 영역을 더 이상 넓히려 하지 않고, 그곳으로 깊이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불륜을 ‘변화’의 양상이자 변주라고 한다면, 이들 모두 종국엔 변화 아닌 현실에의 안주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의외이자 요주의 인물이 로르인데, 그녀는 현실에의 안주가 아닌 급진적 변화를 주장한다. 그런 그녀인데 현실에의 안주 양상을 보인다고? 그럴 수는 없다. 이 영화가 대단한 측면이 여기에서 보이는데, 알랭에게는 현실에의 안주이지만 로르한테는 극중 대사이기도 한 ‘아무것도 안 변하려면 모든 게 변해야 한다’는 개념의 양상인 것이다. 진보와 보수, 변화와 안주는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며 서로가 서로를 향한다. 


현대인의 자세


현대인의 자세. 영화 <논픽션>의 한 장면. ⓒ(주)트리플픽쳐스



종이책과 전자책의 양상이라는, 영화 속 변화와 선택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를 현실로 가져와 들여다보자. 미래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현재 우리나라는 여전히 전자책보다 종이책 수요가 압도적이다. 전자책유통업체는 5곳에 불과하다. 콘텐츠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넷플릭스의 출현과 더불어, 전자책 시장에도 ‘구독경제’ 시스템이 불고 있기에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은 ‘공존’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논-픽션>은 현재의 이런 공존 상황을 말의 향연으로 공유하고 인물들의 관계로 보여준다. 제목으로도 암시하고 있는데, 프랑스어 원제인 ‘Double vies’는 이중생활‘이라는 뜻으로 양립과 공존과 경계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 이는 곧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영어 원제이자 한국어 제목인 ‘Non-Fiction’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Nonfiction’에서 Non과 fiction 사이에 대시(-)를 넣어 구분을 지었다. 이 역시 허구(Fiction)와 허구 아닌 것(Non-Fiction)의 양립과 공존과 경계 등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얽히기 싫은 불확실한 미래 상황은 일단 그냥 두고 보자고 말한다. 알랭이 로르에게 말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겨울빛> 속 목사의 모습이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교회에서 홀로 목회를 하는 목사야말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지금 이 시대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올리비에 아샤야스 감독은 텅 빈 교회의 목사 같은 자세를 취하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가 관찰한 결과 현대사회 현대인의 자세가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내 모습을 반추해본다. 어떠한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가? 100에 99는 ‘아직은...’ ‘두고 보자’ 하며 상황이 획기적으로 변할 때까지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세는 인간의 오래된 관습에서 비롯된다. 100에 99가 그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극중 대사이기도 한 ‘관습과 기준을 넘어선 인간의 재발견이 디지털의 과제다’라는 개념화가 뇌리에 꽂혔다. 디지털은 인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인간은 디지털 세상에서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대사는 다분히 디지털이 주체적이지만, 나는 다분히 인간이 주체적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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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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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진실에 가까운 거울 <그때 그사람들>

오래된 리뷰 2019. 5.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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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그때 그사람들>


영화 <그때 그사람들> 포스터. ⓒMK픽처스



80년대부터 스탭으로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임상수 감독,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바람난 가족> <하녀> <돈의 맛> 등을 통해 풍자 가득한 한국형 블랙코미디의 한 장을 장식했다. 하지만 2016년부턴 영화계에서 잘 볼 수 없다. 


그중 4번째 작품 <그때 그사람들>은 큰 논란거리를 던진 한편, 임상수의 초기작 이후 마지막으로 잘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성도덕 비틀기를 정치 역사 실화로 가져가 '높으신 분들'의 건드리는데, 모자랄 것 없이 훌륭히 해냈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총으로 쏴죽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박흥주 수행대령, 박선호 의전과장 등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픽션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또 그 지점이 이 영화의 재미요소이다. 


1979년 10월 26일


1979년 10월 26일 그때 그 사건.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박정희, 그가 군사쿠데타 이후 18년째 권력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간단히' 진압해버린다. 시민들은 한껏 움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는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 대통령 각하와 김 중앙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과 양 비서실장이 자리를 함께 한다. 대통령 각하의 푸념에 양 실장은 비위를 맞추고 차 실장은 핏대를 세우며 김 부장은 조용히 있을 뿐이다. 이 자리의 주타겟은 김 부장, 이전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쓰는 그를 향해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이 강하게 할 것을 밀어붙인다. 


안 그래도 헬기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 각하의 옆자리에 앉지 못하고 술자리에서도 차 실장이 2인자 노릇을 해대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쌓인 게 아니다. 이내 그는 민 대령과 주 과장을 불러 거사를 명령한다. 자신이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을 쏘는 즉시 각각 경호실장과 경호팀을 제거하라고 말이다. 계획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된다. 그러곤 김 부장과 민 대령은 마침 저녁을 먹고 있었던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차를 타고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향한다. 김 부장은 왜 그랬을까.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


당대를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하루를 다룬다. 그 사건을 전후로 한 준비(?) 과정과 처리(?) 과정 말이다. 하지만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면, 준비나 처리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실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김 부장은 아무런 준비 없이 당일 당시에 부하들에게 거사를 명령하고 부하들은 아무 생각없이 따를 뿐이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못될 시 어떻게 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모양새이다. 


김재규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 한몸 희생한 영웅적인 일이라든지 시민들에 의해 정당한 방법으로 쟁취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든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권력을 찬탈하려다 실패한 것뿐이라든지 말이다. 이 영화는 당대를 비추되, 하루의 한 장소에 집약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조명함으로써 감독과 각본을 맡은 임상수만의 시선으로 보았다. 


임상수의 눈엔 그놈이 그놈이다. 민주주의를 '폭압적으로' 제압하자는 대통령 각하와 차 실장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혁명'을 했다고 하지만 역시 '유화적으로' 제압해왔던 김 부장과 부하들이나, 이저저도 아닌 빈 껍데기 '술상무'일 뿐인 양 실장이나, 모두 그 자리에서 당대를 정확하게 그래서 치욕스럽게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디테일하게 들어가보면, 여대생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잠드는 대통령 각하나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총에 맞아 손가락이 날라가자 화장실로 숨지 않나 비서실장이라는 작자는 총에 맞지도 않았는데 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질 않나. 김 부장은 준비도 하지 않고 거사를 치르곤, 처리하는 과정도 전혀 '프로'답지 못하다. 거사를 치르고 난 후부터 한순간도 빠짐없이 오판에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는 것이다. 답답할 노릇. 


