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도서

마지막 한 줄이 선사하는 우정의 총량은 모든 걸 뛰어 넘는다 <동급생>

반응형



[서평] <동급생>


소설 <동급생> 표지 ⓒ열린책들



예술에 있어 '소품'과 일명 '작은 걸작'은 한 끗 차이다. 공통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면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의 영예를 안으며 2016년 최고의 영화로 우뚝선 <문라이트>는 제작비가 불과 5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품이 아닌, 작은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971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7년에 재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프레드 울만의 작은 소설 <동급생>(열린책들)이 재출간 40년만에 한국에 상륙했다. 작은 판형임에도 130쪽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소설은 어떨까. 그 자리에서 완주가 가능하기에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품을 가장한 작은 걸작이다. 


한스와 콘라딘의 꿈 같은 우정, 최선의 행복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을 다니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 슈바르츠, 1932년 2월에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소년이 전학온다. 저명한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 뭔가 '다른' 그 소년에게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는데, 함부로 다가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한스는 콘라딘이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한스에게 콘라딘은 우정의 로맨틱한 이상형을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친구였다. 


한스는 콘라딘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문학과 체육이라는 극점에 있는 것에서 말이다. 이내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 무엇도 그들의 우정을 방해할 순 없었다. 벽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표식이 나타났다든가 유대계 시민이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공산주의자들이 두들겨 맞았다든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보였다. 


화가 출신 작가는 이들의 우정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표현해낸다. 암울했을 당시 독일과 대비되는 자연 풍경은 한스로 하여금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와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황홀함을 선사한다. 


한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그 시절은 횔덜린의 아름다운 시로밖에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다. 시에 일가견이 있는, 시인이 인생의 꿈이기도 한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횔덜린이기도 한대, '이탈리아의 전령인 부드러운 미풍이여/그 모든 미루나무와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강이여'(<귀향>의 일부)와 같은 구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선의 행복을 표현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 정도였고, 한스의 가슴 속에 맺힌 행복의 이슬이 이 정도였다. 


마지막 한 줄로 위대한 소설이 되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종말이 코앞에 와 있었다는 걸.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종말의 전조들이었다는 걸. 1930년대 독일에서 독일 귀족과 유대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독일을 당연히 조국이라 생각하고 그에 충성을 다하며 자연스레 '독일인'이어도, 히틀러의 광기 앞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졸지에 '독일을 망치고 있는 유대인'이 된 한스, 콘라딘과의 불가항력적인 멀어짐도 비슷한 이유였다. 급기야 콘라딘을 피하기 시작한 한스,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얼마 있어 미국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한스, 어느 날 제2차 세계 대전 때 산화한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호소문이 도착한다. 산화한 동찰들 리스트를 읽어내리는 한스, 그곳에서 더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다 읽고 나면, 마치 소설 전체가 마지막 한 줄을 향해 수렴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 한 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러곤 지체없이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태반을 차지하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줄이 주는 충격은 여전하다. 


한 층위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하찮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우정 또는 사랑의 총량이 이리도 엄청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다른 층위를 '동성애'라는 코드로 풀어내 더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반면, 이 소설 <동급생>은 어떨까. 한 층위는 비슷한 수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층위가 주는 수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다. 자신과 가족과 시대까지도 뛰어 넘는, 즉 모든 걸 뛰어 넘는 우정의 총량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이 한 줄로 그 어떤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관련 콘텐츠를 가볍게 뛰어 넘거니와, 위대한 콘텐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 어떤 홀로코스트 작품보다 큰 울림


이 소설이 어줍잖게 홀로코스트를 끼워넣었다면, 명백한 소품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동급생>과 굉장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는, 비록 슬프고 아름답고 충분히 위대한 감동과 역설을 선사하지만 '작은 걸작'이 아닌 '소품'이라고해도 무방하다.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중심에서는, 생각보다 그 울림이 작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급생> 이상의 밀도를 가지고 충격을 주고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을 찾기 힘들다. '홀로코스트' 하면 즉각적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그래픽노블 <쥐>,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위대한 작품들이 생각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파급력을 느끼진 못했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더 심도 있고 치열한 단면을 엿볼 수는 있다. <동급생>은 홀로코스트를 작품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욱 끔찍히도 와 닿는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더 깊은 우정을 통해 많은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홀로코스트가 주는 절망감을 더 절절하게 전달하여, 더욱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랬다면 마지막 한 줄에서 받는 충격이 오히려 적었을 것이다. 그건 작품이 갖는 위치는 격하시키는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였기에 이 작품이 위대할 수 있었다. 작가의 탁월한 솜씨와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