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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입체적 인물 캐서린의 체제 전복 <레이디 맥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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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레이디 맥베스>


고전적 캐릭터 '레이디 맥베스'가 기본 골자 위에 입체적으로 재탄생했다. ⓒ씨네룩스



온몸을 뒤덮는 베일을 쓴 한 소녀,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린다.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남편될 사람인 듯하고, 뒤에는 늙은 남자와 흑인 여자가 서 있다. 결혼식이다. 뭔가가 빠져 있는 결혼식. 곧이어 첫날밤, 모습을 드러낸 남편은 소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에게 벗으라고 명령하고는 혼자 침대로 들어가 몸을 돌려버린다. 이해할 수 없는 첫날밤. 일반적인 결혼식과 첫날밤의 모습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알고 보니 캐서린은 탄광을 소유한 명가에 팔려온 이였다. 남편은 원하지 않았고 남편이 극도로 싫어하고 증오하는 아버지가 사온 것. 일련의 이상함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캐서린이 이 집에서 할 일은 없다. 집에서 나가지 말고 가만히 성경이나 읽고 있으면 된다. 여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이 집의 여주인이기 전에,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아버지의 재산에 불과하다. 


무료함 때문인지 천성 때문인지 캐서린은 시아버지와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무표정해 보이는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다. 어느 날 탄광이 폭발해 남편과 시아버지 모두 집을 비운다. 그 때문인지 집안 남자 하인들이 단체로 흑인 여자 하인 안나에게 몹쓸 짓을 한다. 이를 목격한 캐서린, 안나를 구해주는데 그중 한 명인 세바스찬에게 기묘한 욕정을 느낀다. 그렇게 흔하디 흔한 주인 마님-하인의 희비극 러브스토리가 펼쳐지는 듯하다.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


'욕망의 화신'을 둘러싼 다양한 은유들, 이 영화를 이루는 것들이다. ⓒ씨네룩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충심으로 가득 찬 최고의 전사 맥베스에게 욕망으로의 결정적 속삭임을 건네는 레이디 맥베스가 생각나는데, 원작은 19세기 러시아의 니콜라이 레스코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사랑 때문에 3명을 엽기적으로 죽인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 끝은 좋지 않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처럼 욕망의 화신이다. 욕망에 사로 잡힌 그 끝에 남은 건 파국뿐이라는 걸 말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단순한 욕망의 화신 그 이상이다. 그녀의 욕망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이 실로 다양하다는 뜻이거니와, 영화가 거기에서 끄집어내어 은유로서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실로 다양하다. 


고로 레이디 맥베스의 인물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여자의 본분을 잊은 채 자주 외출하고 부인의 본분을 잊은 채 하인과 사랑을 나누며 며느리의 본분을 잊은 채 시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한다. 급기야 살인으로까지 나아간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이코패스적인 살인 행각, 그 순간들에는 안나와 세바스찬이 있다. 그들의 한없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비춰 캐서린의 무표정이 더욱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살인 대상은 모두 남자들, 이쯤 되면 혁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욕망에 사로 잡혀 미쳐 날뛰는 이의 즉흥적인 살인이 아닌, 완벽하진 않아도 나름의 체계가 잡힌 조직적 살인일 수 있다. 권좌에 앉을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캐서린 그 자신이다.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


캐서린이 행하는 행각은 가히 엽기적이지만, 다분히 체제 전복의 성격이 담겨 있다. ⓒ씨네룩스



캐서린은 시각에 따라 살인보다 더 생각하기 힘든 행각도 벌인다. 재산에 불과한 하녀 안나를 자신과 한 식탁에 앉게 하기도 하고, 역시 재산에 불과한 세바스찬을 주인처럼 차려 입게 하고는 자신과 한 식탁에 앉히기도 한다. 주인 없는 곳에서 권력을 누릴 양으로 욕망 분출에의 욕망의 모습일지 모르지만, 은유로 자리잡기 충분한 모양새다. 


그건 곧 뜻했건 뜻하지 않았건 여성, 계급, 인종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혁명과 체제 전복의 파편들이다. 최소한 캐서린은 뜻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원작과 다른 길을 택한 영화로서는 완벽히 뜻한 모습이다. 그녀 자신이 여성으로서의 본분 따위를 던져버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분출하고 있고, 계급의 경계를 한순간이나마 무너뜨려버렸으며, 자연스레 인종 간에 가지는 높낮이를 수평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지극히 캐서린의 입장에서, 캐서린의 생각과 행동 하에 집행함으로서 그 자체의 소구점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즉, 캐서린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다양한 선린들임과 동시에, 그리하여 캐서린이 입체적 인물이 되게끔 도와준다. 등장인물 모두, 사건들 모두, 요소들 모두 캐서린의 작품이자 캐서린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뿐만 아니다. 영화에서 가장 대립적인 것은 다름 아닌 집안과 집밖이다. 정확한 좌우대칭의,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반드시 거기에 있는, 절대 그곳에서 빠져나가선 안 되는 집안의 모습. 이에 반해 집밖으로 조금만 가면 펼쳐진 대자연의 정형화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앞서 숨이 탁 트이는 한숨을 자아낸다. 캐서린은 집밖으로 도피하려는 것 같지만 무엇보다 집안을 가지려는 여인이다.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상(像)


지극히 단조롭고 정형화되고 제한적인 집에서 날 것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해선 안 되는 일이었으니... ⓒ씨네룩스



영화가 다분히 캐서린을 따라가려 하다 보니 집밖의 날 것 느낌을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녀가 집안에서 머리를 바짝 묶고 단색의 드레스를 입은 채 무표정으로 조신하게 앉아 있는 모습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집시풍(?)의 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바람을 맞는 강가의 모습이 훨씬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잠시 잠깐의 일탈로 보일 뿐이다. 그녀는 어느새 집안을 더 중요시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집안을 극도로 제한적으로 보여주며 시대를 지배하고 개개인을 억누르는 어떤 상(像)을 제시한다. 누군가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아주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런 집, 그런 상 말이다. 모든 걸 뒤엎을 수 있는, 찾아보기 힘든 캐서린조차 그 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캐서린의 끝은, 즉 영화의 끝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을 겪어온 그녀에게 비극은 무엇이고 희극은 무엇일까. 원작처럼 그녀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비극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게 되는 게 희극일까. 그건 영화를 잘 지켜본 이에겐 아무래도 상관 없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보여준 혁명적 생각과 행동들, 그리고 치명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가장 많은 신경썼을 게 분명한 화면적 미장센의 아름다움은 너무나 당연하거니와, 그 이상으로 신경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스토리적 미장센, 즉 군더더기 없는 역동성의 모순적 진행이 주는 대립의 아름다움이 눈을 확 트이게 하고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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