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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악마와 같은 '자본', 그것이 만들어낸 슬프고 외로운 괴물 <로스트 인 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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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로스트 인 더스트>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하게 시작되는 이 영화, 비록 단편적으로 흘러가지만 갈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 사이에는 작금의 자본주의가 내뿜는 악마의 향기가 뭉실뭉실.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태평하기 짝이 없는 동네, 고객이 거의 없는 은행, 느닷없이 복면을 뒤집어 쓴 두 사람이 총을 들이대며 들이닥친다. 그런데 그들 뭔가 어설프다. 반면 강도 습격을 당한 은행 직원은 태연하다. 돈은 금고에 있고 자신은 열쇠가 없다는 것. 조금 기다리니 상급자가 온다. 그들은 그를 가격해 쓰러뜨리고 돈을 훔쳐 달아난다. 강도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들이, 고객이 없으니 돈도 별로 없을 이 동네의 은행을 왜 털었을까? 이곳은 미국 텍사스의 어느 마을이다. 


한편, 신고 전화를 받고 온 텍사스 레인저스 둘.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주 관할 법 집행 조직인 그들은, 그러나 굉장히 태평해 보인다. 시시껄렁 농담이나 주고받고 은퇴를 일주일 앞둔 상사는 부하를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그런 그들이 고작 몇 천 달러를 훔친 은행 강도 같지도 않은 자들을 제대로 추격이나 할까? 하지만 상사는 베테랑다운 식견과 감이 예리하게 번뜩인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이들 4명의 2 vs 2 양상이 큰 틀을 이룬다. 이 느긋한 추격전, 그렇지만 장소는 텍사스다. 옛날 무법자가 판을 쳤던 그곳, 주민들은 모두 총을 차고 다니며 보안관이 필요하지 않은 듯 행동한다. 광활한 대지, 탁 트인 시야, 끝모를 도로로 점철된 텍사스를 보면서 느끼는 여유와 느긋함이 이들에게서도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일까. 이 두 강도의 어설픈 짓은 작은 파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될까.


영화가 이정도로 그쳤다면 일찍이 '2016년 최고의 영화'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여유와 느긋함이 누군가에게는 절망과 파멸의 나락 같이 느껴짐을 알게 될 때,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어설픈 두 강도라는 걸 알게 될 때, 헛헛함과 쓸쓸함이 들이닥치는 걸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다. 곧 텍사스의 황량함과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먹먹함이 더해져 거대한 파도를 형성한다. 영화에 엄지를 치켜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세상 위에 우뚝 서 있는 신, 아니 악마와 같은 '자본'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 황량하게 보일 수 있지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과 파멸의 나락 같이 느낄 수도.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두 강도가 왜 은행을 털었는지, 그 이유가 절실하다. 이 둘은 다름 아닌 피를 나눈 형제인데,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이 은행에 넘어가게 생겼다. 더군다나 이들은 빛더미에 앉아 있어 무슨 짓을 해도 농장이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은행 털기다. 가족도 딸린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 분)와는 달리 감방에도 갔다 온 형 태너(벤 포스터 분)이기에, 주로 그가 앞장 선다. 


자, 여기서 영화 곳곳에 보이는 팻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텍사스의 광활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도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름 아닌 대출 안내판들이다. 빛이 있으면 담보 현금 대출을 신속하게 해준다는, 뭐 그런 것들. 아마 이 형제는 그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렁에 빠진 것 같다. '자본'이라는 거대 개미지옥에서, 세상 위에 우뚝 서 있는 신과 같은, 아니 악마와 같은 존재에게서 헤어나오려면 모든 걸 걸어도 모자르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텍사스 레인저스 둘. 헐렁한듯 집요하게, 가벼운듯 진중하게 강도 형제를 쫓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아무래도 서부극인 게 확실하다. 서부개척시대가 아닌 21세기가 그 시간적 배경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옛날의 낭만은 없다. 아니, 남아 있긴 하다. 누구나 총잡이이고, 보안관이 따로 필요 없으며,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한 광활한 대지는 여전하다. 그리고 여전히 백인이 지배하고 있다. 


