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악의 해부>
<악의 해부> 표지 ⓒ에이도스
제2차 세계대전 하면 생각나는 건 단연 '홀로코스트'다. 통칭으론 대학살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있어 왔지만, 이토록 어마어마한 전쟁과 대학살이 동시에 이뤄진 건 일찍이 없었다.
당연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각은, '왜'와 '어떻게'로 쏠린다. 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자행했는가. 거기에 홀로코스트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인사들을 향한 관심도 있다. 히틀러, 히믈러, 하이드리히, 아이히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비롯 나치는 그렇게 '악마'가 된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게 한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악마여야 한다. 여기서 '왜'는 충분히 설명되어 진다. 그러면 '어떻게'가 남고, 잔인함을 넘은 악마적 학살 방법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린 그 방법들을 전해듣고 그저 치를 떨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누구'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진다. 위에 명명된 이름들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개인이라기보다 악마적 존재들의 집합체인 나치에 속한 수많은 조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게 최선일까? 나치를, 제2차 세계대전을,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최선일까?
나치 전범을 통해 들여다보는 '악'
정신의학자가 치밀하게 돌아본 '악마'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악의 해부>(에이도스)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나치 전범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수용한 룩셈부르크 아쉬칸 포로수용소에서 시작된다. 앤드러스 대령 교도소장과 정신과의사 더글러스 켈리, 그리고 나치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이 등장한다.
오래지 않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위해 무대가 독일 뉘른베르크로 옮겨진다. 와중에 독일노동전선 수장 로베르트 레이와 반유대주의자 신문 《데어 슈튀르머》 편집자 율리우스 스트라이허가 소개된다. 그리고 대망의 나치 부총통 루돌프 헤스. 또 한 명은 더글러스 켈리와 치열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 대결을 펼칠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다. 켈리와 길버트에 의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이 시작되는 동시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의 길 또한 열린다. 이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책의 한 축을 이루며 흥미진진하게 나아간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상황들이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나치 전범 네 명에 대한 케리와 길버트의 심리 분석. 이 악마들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먼저 로베르트 레이,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전쟁 중에 행한 활동을 뉘우치기도 한 복잡다다한 인물이었다. 전범 중 유일하게 뇌를 부검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뇌에 손상이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그의 악을 손상된 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돌프 헤스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오늘날 병명으로 하면 '편집성 조현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증을 겪은 것이다. 거기에 당시 기억상실증도 겪었다고 하지만 꾀병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정신병은 인정되어 사형당하지 않고 종신형을 받았다. 이들의 '악'은 말그대로 뇌의 '이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반면 헤르만 괴링은 '진정한' 나치였다. 그는 감옥에서 자살했는데, 그 이유가 연합국 측에 모욕을 안기고 순교하려는 의도였을 정도다. 그는 사과도 변명도 일절 하지 않았고, 재판에서 외려 연합국 측과 치열하게 공방해 일말의 승리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를 '호감형 사이코패스'라 칭한다.
율리우스 스트라이허는 어땠을까. 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쁜 남자'라 칭하는 그는, 여기서 소개한 여타 나치 전범들과는 다르게 장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완전하게 비열한 인물이다. 그는 성격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니고, 성격이 심각하게 나쁜 거였다. 같은 편조차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치 전범은 악의 화신인가,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는가
이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더글라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거니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과도한 야망, 낮은 윤리기준, 강한 민족주의를 가졌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일말의 악은 있으며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라는 게 켈리 주장의 핵심이다.
반면 구스타브 길버트는 나치 전범들이야말로 악의 화신, 악마의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그들의 악은 특수한 악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미 나치 전범들이 악이라는 명제를 모든 주장의 전제에 놓았다. 사실 길버트의 주장은 당시 전 세계적인 대세였다.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 전범들을 일반인과 같은 평범의 범주 안에 놓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길버트가 가난한 유대인 망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객관적 대신 주관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은 당대에는 비주류였지만 추후 심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켈리의 주장에 가 닿아 있다.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 악에 대한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해석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후 대단히 영향력 있는 연구 네 건이 이 관점의 함의들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다.
먼저 한나 아렌트,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더 없이 유명한 그녀의 '악의 평범성'은 켈리의 주장을 정통으로 잇는 연구다. 그녀는 이에 '악은 주변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곰팡이 같은 것. 그것에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다'고 말했다. 스탠리 밀그램은 '복종'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정상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타인이 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보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행위의 책임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 달리와 빕 라타네의 '방관자 무관심' 실험도 켈리를 잇는다. 1964년 3월 뉴욕 시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이 세계를 뒤흔든다. 38명이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어느 목격자가 다른 목격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강행한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이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낸다. 사회적 맥락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저열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버트의 뒤를 이은 주장은? 켈리의 주장 전통에는 빈 서판으로 세상에 태어나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대전제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빈 서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기본값이 훨씬 더 어두운 쪽에 치우쳐 있다면? 사이코패스, 즉 나쁜 뇌, 병든 뇌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아니 정확히는 나치 전범의 심리를 분석한 켈리와 길버트가 남긴 것들로는 진정한 '악'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저자는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생각 끝에 켈리와 길버트 모두가 옮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켈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약간씩의 어둠을 찾아냈고, 길버트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보기 드문 어둠을 찾아냈다는 것. 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섬뜩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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