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
<천공의 벌> 표지 ⓒ재인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8 지진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걱정이었던 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연상케 하는 '원전 사고' 여부였다. 이번 대지진의 진앙지인 경주에서 불과 27km 떨어진 곳에 월성 원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성 원전은 이번 지진으로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생한 사건이다. 월성 원전은 규모 6.5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5.8 정도의 지진이 일어날 거라는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설계라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일이 터지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원전 사고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995년 일본 고베에 규모 7.0을 넘어서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 역사 70년 만에 최악의 피해를 주는데,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당시 일본 GDP의 2.5%에 달하는 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같은 해 12월에는 '꿈의 원자로'라 불린 고속 증식로 '몬주'의 나트륨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방사능이 유출된 건 아니었지만, 사고 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많은 비난을 샀다. 일은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제대로 대처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지진과 원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지진이라는 게 예측하기 힘든 사고라서 원전처럼 절대적 안정이 필요한 것에 상극인 것이다. 원전을 주체로 둔다면, 위험한 건 지진뿐만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수많은 지진으로 그에 대한 대비라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후쿠시마 원전 주위는 아무도 살지 못하는 폐허가 되었단 말이다. 이건 이제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최고의 안전성이 필요한 원전에 테러 위협이 가해지다
일본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 10년 후인 1995년, 한신 대지진과 고속 증식로 몬주의 나트륨 유출 사건 사이에 소설 <천공의 벌>(재인)을 내놓는다. 다름 아닌 '몬주'를 모델로 한 고속 증식로 '신양'을 무대로 한 테러 스릴러다. 소설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실제 모델에서 그런 사건가 발생했으니 그야말로 '예언'이나 다름 없는 '소설'이었는데, 16년 후엔 소설에서 내보인 '경고'가 실체화되었으니 씁쓸하기 그지 없다 하겠다. 추리 스릴러 소설에서조차 경고를 보인 원전 사고가 실제로 터졌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소설은 그 어떤 일에도 제대로 대처해야 하는 최고의 안정성이 필요한 원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극비리에 일본 자위대에 납품할 예정인,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헬기 '빅 B'. 최종 비행만을 남겨두고 있는 때에 누군가에 의해서 접수당한다. 헬기는 테러범에 의해 무선 조종으로 고속 증식로 '신양' 상공으로 가 호버링 한다. 시간이 지나면 연료가 떨어져 대량의 폭발물과 함께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 원전 대폭발이 일어날 건 자명한 일, 남은 시간은 8시간이다.
테러범이 전국민이 알게끔 하는 걸 전제로 요구한 건 다음과 같다. 현재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을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 것,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은 건설을 중지할 것, '신양'은 정지하지 말 것. 헬기를 이동시키려 하지 말 것. 일본 정부를 비롯해, 자위대, 원전 관계자, 경찰들이 총출동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테러범의 요구대로 모든 원전을 정지할까? 엄청난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니면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헬기가 추락해 원전이 폭발할 것을 감수하고 테러범과 협상에 들어갈까?
소설은 다분히 문제의식을 표출하며, 실수로 헬기에 아이가 타게 되는 사고를 넣어 서스펜스를 극대화 하는 한편, 일찌감치 범인의 정체를 보여 주고는 각각 다른 지방의 경찰이 범인의 윤곽을 서서히 좁히는 과정을 긴장감 있고 치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압권이자 소설의 중추는 '원전'이다. 혹여 어마어마한 사고가 터질지도 모르는 '신양'을 둘러싸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벌이는 설전과 암중모색, 대책강구 등이 이 소설을 보는 최대 묘미이다. 정녕 선택이 쉽지 않은 딜레마다. 이는 곧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는 원전의 실체와 같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깨워라!
"원전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도 피해를 입게 돼. 말하자면 나라 전체가 원전이라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셈이지. 아무도 탑승권을 산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그 비행기를 날지 않도록 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럴 의지만 있다면. 그런데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아. 승객들의 생각도 모르겠고. 일부 반대파를 제외하곤 대부분 말없이 좌석에 앉아 있을 뿐 엉덩이조차 들려고 하지 않아. 그러니 비행기는 계속 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비행기가 나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비행기가 잘 날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어." (본문 423쪽 중에서)
소설에서 사람들 눈을 속이며 자연스레 행동하는 범인이 피력하는 주장이다. 그는 비록 테러를 일으키고자 하는 악질일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원전 사고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다. 이번 경주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때 내가 원전을 걱정했을리는 없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동일본 대지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범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라 전체'가 원전에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전은 위험하기 짝이 없기에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면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원전을 안전하게 잘 돌아가게끔 하면 될 일이다. 그것도 가능하지 않다. 역시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원전을 대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뿐일 거다. 계속해서 원전 사고가 일어나는 것. 일은 일어나고 대처하는 거라고, 사고가 일어나야 그나마 경각심을 갖지 않을까? 범인은 그런 논리 하에 이와 같은 초유의 테러 위협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개인적으론 '모순에 부딪혀 돌파구 없는 분노' 때문일 것이고. 그 분노가 사람들 무관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결국 료스케의 고통이나 도모히로의 죽음이나 그 원인은 같은 것에 있지 않을까. 둘 다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피해의 근원은 무엇인가... (중략) 집단 괴롭힘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모히로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보았던 그 가면 같던 얼굴들. 아이들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가면을 벗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하는 군중'을 형성한다. (본문 632쪽 중에서)
범인이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 사건은 아마도 아들의 죽음일 것이다. 아들의 죽음에는 반 친구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이 있었을 거라 추측된다. 하지만 그들도 피해자다. 범인의 아들은 원전 관계자의 아들이라는, 아들을 괴롭힌 아이들의 리더는 반원전 관계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더 큰 문제이자 분노의 진정한 발화점은, 그 사건을 확인하면서 보게 된 '가면 쓴 얼굴'들. 그 얼굴은 곧 '침묵하는 군중'에 다름 아니다. 침묵은 원전 사고라는 크나큰 대재앙 앞에서도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해 그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아간다. 그들은 명백한 피해자이지만, 또한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피해 자각이 없는 피해자, 가해 자각이 없는 가해자.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아니, 소설로 읽었다면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침묵하는 군중은 아닌지, 자각 없는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아닌지, 국민을 속이려 드는 정부 관계자는 아닌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원전 관계자는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진은 더 이상 남의 나라, 남이 당한 불가항력의 사고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원전에 이상이 생길 정도의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일 뿐이다. 5.8이 일어났으니, 우리나라 원전 평균 내진 설계 기준인 6.5가 일어나지 않을리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에 관한 한 '침묵하는 군중'임에 분명하다. 침묵하는 군중은 '침몰하는 배'를 절대 끌어올리지 못한다. 함께 침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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