진실에 가까운


영화는 진실에 가깝게 그때 그곳의 그사람들을 그린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MK픽처스



결국, 그때 그사람들은 단 한 명도 '쓸모 있지' 않았다.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임상수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이보다 더 '비웃길 수 없을' 정도로 국가를 말 한 마디, 손짓과 턱짓 한 번에 좌지우지했던 그때 그사람들을 그리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과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도 생각할 정도이다. 


권력은 만들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고 겉으로나마 따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권위는 만들 수 있고 손에 쥘 수 있지만 따르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때 그사람들의 권력이란 무소불위였을지 모르지만, 권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을지 않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권력이 무엇이고 권위가 무엇인지. 또 권력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권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영화는 사실, 그다지 재밌진 않다. 인간군상을 그려내고자 다양한 캐릭터들의 디테일한 부분이 소소한 웃음을 주지만, 대체적으로 사건의 앞뒤 과정이 지루하긴 하다. 특히 후반부에서 시선이 급격히 분산되면서 현미경 들여다보듯 세밀한 초점도 흐려지고 자연스레 재미도 반감된다. 의미도 있고 논란도 많아 생각할 거리도 다양하지만, 영화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너무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외국 영화들은 정치역사 실화를 가져와 다큐멘터리로도 영화로도 자못 훌륭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라는 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인데, 우리나라에선 많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못하는 것일 테다. 관심 없는 대중이 먼저인지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창작자가 먼저인지, 그럼에도 언제나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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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1026, 그때 그사람들, 김재규, 민주주의, 박정희, 블랙코미디, 인간군상, 혁명
  • BlogIcon 여강여호
    2019.05.22 13:19 신고

    한국 근현대사만큼 전세계적으로 내부 논란이 많은 나라가 있을까 싶습니다. 친일과 독재의 역사가 왜 논란이 되는지...청산을 못하는 우리 문화 때문이지 싶기도 하고....박정희 관련 영화 리뷰를 보고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 BlogIcon singenv
      2019.05.22 13:20 신고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도 말 하지도 못하는 게 참담해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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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연쇄, 연계 폭력에 대항하는 '파괴' <무지개 새>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9. 5.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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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메도루마 슌 장편소설 <무지개 새>


메도루마 슌의 <무지개 새> 표지. ⓒ아시아



1995년 9월 4일, 오키나와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 해병대원 2명과 미 해군 1명이 12세 여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것. 미일지위협정으로 미군 셋의 신병은 인도되지 않는다. 오키나와 미병 소녀 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억눌려 있던 반미, 반기지 감정이 폭발한다. 


이 사건으로 반미군기지 운동이 전개되어 후텐마 기지의 현외 이설이 현실화되는 듯싶었는데, 미봉책으로 남부의 기지를 북부로 옮기는 헤노코 신기지 건설이 강행된다. 오키나와 북부 출신의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메도루마 슌은 작가가 아니라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을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데, 1995년의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중차별의 정치적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1995년 전까지 메도루마는 일본과 오키나와에 대한 중단편소설을 주로 썼는데, 1995년 사건 이후로 미군기지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지개 새>는 이런 자장 하에서 쓴 메도루마의 첫 장편소설이다. 1998년부터 쓰기 시작해 2006년에 내놓았다. 이 사건은 내년이면 발발 25주년이 되지만, 그로 인해 촉발된 헤노코 신기지 반대 운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시아 출판사는 오키나와가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며 유명 관광지가 되어 가는 지금, 25년 전 충격적 사건을 다시 불러낸 소설 <무지개 새>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에 의한 절망을 오키나와 내외부로 수렴하는 현실을 그린 소설은 전체적으로 '끔찍'하다. 소설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쉽게 읽히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와 원한을 들어보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폭력과 미군으로 향하는 분노와 원한


소설의 주인공은 조직폭력배 일원 가쓰야와 그가 관리하는 성노예 미성년자 마유이다. 가쓰야는 마유같은 소녀를 이용해 성매매를 한 남자의 사진을 찍고 그걸 미끼로 돈을 뜯어내 보스 히가에게 상납한다. 어느 날 마유는 매춘 현장에서 자신의 성을 산 남자를 상대로 잔혹하고 엽기적 방식으로 성폭력을 가하곤 몸져 눕는다. 


가쓰야는 마유를 버리고 새로운 성노예를 이용해 돈을 뜯어 상납해야 하지만, 마유를 보살피는 한편 엄마한테 돈을 빌려 상납한다. 하지만 마유가 회복해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는 한 히가에게 들키는 건 시간 문제, 가쓰야가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와중에 오키나와는 미군병사가 북부에서 벌인 소녀 성폭행 사건을 규탄하는 데모가 한창이다. 하지만 마유 같은 이를 구해내진 못한다. 


소설은 폭력과 범죄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탈피하려면 절대적 피해자에 의한 파괴밖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즉, 다른 누구도 아닌 마유 본인에 의해서 말이다. 마유는 오키나와에 응집된 분노와 원한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듯한대, 그렇다면 가쓰야는 오키나와 자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노와 원한은 오키나와가 아닌 폭력이라는 추상과 미군이라는 구체로 향한다.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오키나와


견고하게 연쇄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의 추상과 구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파괴'와 '신생(新生)'을 제시한 이 소설, 다분히 현실적으로 오키나와의 진짜 현 상황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다. 하지만 다(多) 층위가 존재하고 각각으로 수렴한다. 이 소설에서 층위라 하면 폭력의 층위를 들 수밖에 없는데, 학교폭력과 성매매 유착 폭력, 전쟁 폭력 등이 그것이다. 


학교폭력의 피해자 가쓰야는 성매매 유착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그 피해자인 마유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이 연계된 폭력은 정점에 서 있는 히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 모두도 미군과 일본이라는 공동정범 가해자에 의해 영원히 피해 받을 거대 피해자 집단의 오키나와 일원이다. 이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촘촘히 짜인 구조적 폭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견고하다. 저자가 말하는 파괴의 방식은 참으로 저열하고 또 절망적이지만 다른 방도는 없다. 


