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니어스>
'편집자'와 '천재 작가'라니, 개인적으로 너무 기대되는 영화 <지니어스>. ⓒ라이크콘텐츠
난 출판편집자다. 주로 소설을 많이 다루었는데, 결코 '잘 나가는' 편집자가 되진 못한다. 내가 만든 책이 엄청난 수익을 창출해 출판사와 저자를 기쁘게 해준 적이 없다. '유능한' 편집자라고 묻는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괜찮은 책조차 되지 않을 형편 없는 원고를, 괜찮은 책으로는 만들어낸 경험이 다수 있으니까.
그럼 '좋은' 편집자라면? 답하기가 어렵다. 먼저 좋은 편집자가 뭔지 아직 잘 모르니까 말이다. 당장 생각나는 건, 저자의 삶과 나아가 세상까지 옳은 방향으로 바꾸는 원고(책)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편집자. 유명한 저자와 함께 하면서도, 무명의 저자를 들여다볼 줄 아는 편집자. 무엇보다 독자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편집자.
영화 <지니어스>는 20세기 초 미국 뉴욕 굴지의 출판사 스카라이브너스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 분)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 문학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문인 중에서도 압도적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을 편집한 이다. 영화는 그런 그에게 뉴욕 전역의 출판사에서 거절 당한 토마스 울프(주드 로 분)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맥스는 울프의 원고를 읽고는 바로 울프와 계약한다.
'유명 편집자'의 삶은?
유명한 베테랑 편집자가 우리 시대엔 존재할까? 20세기 초 미국이라면 가능하겠다.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라이크콘텐츠
유명 소설가의 삶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소설가가 있다면 반드시 편집자가 있어야 하는 법, 그런데 '유명 편집자'의 삶은? 아니, 편집자가 애초에 유명해질 수가 있나 싶다. 여기서 '유명'은 출판계 내부가 아닌 대중적으로 그러냐는 말이다. 창작만큼 코디와 편집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여러 콘텐츠를 통해 편집자가 소개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도 그에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열정과 능력은 출중하지만 엄연히 초짜 소설가인 울프를 베테랑 편집자 맥스가 다잡아 나간다. 과한 열정이 불러일으킨, 또는 개인적 스타일일 수도 있는 과도한 수사를 과감히 쳐내 독자들에게 읽힐 만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울프는 그대로 따르고 책은 대박이 난다. 하지만, 맥스의 아내 루이스(로라 리니 분)와 울프의 연인 엘린(니콜 키드먼 분)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맥스와 울프를 느낀다.
상당한 분량의 첫 책, 그리고 대성공. 울프는 톨스토이라도 되어볼 심상인지 자그마치 5000매 짜리 두 번째 책의 원고를 들고 나타난다. 이대로는 절대 책으로 나올 수 없다고 판단한 맥스는, 울프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 가멸차고 냉정한 편집을 가한다. 엄청난 시간과 공력이 들더라도 좋은 책이 될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더욱 일에 열정을 퍼부으면서 그들 곁에 있는 여인들은, 특히 엘린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울프의 도를 넘은 과도한 열정은 파멸적 비극을 예견하고,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맥스의 마음과 자주 충돌하며 불안감을 자아낸다. 그런가 하면, 맥스가 울프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느끼는 엘린은 도무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는다. 한편, 맥스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도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충실하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가족과는 가깝지 못한다.
조화롭기 힘든 조합의 기막힌 조화
냉철하고 대쪽 같은 베테랑 편집자와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초보 소설가의 조합은, 설렘을 주기에 충분하다. ⓒ라이크콘텐츠
맥스의 대사를 통해 형상화되는 진정한 편집자의 자세는 대체로 정석적이다. '나는 이 글이 좋아. 하지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독자들이 읽었을 때 좋아야 해.'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뒤에서 조력할 뿐이야.' 등. 반면 울프는 열정적인 예술가의 표본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쓰지 못하면 더 이상 소설가가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 모를 거야.' 등.
맥스와 울프의 조합은 현실과 이상의 기막힌 조화를 상기시킨다. 물과 불, 진보와 보수만큼 조화롭기 힘든 조합 아닌가. 그래서 우린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일종의 '완벽함'을 보고 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편집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걸 뒤로 한 채 남은 작가와 편집자, 편집자와 작가. 편집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아쉽게도 이 둘의 행복한 시절만을 그리진 않는다. 그들은 각자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 대상들이 감수해야 할 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울프의 연인 엘린이 그 표상인 바, 그러나 영화에 긴장을 조성하기 위함으로만 껴넣은 인물인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녀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영화의 만듦새까지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천착한 영화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꼭 들어가야 할 인물이자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편집자와 소설가의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사랑에 죽고 못 사는 감정적이고 퍼스널한 관계를 대비시켰으니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게 당연하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행해야 할 스텝
'편집자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출판사란 이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라이크콘텐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주인공이 황홀해 마지 않는 시대 1920년대 프랑스 파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당대를 넘어 역사상 길이 남을 예술가들을 본다.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거투루드 스타인, 피카소까지. 보는 관객 또한 황홀해 마지 않았을 면면들. 우린 <지니어스>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29년 미국 뉴욕이라면, 대공황의 한가운데일 터. 모든 출판사들이 경제, 사회 서적을 앞다투어 펴냈을 것이다. 즉, 돈이 될 만한 책 말이다. 문학은 뒷전일 수밖에 없을 테고, 울프 같은 초짜에 과도한 열정을 책에 고스란히 옮기는 예술가 나부랭이는 안중에도 없었을 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또 한 번의 방점을 찍는다. 일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고 할까.
유명 작가들의 책을 낸 편집자와 출판사는 부지기수다. 돈 뿐만 아니라 그게 편집자와 출판사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기도 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진정 명망을 높이는 일은 아무도 찾지 않고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분명 보석인 게 분명한 이를 발굴해 제대로 키워내는 것일 테다. 거기엔 말 못할 정도의 노력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 아닌가?
안주와 모험은, 하나가 시작되면 하나가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서로를 보고 의식하며 발 맞추어 나가야 하는 동지다. 이 영화는 여러 관계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스텝을 일깨우고 알려준다. 베테랑 편집자 맥스는 천재 소설가 울프를 끌어올린 천재 편집자가 아닌, 그릇이 넓은 관계의 천재였던 것이다. 모든 편집자의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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