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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광대인 흑인, 흑인 광대도 아닌 그저 자신이고 싶었던 <쇼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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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쇼콜라>


광대극에 혁명을 가져온, 역사상 유명한 두 광대의 실화를 다룬 영화 <쇼콜라> ⓒ판씨네마



19세기 말 프랑스, 한때 잘나갔던 광대 푸티트는 여지 없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서커스단 합류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단장은 그에게 20세기 관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무대를 원한다. 푸티트는 구상에 들어가고, 식인종 연기를 하는 흑인 광대 카낭가를 눈여겨 본다. 설득 끝에 콤비를 이룬 푸티트와 카낭가, 단번에 상종가를 올리며 지방의 소규모 서커스단을 인기 서커스단으로 탈바꿈 시킨다. 


최초의 백인과 흑인 조합 콤비, 단장은 카낭가의 이름을 쇼콜라로 바꾼다. 그렇게 광대극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 인기가 수도 파리까지 퍼진듯,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누보 서커스단이 그들을 스카웃한다. 파리 진출도 단번에 성공시키는 그들, 하지만 오직 '광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적으로 매진하는 푸티트와는 달리 쇼콜라는 치솟는 인기로 여자와 도박과 사치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기는 시들지 않는다. 


영화 <쇼콜라>는 영화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푸티트와 쇼콜라의 시소의자> 실제 주인공 인생 역전을 그린다. '영화'라는 장르의 시작을 함께 할 정도이니 그 엄청난 인기와 명성이 짐작가는 바, 영화는 특히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누리고자 했던 쇼콜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고 다층적이었으며 다변적이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광대' 쇼콜라, 그리고 '흑인' 쇼콜라


푸티트는 '광대'이고 싶었고, 쇼콜라는 '연예인'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으니... ⓒ판씨네마



영화의 시작은 쇼콜라가 아닌 푸티트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푸티트, 한물 간 스타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패기어린 애송이 같은 이미지다. 영화는 푸티트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티트는 영화에서 '백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사실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제 푸티트 부활 프로젝트의 파트너, 쇼콜라가 나올 차례. 곧 그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영화는 푸티트가 아닌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콤비는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의 연결고리 정도일 뿐이다. 


인기와 명성을 얻을 대로 얻은 쇼콜라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차피 모든 무대 기획은 푸티트의 몫, 쇼콜라는 그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일은 하되, 밖으로 싸도는 쇼콜라. 영화는 푸티트 또는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아니라 쇼콜라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 같다. 그렇다. '흑인' 쇼콜라와 '광대' 쇼콜라. 


이 콤비 무대의 백미는 '백인' 푸티트가 '흑인' 쇼콜라의 엉덩이를 걷어 차는 것. 이 콤비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포인트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행사 관계자들이나 푸티트와 쇼콜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압력을 받고 돌아와 깨달음을 얻은 쇼콜라는 그 행위가 더 이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대'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광대 이전에 '흑인'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혀 다른 존재 말살의 층위


연예인에서 시작해 광대로 나아가고 자 했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 쇼콜라. 다른 길을 택한다. ⓒ판씨네마



당시 광대라고 하면, 지금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면에서 푸티트는 진정한 광대다. 반면, 쇼콜라는 광대라기보다 광대병에 걸린,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단한 콤비의 한 축이지만, 푸티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좋다. '광대'라는 층위로 평등하게 다룰 수 있으니. 


하지만 푸티트보다 대외적으로 더 알려진 존재 쇼콜라가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히 더 인기가 많고 더 알려지는 것이면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쇼콜라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인간 이하의 원숭이로 표현해 비하를 이용한 코미디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완전히 다른 층위로의 이동이다. 


누보 서커스단장은 이 완전히 다른 두 층위를 하나로 슬며시 묶어버린다. 시궁창에 있던 너를 건져내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어디냐며, 광대라면 자신을 잊고 대중을 위해서만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쇼콜라는 '광대'라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존재 말살의 층위를, '흑인'이라는 절대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존재 말살의 층위와 일치화해야 하는 숙제를 떠맡게 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평등 국가 프랑스조차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 푸티트가 그와 함께 한 건 광대로서의 쓰임새를 본 것이지만 그 안에도 그런 시각은 있었다. 더욱이 누보 서커스단장이 그를 가져다 쓴 건 다분히 '흑인 광대'로서의 쓰음새를 본 것이겠다. 이 뿌리 깊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틀에 반기를 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봐야 할 건 쇼콜라의 '반기'인 것이다. 


혁명을 향한 위대한 한 걸음


광대를 넘어, 흑인을 넘어, 자신이고 싶었던 쇼콜라. 하지만 그 비극적인 끝이 예견되어 있는 것 같다. ⓒ판씨네마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층위를 걷어내고 쇼콜라에게 집중해야 할 건, 그의 달라진 생각 이후 행동으로 옮기는 직접적 '반기'다. 아니 '혁명'에 가깝다고 할까. 그 장면은 굉장한 충격과 함께 사이다 같은 속시원함을 선사하는데, 그 어떤 폭력·비폭력 혁명 또는 반기보다 매력적이다. 방법으로 보면 문학적이라고 할까 급수로 보면 고급지다고 할까. 


그의 마지막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다. 당대 흑인이 그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을 때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자리는 흑인의 자리가 아니고, 그 인기와 명성은 흑인의 것이 아니다. 아니, 흑인의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혁명의 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줄 뿐이다. 


혁명이란 수많은 실패와 희생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걸 알 것이다.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혁명의 빛이 조금이나마 비출 것이다. 쇼콜라는 그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혔고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잊히고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영화는 그의 '위대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가벼운 와중에 진중하게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그의 주위에는 흑인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을 보일 순 없었거니와 함께 하는 누구도 없었다. 혼자였다. 혼자였기에 완전한 한계에 직면하고 끝없는 방황을 했지만, 나아갔다. 당연한 걸 뒤로 하고 홀로 나아간다는 것,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나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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