메도루마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거니와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오키나와 미병 소녀 폭행 사건은, '1995년 오키나라'라고만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선 미선이 '사고'을 떠올리게 한다. 우발적 사고라는 이유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고발된 미군 책임자 여섯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신병이 인도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촛불집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이후 시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불거질 때면 자발적으로 참여해 비폭력평화시위를 시행했다. 14년 후 촛불집회는 우리나라를 바꿨다. 우리나라는 비폭력 구조로 이루어진 살기 좋은 나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반면, <무지개 새>에서 비폭력시위나 데모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오키나와 폭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히가와 가쓰야 일당조차 인지하고 있는 방법이다. 그들은 미군과 일본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훨씬 더 추악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식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방법은, 사실 무수히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또 멋대로 이해해 버려도 할 말은 없다. 그럼에도 그 방법을 고수하고 밀어부치는 이유는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폭력 근절과 평화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저자의 염원이 그만큼 지독한 저항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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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메도루마 슌, 무지개 새, 미군, 오키나와, 일본, 파괴, 폭력
  • BlogIcon 여강여호
    2019.05.20 17:17 신고

    소설에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까지 같이 보이네요...

    • BlogIcon singenv
      2019.05.22 13:20 신고

      섬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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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고 불쾌하며 불편한 영화, 그럼에도? <에이프릴의 딸>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5.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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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에이프릴의 딸> 


영화 <에이프릴의 딸>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우리나라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적으로 유망한 감독들이 많다. 그들은 주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 이름과 얼굴과 필모를 알리는 경우가 많은데, 멕시코의 젊은 거장 후보인 미셸 프랑코 감독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녀 뒤에서 빛나고 있는 멕시코라는 '후광'이 한 몫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겠는데, 지금 현재 전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는 '멕시코의 세 친구들' 알폰소 쿠아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 세 명의 거장이 구축한 각각의 독특하고 확고한 작품 세계를 씨네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사랑해 마지 않게 된 이유를 '멕시코'라는 공통분모로 굳이 생각해 볼 때, 미셸 프랑코 감독을 향해 기대의 시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것뿐이라면 기대와 달리 실망을 하게 되더라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데뷔작부터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었고 이후 내놓은 모든 작품(3 작품)이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영화제 칸이 총애하는 차기 거장임에 틀림없다.

 

<애프터 루시아>가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크로닉>이 각본상을, 그리고 최신작 <에이프릴의 딸>이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것. 연출과 각본은 물론 편집, 프로듀서, 제작에까지 관여하는 그녀를 만능영화인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 세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모두 개봉되었는데, 아무리 출중해도 제3세계 영화는 흥행에 큰 제약이 따르기에 잘 수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멕시코 영화 전성기라는 시대 조류가 뒤따른 것일까, 그녀의 영화들이 너무나도 좋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녀의 영화를 접하는 우리는 좋다.

 

엄마 에이프릴과 딸들

 

영화 <에이프릴의 딸>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심심하게 시작해 파격적으로 끝난다. 후반부 내내 계속되는 연속적인 파격을 소개할 순 없으니 전반부를 들여다보도록 한다. 임신한 10대 발레리아와 언니 클라라는 함께 살고 있다. 클라라가 인쇄소를 운영하며 나름 안정적으로 지내는 그들이다. 그들은 발레리아의 임신 사실을 엄마에게 숨겼는데, 임신 7개월이 지나 클라라가 엄마에게 알린다. 엄마 에이프릴은 그들을 찾아오고, 아주 반가운 듯 해후한다. 곧 카렌이 태어난다. 에이프릴의 손녀이자 발레리아의 딸이다. 

 

카렌의 아빠는 17살에 불과한 마테오다. 에이프릴도 클라라를 낳았을 당시 10대 후반에 불과한 나이였다. 에이프릴은 발레리아가 아닌 마테오와 그때 그 심정을 공유한다. 에이프릴과 발레리아와 마테오는 따로 또 같이 카렌을 돌본다. 에이프릴은 카렌을 향해 ‘우리 예쁜 아기’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만큼 애정을 듬뿍 쏟는 듯하다. 자신도 제대로 건사하고 컨트롤하기 힘든 10대 발레리아와 마테오가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 에이프릴이 대신한다.

 

어느 날 갑자기 에이프릴은 발레리아와 마테오 동의 없이 마테오 부모와의 합의를 통해 카렌을 입양 보낸다. 당연히 발레리아는 에이프릴을 멀리한다. 고소하려고도 한다. 마테오는 어쩌질 못해할 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에이프릴은 카렌을 입양 보낸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의 집에 맡겨놓은 게 아닌가? 그러곤 마테오한테만 그 사실을 알린다.

 

한편, 에이프릴은 클라라에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뚱뚱해진 그녀가 살을 뺄 수 있게 강제할 뿐이다. 사실, 발레리아에게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건 매한가지다. 그녀가 미성년의 나이에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말이다. 클라라의 아빠와 발레리아의 아빠가 다르다고도 하는데, 에이프릴의 과거와 정체가 궁금해진다.

 

불친절한 영화

 

영화 <에이프릴의 딸>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영화 <에이프릴의 딸>은 에이프릴의 ‘딸’이 아닌 ‘에이프릴’이 주인공이다. 그녀가 발레리아에게 저지르는 갑작스런 엽기 행각이 이상하고 또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우린 그녀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그녀는 왜 딸에게 그런 것일까. 왜 클라라와 발레리아에게 그런 게 아니라 발레리아에게만 그런 것일까.

