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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내가 더 피로해야 내가 살아남는다... 그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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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병철의 <피로사회>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두 기업이 있다. 그들의 슬로건은 굉장히 유명하다. 다들 아실테지만 열거해보겠다. 먼저 'Just do it'(일단 한번 해봐). <애드버타이징 에이지>가 선정한 '20세기 광고 슬로건 톱 5'의 하나로 선정된바 있다. 살펴보면 이 문구에는 '부정'의 요소는 없고 오직 '긍정'의 요소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로사회> 표지 ⓒ 문학과지성사

다른 한 기업의 슬로건을 보자. 'Impossible is nothing'(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위의 슬로건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극도의 부정이 극도의 긍정으로 바뀐다는 점과 어떤 부정성, 강제 부정성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 작은 차이는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에서 말하는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구분 지을 수 있다. 패러다임 전환의 큰 단초가 될 수 있다. 

과유불급, 과도한 긍정이 폭력을 불러오다



<피로사회>가 출간되기 전, '긍정'을 날카롭게 파헤친 책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긍정의 배신>(부키).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긍정은 위기의 징후에 눈감게 만들고, 나아가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긍정성 부족으로 돌린다고 말한다. 이 모습이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긍정은 점점 과잉되고, 과잉된 긍정은 급격한 산업 팽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많은 위기와 폭력을 불러왔음에도 긍정적 사고는, 우리 사회에 도사리며 언제 우리를 배신할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흔히들 말한다. 우리는 지금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노라고. 그래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에는 '~해서는 안 된다' 혹은 '~해야 한다'와 같은 부정성은 없다. 오직 무한정한 '할 수 있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왜 그런 것일까?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되기"(25쪽) 때문일 것이다. 성과의 패러다임이 우리를 지배하기 전에는 어떤 시대였을까? 

저자는 말한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 (줄임)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23쪽).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라고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혹은 '~해야 한다'가 지배적으로 쓰인다. 그러다보니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24쪽)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24쪽)

성과사회는 활동사회이자 노동사회이다. 그 사회에 부정은 있을 수 없다. 오직 할 수 있다는 긍정 하에, 피로와 탈진을 야기시킨다.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로, 모든 공통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한다."(66~67쪽) 피로는 폭력인 것이다. 그 폭력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 질환으로 나탄난다. 

성과주체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반세기 전, 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세계 도처에 강제 노동 수용소가 있었다. 이는 타자에 의한 강제 착취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규율사회에는 이처럼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져"(23쪽) 있다. 타자와 자아, 공격과 방어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사회. 대부분의 '나'는 다른 누군가의 '객체'였다. 

21세기에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한다.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로운"(28쪽), 성과주체로서의 인간. 하지만 거기엔 기막힌 반전이 존재한다. 외적인 지배와 착취 대신 "자기 자신을 착취"(28쪽)하는 것이다. 강제가 없고 자유만 있지만, 역설적으로 강제되어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 

이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28쪽)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우울증이 발발한다. 우울증은 '무한자유경쟁체제'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질환인 것이다. 그 끝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곳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길을 택하듯이. 

저자는 <모비딕>으로 유명한 미국의 대문호 허먼 멜빌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바틀비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규율사회에서의 타자에 의한 강제에 대항하려는 행동이다. 저자는 이를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56쪽)라며 우울증의 증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결국 몰락하고 만다. 

필자 이 부분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겠다. 저자는 바틀비를 두고 "그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그저 단조로운 필사 작업뿐인데, 여기서 어떤 자기 주도적 활동에 대한 요구나 가능성이 생겨날 여지는 전혀 없다"(58쪽)고 말하고 있다. 그러며 "아직 관습과 제도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58쪽)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어페가 있어 보인다. 

저자가 이 시대를 두고 명명한 '피로사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경우를 포함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바틀비의 경우, 허먼 멜빌이 관습과 제도의 사회인 '규율사회' 밖에서, 또는 밖을 동경하는 그런 인간을 그리려하지 않았을까. 즉, 저자는 그 시대를 규정하고, 사람들을 그 시대에 예속시키려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색으로 처방하다

저자는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은 '멀티태스킹'이 필수인데, 그렇게 되면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31쪽) 좋은 삶은 멀리 밀려나고 생존에 골몰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32쪽) 심심함도 허용하지 않은 채 언제나 분주할 뿐이다. 언제나 활동적이고 부산스러워야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또 그런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처방전은?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36쪽) 그러며 니체의 말을 빌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금은 아쉬운 처방전이 아닌가 한다. 사색을 해야한다는 당위성(why)은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입증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how)이나 무엇을 사색해야 할지(what)에 대한 말은 아끼고 있다. 책의 내용이 마음 속으로 더 깊이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분노로 처방하다

저자는 또 하나의 처방전을 지어준다.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50쪽)며, 분노로 전체를 부정하고 부정성의 에너지를 방출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분노는 짜증과 비슷한 듯하지만 엄연히 구별된다고 한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인 반면, 짜증은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고 말한다. 분노로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50쪽)해서, 긍정성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예의적 상태를 계속 생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13쪽) 지금 '피로사회'라는 말이 사회 전반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피로사회>로 인해 '성과사회'의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일까? 다음 시대는 어떤 사회일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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