대신 '은행'이라는 허울 좋은 '개자식'을 앞세운 자본이 들어왔다. 그 앞에 인디언이고 백인이고 다 무릎을 꿇었다. 은퇴를 일주일 앞둔 베테랑 마커스(제프 브리지스 분)에게 매일 '인디언'이라고 놀림 받는 알베르토가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를 날린다. 두 형제의 피맺힌 강도짓 뒤에 숨겨진 치떨리게 더러운 자본(은행)의 모습보다, 알베르토의 덤덤하게 말하는 사묻힘 뒤에 숨겨진 자본의 모습이 더 악랄하다. 


"150년 전만 해도 우리 조상들 땅이었어요. 지금 보이는 모든 게, 어제 본 모든 게, 저들의 증조부들이 빼앗기 전까진. 이젠 후손 놈들이 착취하고 있죠. 이번엔 군대가 아니라 저 개자식들 손으로."


이 영화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백인'인 두 형제의 절규하는 사연보다, 알베르토로 대변되는 '인디언'의 담담한 사연이 더 와 닿게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알베르토가 태너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이 구도는 뒤틀린다. 자신이야말로 이 자본주의 세상의 진정한 피해자라며 세상을 향해 갈긴 총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자가 다름 아닌 이 자본주의 세상의 '진정한' 피해자라니. 아이러니하다. 하기야,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니 그런 걸 확인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자본이 만들어낸 슬프고 외로운 괴물


자본이라는 악마와 그 악마가 만들어낸 피해자, 피해자는 곧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피해자가 자본을 등에 엎은 가해자로 보일 뿐. 이 지옥엔 괴물이 살겠지.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 두 형제다. 형보다 더 포악한 성질을 지닌 동생, 아버지를 죽여 가족을 지켜내고 이젠 돈을 빼앗고 사람을 죽여 동생을 지키려는 형,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러 떠나기 전에도 그들은 부러울 정도의 우정을 나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지막 전투에 나서는 전우 같다. 다신 못 볼 걸 알면서도 애써 슬픔을 감추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는. 그들은 서부 사나이니까.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얼까. 푼돈을 털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건 다름 아닌 그들이 '빛더미'에 올라 앉은 돈의 액수가 생각 외로 '푼돈'이기 때문이다. 2만5천 달러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3000만원 정도 되겠다. 이 형제는 그 돈이 없어서 한 달에 5만 달러씩 석유가 나오게 될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을 넘겨야 하는 것이고, 은행은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알고 살아생전 어머니께 접근해 대출을 받게 한 뒤 그걸 빌미로 농장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은행을 털어서 은행 빛을 갚고 농장을 되찾아 전염병처럼 퍼지는 가난의 끝없는 되물림을 자신의 대에서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불보듯 뻔한 희생으로 말이다. 마커스와 대면하게 된 토비의 대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가난은 전염병 같죠.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지며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해요. 하지만 내 자식들만큼은 안 됩니다."


이 묵직함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안타까움이 있다. 자본이 선사한 괴물일진대, 오로지 내 가족만 생각하는, 내 가족이 아닌 자는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철저한 원시가족주의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자본이 사라질리는 만무하지만, 시대는 역행하고 세상은 텍사스 들판보다 더 황량해질 것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쯤되면 무섭고 두렵다.


우리의 훌륭한 보안관 마커스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제 은퇴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 직접 찾아가 봤지만 기세등등 살벌하고 충성스러운 '집 지키는 개'가 된 그에게 쫓겨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 '정의'를 알고 또 외치고 있지만 자본이 만들어낸 외롭고 슬픈 괴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따위 개나 줘버리지. 일단 살고 봐야지 않겠냐, 하고 외치는 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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