 

에이프릴의 행동 대상이 발레리아에 있지 않다고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 영화가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느낄 만한 대목인데, 에이프릴의 현재 그것도 본인이 사는 지역이나 집이 아닌 딸이 사는 곳에 와 있는 지금에서 단편적으로 지나가는 단서들로만 그녀의 과거와 사연과 정체를 유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두 명의 다른 남자에게서 두 딸을 낳았고, 그들뿐 아니라 딸들과도 좋은 관계에 있는 것 같진 않다. 또한 별 다른 직업을 두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위와 같이 유추한 사실을 종합해 다시금 유추해 볼 수 있는 건, 에이프릴은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고 지금도 욕망을 분출할 의향이 있으며 그 대상의 범위가 굉장히 넓다는 것이다. 딸과 손녀를 향한 모성을 뛰어 넘는 욕망이 다름 아닌 마테오를 향하고 있다고 해도, 너무 충격을 받거나 분노를 행하거나 구역질을 느끼지 않도록 하자. 사실, 영화는 굉장히 느리고 무심하고 담담하게 진행되지만 충격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에이프릴의 욕망 충실한 행동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들여다볼 요지는 있다. 에이프릴 앞에 ‘여자’라는 수식어를 두어 ‘모성보다 욕망에 충실한 여자’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겠고, 인류의 태곳적 신화 이야기 중 하나인 ‘부모와 자식 간의 경쟁’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겠으며, 불완전한 한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저지름 또는 사이코패스의 완전한 통제 하 전략적인 작전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해하기도 싫은 더럽고 추잡한 이야기라고 한마디로 상정해버려도 할 말은 없을 정도이다.

 

불편한 영화

 

영화 <에이프릴의 딸>의 한 장면. ⓒ(주)엣나인필름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해하기 싫은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은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동서고금 이보다 더 추잡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우리를 사로잡았고 사로잡고 있으며 사로잡을 게 분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를 들여다보면 어떨까. 그렇게밖에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심정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과 맞닿아 있는 신화를 가지고 오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의 의미가 있는 영화인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보는 내내 굉장히 불편하기도 했다. 주지했듯 영화적으로 매우 불친절했기에 끊임없이 이면을 들여다봐야 했던 점도 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고 해석을 하려 하면 할수록 불편했다. 영화를 차지하는 상당히 많은 장면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말없이 차를 타고 가는 뒷모습인데, 답답함과 불안함의 불쾌한 뒤섞임이 영화 전체로 퍼지는 걸 목격하게 된다. 물론 이런 느낌의 영화를 즐기는 이도 많을 테고 이런 느낌이 영화를 보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기에, 취향의 문제이겠다.

 

영화를 보고, 영화에서 헤어 나와, 영화를 통해 2차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그런 영화를 즐기고 또 그런 영화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에이프릴의 딸>은 영화를 보고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영화 밖으로 나가 영화를 통해 생각하지 못하고 영화 안에서 돌고 돌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다분히 취향의 문제로, 오롯이 영화에 천착하는 것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진정한 방법일 수 있다.

 

<에이프릴의 딸>은 어떤 영화일까. 누구한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 알고서 보고 그저 즐기기도 힘들고 나를 돌아보며 여러 생각을 하기도 싫다. 현실적으로 공감할 만한 요소가 있지도 않다. 다만, ‘인간’으로서 깊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져보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불편하고 불쾌했던 역설적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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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청년세대와 파렴치한 욕망의 기성세대 <댓글부대>

생각하다 2019. 5.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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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댓글부대>


연극 <댓글부대> 포스터. ⓒ극단 바바서커스



공대 출신의, 사회부·정치부·산업부 기자로 잔뼈가 굵어가는 와중에, 메이저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해 단숨에 한국문학의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선 장강명. 그는 기자 특유의 취재력을 바탕으로 현장감 있고 정확한 문체와 거침없이 핵심을 파고드는 구성 능력을 바탕으로 누구도 지나치기 힘든 현실 감각 투철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느덧 데뷔 10년에 가까워 오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기다려지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지난 2015년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해임에 분명하다. 2011년 <표백>으로 등단하고선, 2015년까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물론, 이후의 인기에 비해서 말이다. 2015년 장강명은 3권의 소설책을 내놓는다. 그것도 중장편으로, 그중 2권이 문학상 수상작이다. 모두 흥행했고 장강명은 한국문학이 가장 주목하는 작가가 되었다. <댓글부대>도 그때 내놓은 소설이다. 


데뷔 5년도 되지 않았지만 자그마치 6번째 장편소설이었던 <댓글부대>, 그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는지 또 풀어내고 싶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목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는 소설 <댓글부대>는, 출간 2년 만인 2017년 연극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호평을 받으며  2018년에도, 2019년에도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선 연극 <댓글부대>의 대략적 내용을 훑어본다. 


2세대 댓글부대


온라인 마케팅업체 '팀-알렙'은 이십대 청년 세 명 '삼궁' '찻탓캇' '01査10'으로 이루어져 기업 상품평과 가짜 유학 후기 등을 지어내며 용돈을 벌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유흥업소나 드나들 뿐이었다. 어느 날 삼웨이 생산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죽은 노동자를 다룬 영화가 개봉하자 회사 측이 고용한 홍보업체에서 일이 들어온다. 영화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나게 해달라는 의뢰였다. 하지만, 팀-알렙은 이 방법이 먹히지 않을 거라 판단해 역제안을 한다. 노동자 인권을 다룬 영화사가 오히려 스태프를 착취했다는 루머를 퍼뜨리자는 것. 


하지만 삼웨이는 팀-알렙의 역제안을 거절한다. 그때 '합포회'라는 단체가 나타나 일을 성사시킨다. 팀-알렙의 작전은 대성공, 영화는 흥행에서 실패한다. 세 청년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확고히 하는 와중에, 합포회를 이끄는 '이철수'라는 인물은 그들에게 현금으로 돈다발을 안기며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을 맡긴다.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주요 커뮤니티를 무력화시키라는 것. 


한편, 찻탓캇은 팀-알렙의 리더격인 삼궁의 과도한 생각과 행동에 불만을 품고 진보 성향 신세계일보의 잘 나가는 기자 임소진에게 자신들이 한 일을 폭로한다. 이에 신세계일보는 2012년 대통령 선거 이후 2세대 댓글부대의 실체를 터뜨릴 특종에 더욱 골몰한다. 팀-알렙과 합포회가 작당해 한 일들은 한국 사회에 어떤 파란을 몰고 올까. 찻탓캇과 신세계일보의 폭로 또한 어떤 파란을 몰고 올 것인가. 


비루한 청년세대의 서글픈 자화상


연극 <댓글부대>는 빠르고 거침없고 정곡을 찌르는 현실극인 원작 <댓글부대>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대신, 연극이라는 장르로 바꾸며 연극만이 가지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다.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뮤지컬이 생각나게 하는 무대장치와 무대방식을 취급해 액션이 없다시피 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원작을 보완했다. 


