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 시인의 성추행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지우지 않고 계속 놔두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가치가 있길 바랍니다. 물론, 요청이 있을 시 바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편집자가 독자에게] <고은 깊은 곳>
<고은 깊은 곳> 표지 ⓒ아시아
편집자 일을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시는지요. 내가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독자들께 읽히는 걸 볼 때, 더 자세히는 길거리에서 내가 만든 책을 누군가가 읽으며 지나가는 걸 볼 때. 저한테는 아직 이 두 상황이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러면, 편집자로서 가장 설레는 건 무엇일까요. 위대한 작가의 원고를 책이 나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 저는 이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한대요. 그동안 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인도의 대문호 '쿠쉬완트 싱'의 <델리>, 중국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각국 최고 작가의 최고 작품 모음집 <물결의 비밀>, 한국 노동문학의 대부 '방현석'의 <세월>, 그리고 중앙 아시아 고대 신화까지. 이 정도만 해도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저자군이지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할 수 있는 너무 유명한 '고은'
이번에는, 이 저자군의 품격을 단번에 올려줄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의 작품을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자타공인 '국민시인' 고은 시인과 김형수 작가의 대담집, <고은 깊은 곳>입니다. 끝없는 설렘과 부담감을 품은 채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선생님들의 빠르고 정확한 피드백 덕분에 작업을 일단락질 수 있었습니다.
너무 유명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린 그 대상에 무지한 경향이 있지요. 고은 시인도 그런 경향을 피해갈 순 없었을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삶에 있지만 우린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알고 있을 뿐이죠. 이 책에는 김형수 작가에 의한 그런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200페이지 남짓한 결코 길지 않은 책인데요. 충분히 고은 시인의 '깊은 곳'까지 다다랐다고 봅니다. 누구보다 고은 시인을 잘 알고 또 누구보다 사려깊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할 줄 아는 김형수 작가가 함께 대담을 진행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두 어른의 대담에서 정서적으로 실용적으로 많은 걸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김형수 작가와는 지난 2014년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와 2015년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의 '작가 수업' 시리즈로 작업을 했었습니다. 3탄을 준비 중인데, 공교롭게도 위 책들을 낸 후 더 바빠지셔서 늦어지고 있네요. 내년 상반기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건 물론 기대도 됩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믿음 덕분이죠.
고은 시인의 삶과 시, 그 깊은 곳
사실 이 두 분의 대담이 책으로 엮어 나온 게 처음은 아닙니다. 자그마치 5년 전에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께의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한길사)이 나와 많은 이들의 눈을 밝혀주었었죠. 겹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만이 가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두 세기의 달빛>이 1930~50년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반면, 또 같은 출판사의 <바람의 사상>이 고은 시인의 일기를 중심으로 1970년대를 다루고 있는 반면, <고은 깊은 곳>은 고은 시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두루 다루며 '고은' 그 자체의 깊은 곳을 다루고 있지요.
이를, 김형수 작가는 고은 시인과 대담하는 내내 그 파동이 울려나오는 곳에 닿고 싶었다고 말씀하셨죠. 그곳이 다름 아닌 '고은 깊은 곳'이며 '고은의 시를 끝없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1958년에 데뷔해 내년이면 시(詩)력 60년이 되는 '시인 고은'의 삶과 시, 이 책 하나면 충분할 것입니다.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에 대해, 이 또한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모국어 너머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문학, 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고은 시인의 국제 활동을 조망하죠. 고은의 시적 근원에 자리한 '모국어'라는 존재의식의 장벽을 넘는 행위입니다. 고로, 무엇보다 모국어 한글의 축복이죠.
<고은 깊은 곳>을 읽는 것은 곧 고은의 시를 읽는 것
고은 시인을 지칭하는 말은 비단 '국민시인'뿐만 아닙니다. 그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오로지 시와 함께 하는 그의 삶은 네 번에 걸친 치열한 자살 시도와 10년에 걸친 승려 생활을 거쳐,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사건을 결정적 계기로 현실에 대한 시야를 습득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앞장서 현실문제에 대응하며 자연스럽게 따라온 상상을 초월하는 심신의 고달픔을 뒤로 하고 '살아남아' 시를 쓰는 고은 시인,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었고 감히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독자분께서 이 영광스러운 작업의 수혜를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시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소설을 압도적으로 즐기는 편이죠. 그런 가운데 '시인 고은'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또 좋았습니다. 고은 시인의 시로 시에 입문하게 되는 것일까요?
'나에게서 시를 빼앗으면 나는 뱀 허물이고 거미줄에 걸린 죽은 풍뎅이 껍질'이라고 말하는 고은 시인의 '삶'은 곧 '시'일 것입니다. 그의 삶을 읽는, 즉 <고은 깊은 곳>을 읽는 누군가는 곧 그의 시를 읽는 것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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