원작이나 연극이나, '국정원 댓글부대'를 부각시켜 한껏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 이면의 치열하고 치졸한 뒷이야기를 들춰내는 이야기일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품은 그 이후의 댓글부대를 다룬다. 작가가 지명한 '2세대 댓글부대'인 이들은 팀-알렙으로 대표되는데, 보다 '능구렁이' 같이 작전을 짠다. 어느 한 업체나 콘텐츠나 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시대와 사회와 세대를 뿌리부터 바꾸거나 흔들 수 있는 작전을 행하는 것이다. 


작전을 행하는 실무자는 다름 아닌 자타공인 실패한 청년들이다. 그들은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며 여자를 모두 '김치녀'라고 비하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삶이 아닌 자신들이 우위에 서 있는 줄 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이 이 청년들을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손으로 당장 만질 수 있는 많은 돈을 쥐여주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면서 말이다. 이런 면면들의 밑바닥 끝까지 보여주려 하는 이 작품을, '비루한 청년세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한편, 연극의 톤 앤 매너는 호불호가 갈릴 만했다. 누구나에게 시간을 '순삭'할 정도의 강렬함과 충격을 줄 만한대, 누군가한테는 수위 조절을 실패해 불쾌감으로 남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한테는 가장 재미있었던 연극으로 남았을 테다. 필자에게는 전자와 후자가 함께 다가왔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가장 재미있게 본 연극인 건 맞지만,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아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욕망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건 작품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욕망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옳게 바꾸겠다는(사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겠다는 또는 유지하겠다는) 미명 아래 자신들이 당하고 행했던 짓을 청년세대에게 그대로 하게 만든다. 청년세대는 그 짓을 자라나는 새싹들을 상대로 저지르는 것이다. 


작품은 이 짓거리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보수를 통칭하는 듯한 합포회나 진보를 통칭하는 듯한 신세계일보나 비슷하다. 또한 보수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팀-알렙이나 유력 진보 커뮤니티들도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게 아닌가 싶다. 보수가 진보를 공격한 것이고, 공격 작전으로 빈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빈틈이 하필이면 보수나 진보나 매한가지일 수 있는 것들이었고, '똑똑한' 진보들은 자기 함정에 빠져버렸다. 여기서 논쟁을 끌고 가면 끌고 갈수록 난장판이 되어버리며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 또한 보수가 원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진보가 빈틈없이 똘똘 뭉치면? 그 또한 보수가 원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독재체제라고 몰아붙일 수 있지 않은가. 


보수가 옳으냐 진보가 옳으냐는 애초에 잘못된 물음이다. 보수도 옳을 수 있고 진보도 옳을 수 있다. 물론 그를 수도 있다. 문제는, 보수나 진보가 행하고 향하는 길이 옳은지 그른지이다. 미시적으로 거시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며 철저히 따져야 한다. 그저 한통속으로 몰아서 통째로 구렁텅이로 보내버리는 게 또는 그렇게 보이도록 비춰지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이 작품의 이야기가, 또 작품 속 찻탓캇의 폭로가 '사실'은 아닐 것이다. 물론 사실이 섞여 있거나 사실을 바탕으로 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실'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암약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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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과 구별되는 별존재가 아닌 '약자'인 장애인 <나의 특별한 형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5. 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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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특별한 형제>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포스터. ⓒNEW 



어려서 당한 사고로 얼굴 아래로 전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 세하는 엄마를 잃고 아빠에게서 버려져 장애인보호시설 '책임의집'로 온다. 그곳에 엄마에게서 버려진 지적장애인 동구가 있었다. 그는 5살 정도의 지능을 지녔는데, 수영을 좋아하고 또 기똥차게 잘했다. 세하가 물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동구가 구해준 걸 계기로 그들은 특별한 '형제'가 된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20년 뒤 책임의집을 이끌던 박 신부가 돌아가시자 지원금이 끊겨 폐쇄될 위기에 처한다. 세하와 동구는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모두를 지켜내기 위해 세하는 돈을 받고 자원봉사시간 인증을 해주는 자못 파렴치한 활동을 서슴지 않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 우연한 기회에 구청 수영장에서 열린 사회인 수영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게된 동구, 세하는 이 기회를 발판삼아 상금과 더불어 후원금을 조달하고자 한다. 


평소 안면이 있던 구청 수영장 알바생 미현과 자원봉사, 코치경력 거래를 한다. 동구를 훈련시켜 주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자립의 조건을 충족시켜 나가던 그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구의 엄마 정순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구를 데려가겠다고 나선다. 당연히 세하는 버릴 땐 언제고 이제 나타나 데려가겠다는 것이냐고 맞선다. 다시 한 번 헤어질 위기에 처한 세하와 동구, 어떻게 될까?


괜찮은 관객 만족도와 전문가 평가


관객 만족도와 전문가 평가에서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한 장면. ⓒNEW 



영화 <어벤저스: 엔드 게임>이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흥행 신기록을 모조리 새로 작성하고 있던 최고조의 2주차에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가 용감하게 출격했다.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먼 저예산 코미디이기에 굉장히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보이는데, <어벤저스>로 쏠린 시선과 피로감 그리고 전혀 다른 장르의 신선함 등의 반사이익을 기대했을 것이다. 


결과는 성공, 아니 대성공. 이 영화와 비슷비슷한 사이즈와 이야깃거리를 장착한 영화들이 늘어서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돋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지금 이 영화는 <어벤저스>에 버금가는 관객 만족도와 나쁘지 않은 전문가 평가에 힘입어 작품 자체가 갖는 착하고 행복한 이미지가 좋게 부각됐다. 100만 명이 넘는 흥행을 이끌었고 지금도 쾌속 중이다. 


육상효 감독이 <방가? 방가!>를 통해 주었던 소외되고 약한 존재의 주체적 휴머니즘과 웃음이 다방면에서 발전되어 나타났다. 감독의 오래된 영화 철학과 그에 따른 고민이 집약적으로 나타나기도 한 바, 한국 코미디 영화 역사에 획을 그었다거나 계보를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정도라면 언제든 그의 영화를 찾을 관객은 많을 것이 분명하다. 


장애인의 독립화 주체화 구체화


영화는 장애인의 독립화 주체화 구체화를 꾀했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한 장면. ⓒNEW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와 큰 인기를 끈 한국영화들이 많다. 1000만 명을 넘긴 <7번방의 선물>이 대표적이고, 200만 명과 300만 명과 400만 명을 넘긴 <맨발의 기봉이> <그것만이 내 세상> <말아톤>도 생각난다. 설경구와 문소리의 신들린 연기를 볼 수 있었던 문제작 <오아시스>도 있다. 외국영화는 훨씬 오래된 대표작들이 있다. <레인맨> <여인의 향기> <포레스트 검프> <길버트 그레이프> <제8요일> <언터처블: 1%의 우정> 등 주로 90년대 선보였던 명작의 대명사들이다. 


주지한 한국영화들과 외국영화들의 차이점이 눈에 띌 것이다.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똑같을지 모르지만, 한국영화는 장애인을 대상화 객체화 수단화시키는 반면 외국영화는 장애인을 독립화 주체화 구체화시킨다. 그런 면에서 <나의 특별한 형제>는 한국 장애인 영화의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게 아니라, 주인공이 장애인일 뿐이다. 


영화는 장애인을 자기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로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들을 그저 지켜줘야 할 존재로 보이지 않게, 비장애인과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가 아니게, 연민 또는 웃음 또는 슬픔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한다. 육상효 감독의 조심스럽고 사려깊은 시선이 건강한 휴먼 코미디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세하와 동구뿐만 아니라 미현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비장애인이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단기알바생인 그녀는, 그들을 대상화시키지 않는다. 그들을 같은 세계에 사는 조금 다른 존재로 대한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나아가 영화는 그들 셋을 한데 모아 '약자'로 포진시킨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구별되는 별(別)존재가 아닌, 약자로 수렴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개념이겠지만,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그러지 않았다는 걸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족의 의미


비루한 청년세대와 가족의 의미도 현실적으로 그렸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한 장면. ⓒNEW 



영화는 지금 이곳의 이슈성 있는 현실을 옮겨 놓아 나름의 답을 내놓기도 한다. 주지했듯 세하와 동구를 통해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미현을 통해 비루한 청년세대의 각박해질 뿐인 현실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영화 중후반부 가장 중심되는 이야기인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동구를 버리고 갔던 엄마 정순이 20여 년만에 나타나 동구를 데리고 가려는 것. 


정순은 여전히 동구의 합법적 부모다. 동구와 함께 살 권리가 있다. 하지만 동구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살아왔다. 태반을 세하와 살아왔다. 물론, 동구는 움직일 수 없는 세하의 모든 것을 뒤바라지해왔다. 같이 사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한다. 누구와 사는 게 동구를 위한 길이고, 동구는 누구와 살길 원하는가. 


5살 지능을 가진 동구이지만 법적으론 성년이기에 선택은 오롯이 동구의 몫이지만, 적어도 영화는 정순 아닌 세하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은 하늘이 내린 천륜이 아닌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걸 말이다. 시대에 조응하면서도 시대에 편승하지 않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서로 보살피는 약자 세하와 동구 그리고 미현의 사례에 편승시키는 데 쓰였다. 영화의 영어 제목인 'INSEPARABLE BROS' 즉, '갈라놓을 수 없는 형제'를 보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특별한 형제>는 앞으로 한국영화에서 장애인을 다룰 때 중요한 레퍼런스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많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는 동시에 고민할 게 늘 것이다. 흥행이 보장되다시피 했던 장애인 영화이지만, 예민하고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었으며, 이 영화 이후로는 거기에 더해 장르융합에 따른 작품성도 유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층 더 재미있고 의미있고 감동적이고 영리한 영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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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지는 독재와 불복종의 잔혹한 이야기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5.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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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포스터. ⓒ디스테이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최고작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상 '판의 미로')가 13년 만에 재개봉했다. 2006년 국내 개봉 당시, '기이한 판타지'라는 단어를 앞세워 어른들 아닌 아이들을 공략하는 오판 마케팅으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었다. 영화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판의 미로>가 21세기 최고의 판타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걸 알겠지만 그러하기에 황당하고 안타까웠던 것이다. 잘 모르고 봤던 이들은, 이 영화가 주는 여러 가지 의미의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고 고개를 돌리고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재개봉하면서 '잔혹'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13년 전 그때 그 배급사는 잔혹함을 내세우면 관객들이 애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판단했던 게 아니었을까. 지금은, <판의 미로>가 갖는 급이 다른 영향력과 작품성과 연출력과 풍부함을 알기에 한편으론 익숙하게 한편으론 새롭게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재개봉작들이 과거 큰 흥행과 파급력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시금 진정성 있게 다가간다는 것에서 진정한 의미의 재개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 사이 21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 불러도 손색없는 커리어를 쌓았다. 재작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쥐었으며 베니스에서도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것이다. 역시 오스카를 평정한 알폰소 쿠아론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와 더불어 멕시코 출신 영화감독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는 그(3명이서 2014년부터 2019년까지 2017년을 제외하고 오스카 감독상을 독식했다)의 자타공인 최고작이니만큼 기대해도 좋다. 


오필리아의 세 가지 과제와 스페인 내전의 연장 전투


오필리아는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하고, 스페인 내전의 후과는 계속된다. 영화 <판의 미로>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먼 옛날 지하왕국, 행복과 평화로 가득 찬 그곳에 인간 세계를 동경하는 공주가 있었다. 햇빛과 하늘과 바람을 꿈꾸던 공주는 지상의 인간 세계로 도망친다. 하지만 너무나 눈부신 햇살에 공주는 눈이 멀고 기억을 잃은 채로 죽고 만다. 1944년 스페인,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지만 반란군은 산속에서 여전히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반란군 소탕을 위해 산밑으로 군대를 파견한다. 그곳은 비달 대위가 이끌고 있고, 어린 소녀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와 함께 새아버지 비달 대위가 있는 그곳으로 향한다. 


도중에 요정을 만나는 오필리아, 산밑 주둔지 침소에 찾아든 요정을 따라 산속 신비의 세계로 진입한다. 현실의 반란군이 있기도 한 그곳에서 숲의 요정 판을 만나 그에게서, 자신이 원래 지하 세계 공주 모안나이며 지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보름달이 뜨기 전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녀는 판의 말을 굳건히 믿고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이어간다. 


한편, 산밑에서 비달 대위가 이끄는 정부군은 산속의 반란군과 계속해 대치하면서 잔인한 짓을 일삼는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반란군 포로를 고문하며,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난 후 확인사살도 잇지 않는다. 비달 대위는 사실 오필리아는 물론 아내가 된 카르멘도 안중에 없다. 그에겐 오직 카르멘의 뱃속에 있는 아들(아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만 있을 뿐이다. 


영화는 오필리아와 판을 필두로 하는 환상 세계와 비달 대위를 필두로 하는 현실 세계를 자연스레 오간다. 두 세계는 엄연히 다른 곳에 있는 듯하지만, 비단 산속과 산밑이라는 절대적 공간만 다를 뿐인 듯도 하다. 더불어 오필리아의 하염없이 한가해 보이는 듯한 세 가지 과제 수행기와 두 집단의 피비린내 나는 대치 사이가 굉장히 큰 차이와 간격이 있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여러 맥락들의 일치 덕분일 것이다.


환상과 현실


환상과 현실을 환상적으로 오간다. 영화 <판의 미로>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맥락들엔 아무래도 오필리아와 비달 대위가 있을 것이다. 이 두 인물은 단순히 인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닌 투철한 상징성을 획득해 환상과 현실에서 활약한다. 오필리아는 현실의 비달 대위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택했고, 진정한 환상의 세계로 즉 모안나 공주로서 지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무모한 환상과 어두운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필리아가 보고 듣고 행하는 환상의 세계란 것이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모한 환상인지, 그 환상에의 여정에 우리도 동참해 지친 심신을 희한하게 위로받고 있는 게 아닌지. 그런가 하면, 비달 대위는 단순히 정부군 소속의 투철한 군인으로서만 비춰지지 않는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자 지배자로, 오필리아나 카르멘이 위협을 느낄 만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신념을 넘어선 뒤틀리고 어두운 욕망 덩어리가 아닌가. 


영화는 미장센보다 몽타주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으로 정통하게 접근했다고 볼 수 있겠다. 환상의 세계를 신화적 요소들로 채워넣었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 시대 새로운 고전이자 신화를 쓰고자 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20세기 최악의 사건은 충분히 신화의 요건을 갖췄거니와, 그 후과는 신화의 소재로 쓰일 만한 자질(?)을 갖췄다. 어느 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불가능하게 종과 횡으로 복잡다단하게 비극적인 사건인 것이다. 


독재자와 불복종의 신념


독재에 맞선 불복종의 신념. 영화 <판의 미로>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스페인 내전으로 프랑코는 정권을 장악해 1970년대까지 독재를 계속한다. 영화 속 비달 대위는 프랑코 정권 독재의 현현(顯現)이다. 프랑코가 정권을 장악하게 도와준 이들이 다름 아닌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비롯 파시스트들이었기에, 넓은 의미로 독재 그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프랑코가 정권을 탈취한 이들은 좌익연합인 인민전선 내각으로,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다방면의 이슈가 생겨나고 말았기에 영화에서는 정부군과 대치하는 반란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 그친다. 


영화에서 반란군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대신하는 이가 오필리아이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다시 그 역할을 한 번 더 대신하여 현실 아닌 환상의 세계에서 수행한다. 이 영화가 대단한 점, 연출과 각본과 제작을 맡은 기예르모 델 토로가 대단한 점은 이 지점이다. 오필리아가 반란군의 역할을 우회하고 우회해서 수행하는 게 세 가지 과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과제를 실패하면서 그 역할이 이루어진다. 물론 오필리아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위대하면서도 위험한 불복종의 신념을 지켜나간 것이었다. 


한편, 불복종의 신념은 현실에서 투철한 스파이들에 의해서도 지켜진다. 독재 지배에 맞서는 방법은 오직 불복종일 뿐이다. 독재에 독재로 맞서서는 안 되는 것이고, 독재에 테러와 전쟁으로 맞서는 건 한계가 있을 뿐더러 또 다른 독재를 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고, 독재에 평화로 맞서는 건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볼복종에 이은 희생, 그 굴하지 않는 끝없는 신념에의 무모함이 궁극적으로 독재를 물리칠 방법이다.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독재라는 초유의 사태에 맞서기 위해서 수행해야 할 일이겠다. 


영화가 수많은 비극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와중에도 빛을 잃지 않는 희망을 얘기하고자 한다면, 독재자 비달 대위는 죽고 오필리아는 세 가지 과제를 모두 수행하여 지하 세계로 돌아가는 스토리일 것이다. 문제는, 신화란 그렇게 단면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비달 대위는 죽겠지만, 오필리아는 과연? 그녀가 다른 이유 아닌 비달 대위에게 죽는다고 상상해보자. 적어도 맥락을 아는 관객들에겐 불복종의 신념을 지키다가 독재자의 손에 죽은 어린 순교자가 아니겠는가. 기예르모가 그것까지 노렸다면, 그는 천재가 확실하다. 어떤 결말일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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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델 토로, 독재, 불복종, 스페인 내전, 잔혹,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현실,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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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이슈를 넘어 일상이 된 지금 이곳의 연극 <환희 물집 화상>

생각하다 2019. 5.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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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환희 물집 화상>


연극 <환희 물집 화상> 포스터. ⓒ프로덕션IDA



뉴욕이 유명 교수이자 저명한 여성학자 캐서린은 어머니 앨리스의 심장발작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는 외로움과 자신을 조건 없이 무한정 사랑해주는 사람이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안식년을 맞아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는 그녀의 대학원 절친 그웬과 던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캐서린과 던은 대학원 시절 사랑했던 사이였다. 


캐서린은 새로운 페미니즘 강의를 시작한다. 하지만 강의에 신청한 이는 그웬, 그리고 그녀의 베이비시터 에이버리뿐이다. 사람도 별로 없고 아는 사이이니 캐서린과 앨리스 집의 거실에서 강의를 진행하게 되는데, 수업 때마다 열띤 토론이 계속된다. 페미니즘의 대가 캐서린, 전통적인 여성상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욕망에 충실한 에이버리, 전업주부로 살아가며 그런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기 싫은 그웬. 그리고 이들보다 한두 세대 위의 앨리스까지. 


한편 던은 학문은 포기했지만 교수로서 대학교에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집에선 마약에 술에 포르노로 점철된 쓸모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가정에는 손을 떼다시피 하여 그야말로 수동적인 삶을 사는 원시인과 다름 아니다. 그런 그를 두고 캐서린과 그웬은 자리 바꾸기 게임을 시작한다. 전업주부 그웬이 교수 캐서린의 자리로 가고, 캐서린은 그웬에게서 '양도' 받은 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어떤 결말을 얻게 될까?


막장 사랑 스토리와 투철한 이론 수업


연극 <환희 물집 화상>은 2013년 극작가 지나 지온프리도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13년 퓰리처상 연극부문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의 명망으로, 이 정도의 사전정보만으로도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회적 이슈와 시대적 요청을 넘어 누구나의 삶과 인생에 깊숙히 들어와 일상적이고 보편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페미니즘', 이 연극은 페미니즘을 이론과 삶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다층적으로 다양하게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어도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이 연극을 보면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주지한 줄거리를 통해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듯 <환희 물집 화상>은 '막장'이다. 숭고한 페미니즘과 저렴한 막장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고 또 잘 어울리면 안 될 것 같지만, 막장 뒤에 '블랙코미디'가 붙는 만큼 매우 잘 어울리고 또 매우 웃기면서도 지적 심리적으로 매우 알차다. 모르긴 몰라도 매우 진지하기 짝이 없게 페미니즘을 전달하려 했다면 기억에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막장 사랑 스토리와 투철한 토론에 따른 이론 수업의 투 트렉으로 진행되는 연극은, 한편 매우 쉽고 직설적이지만 한편 매우 어렵고 복잡다단하다. 막장 스토리라도 쉽고 직설적이기만 한 게 아니고 이론 수업이라고 어렵고 복잡다단한 것만도 아니다. 투 트렉 모두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만큼, 실컷 웃으면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페미니스트 vs 안티 페미니스트


여기서 캐서린의 페미니즘 이론 수업을 가져와 페미니즘의 역사를 읊을 생각은 없지만, '베티 프리단'과 '필리스 슐레플리'는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론 수업 중 두 진영의 핵심인물이자, 그들의 핵심 사상이 캐서린과 그웬에게 그대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과 주장이 옳고 그른 것인지, 그렇다면 옳은 이론과 주장대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옳지 않은 이론과 주장대로 사는 게 불행한 삶인지, 행복과 불행이 옳고 그름과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 등의 생각을 끊임없이 할 준비가 되었는가. 


둘다 1920년대 태어나서 2006년과 2016년에 세상을 떴다. 베티 프리단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미국 페미니즘 제2물결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녀는 타고난 생물학적 특성이 그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필리스 슐레플리는 안티 페미니스트로, 미국 수정헌법의 양성평등조항 채택을 저지한 극우정치활동가였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주어진 역할이 다르다고 하였다.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티를 캐서린에 필리스를 그웬에게 대입시켰을 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히 캐서린이 '옳고' 그웬이 '틀려' 보인다. 하지만, 캐서린이나 그웬 둘다 본인의 삶을 본인이 온전히 '선택'했고 그 선택에 따른 삶이 '행복'하다면? 물론 연극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탐하고 본인의 삶을 불행히 여기기에 자리 바꾸기 게임을 하지만, 결국 서로 바꾼 것이라면 달라질 게 없는 게 아닌가. 


이럴 때 우리 같은 일반인, 나 같은 남자는 말문이 막히고 나아갈 길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본인이 좋고 행복하다는데, 그것도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둘다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존재가 바로 에이버리이다. 다 모르겠고 본인의 생각과 행동과 욕망이 가장 중요한 그녀 말이다. 그녀의 의견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남녀평등'의 개념에 가장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불어 그녀의 의견은 극중에서 캐서린에게 큰 힘이 된다. 


사랑과 결혼과 가정


연극은 사랑과 결혼과 가정이라는,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의제가 넘어간다. 사실 이것들은 여자에게 가장 중요하다기보다 가장 민감한 문제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싶다. 어떻게 재정립하여 받아들일 것인지 말이다. 캐서린과 에이버리도 사랑으로 흔들리고, 캐서린은 결혼 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다층적 스트레스를 감수하고 있으며, 그웬은 가정에 목맨 현실에 불만이 없는 듯하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자신과의 싸움에 지친다. 오직 던만이 그 수많은 암초들 사이에서 독야청청하다. 


사랑, 결혼, 가정. 인간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며, 사실 없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것들을 생각할 때 자연스레 남자보다 여자가 생각나지 않는가? 남자의 사랑, 결혼, 가정이 아닌 여자의 사랑, 결혼, 가정이 더욱 어울려 보이지 않는가? 참으로 오랫동안 교육받고 은연중에 보고 듣고 생각해왔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 결혼, 가정보다 커리어로 대변되는 바깥의 활동과 연결되어지기 마련이다. 


<환희 물집 화상>은 연극 자체로 청일점인 던을 주체 아닌 객체로 그리며 능동적 아닌 수동적 인물로 표현했지만 그게 비단 극중 아닌 실제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없기도 한 게 사실이다. 가정에서는 마약과 술과 포르노로 도망치고, 바깥에서조차 가정에서 바라보는 '커리어'라는 뭉뚱그려진 개념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 시대 여자는 가정에서도 바깥에서도 도망칠 곳 없이 슈퍼우먼이 되어간다. 우리가 교육받고 은연중에 생각해왔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고 거기에 더해 여기저기 고리를 더 만들어 팽팽하게 당기기만 할 뿐이다. 


연극의 결말을 말할 순 없지만, 비극이 아니길 바란다. 남자와 여자의 구도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와 안티페미니스트 사이에 말이다. '물집'과 '화상'이라는 다른 듯 비슷한 상처가 아물어 '환희'를 맛보기 바란다. 자연스레 '연대' '통합'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막무가내 아닌 절절하고 투철하고 치열한 갈등과 다툼 끝에 얻어진 연대이자 통합이길 바란다. 비단 이 연극이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극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연극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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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결혼, 블랙코미디, 사랑, 페미니즘, 환희 물집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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