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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거짓 위에서라야 전해지는 진심, 그런 진심이 연속된 하루 <최악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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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최악의 하루>


현 남친과 전 남친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는, 진심을 전할 여력조차 마련되지 않은 '최악의 하루' ⓒCGV 아트하우스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좋아해요.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하는듯, 넋두리를 하는듯, 어쩌다가 홀로 남겨진 은희는 정체모를 말을 내뱉는다. 그녀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였다. 현 남친과 전 남친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하루를 시작할 때는 괜찮았었는데. 우연히 길을 헤매는 일본인 소설가를 만나 아무 꺼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어쩌다가 그녀는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비단 그 하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연인과 초면을 향한 연기, 생각과는 반대의 아이러니


연기 못하는 연기지망생 은희(한예리 분). 수업을 마치고 나와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난다. 은희는 일본말을 못하고, 료헤이는 한국말을 못한다. 둘 다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은희는 설명하기가 어려워 직접 함께 료헤이가 찾는 곳으로 간다. 시간이 남아 카페로 향한 그들.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보기에 풋풋하고 설레기까지 한 듯한 대화가 이어진다. 왠지 편해보인다. 


은희의 '최악의 하루'에서 유일하게 최악이지 않은 때가 바로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 료헤이를 만나는 때다. ⓒCGV 아트하우스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가 유일하게 하루 중 '최악'이지 않은 때가 바로 료헤이를 만나는 때이다. 말도 안 통하니 속마음을 제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니 내 본 모습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가 편할 수 있다. 연기 못하는 은희는 아이러니하게 일상 생활에선, 즉 사랑의 대상에겐 연기를 잘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 즉 처음 보는 사람에겐 연기를 잘 못하니 그 모습이 부담 없이 다가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연기를 하지 않은가. 


사람은 연기자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연기를 한다. 그건 주로 만나는 사람마다 달라진다. 처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건 연기보다 본능에 가깝다. 초면, 연인, 가족, 상사, 동료, 후배, 친구 등. 여기서 가장 마음 쓰이는, 즉 가장 많은 연기를 필요로 하는 이는 누굴까? 연인이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하면, 아니 사실 가장 마음이 덜 쓰이는 이는 처음 보는 사람일 것이다. 굳이 연기를 하면서까지 잘 보이거나 자신을 감추고 그에게 맞는 모습을 보이려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은희가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 태도


은희는 료헤이와의 대화 중에 온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의 메시지를 받고 서촌에서 남산으로 향한다. 현오는 아침드라마 조연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모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타났다.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은희가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게 오버하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아주 꼴 보기 싫다. 다만 그는 아주 잘 생겼기에, 그런 모습이 꼴 보기 싫다는 거지 본판은 아주 좋아라 한다. 은희를 밤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현오, 언제나처럼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다 선글라스를 뺏어 도망가려는 은희를 향해 한마디 한다. "유경아!" 은희는 선글라스를 밟아 부셔버리고 산을 내려간다. 


현오와 있을 때면 은희는 장난꾸러기가 된다. 여느 커플처럼 그와 티격태격하며 귀엽게 지낸다. 아니, 그렇게 지내고 싶은데 현오는 그렇지 않다. 꼴에 티비에 나온다고 유세떠는 것 같다. 그리고 몇 마디 안 가 은희의 과거를 들춘다. 잠시 현오가 옆에 없을 때 유부남과 바람을 핀 은희, 사실 은희는 현오와 함께 있을 때면 너무 힘들다. 우울했다가 즐거웠다가, 왔다갔다 하는 게 눈에 보인다. 물론 현오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현오도 현오 자신이 병신같다고 한탄한다. 이 커플, 답이 없다. 


은희는 현오가 너무 좋으면서 너무 싫다. 마음이 떠난 것 같은데,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끈만 존재하는 것 같은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지 않나 보다. ⓒCGV 아트하우스



씩씩거리며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서서 아래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남자 하나가 오는 게 아닌가. 다름 아닌 은희가 바람 핀 유부남 운철(이희준 분)이다. 아까 현오를 만나러 가는 도중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왔댄다. 대단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 은희와 운철은 커피 한 잔 하며 근황을 묻고 답한다. "진심이 어떻게 진실을 이겨요?"라며, 행복하지 않으려 헤어진 아내와 합한다는 운철. 은희는 어이가 없어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갈 길을 간다. 


운철과 있을 때면 은희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우린 이루어질 수 없나 봐요. 우리 다신 만나지 마요. 또 만나면 나도 나를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 같은 대사를 읊을 것만 같다. 그건 운철도 마찬가지다. 말인지 방귄지 모를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60년대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대사를 읊는 게 아닌가. 그들은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아니, 연기를 하는 게 맞다. 그럼으로써 좀 더 현실적인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절대 할 수 없는 걸 그(그녀)를 만나며 할 수 있으니까. 


얄궃게도 거짓 위에서라야 전해지는 진심


이들 삼각 관계는 지구상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적어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서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관계 설정 중 하나다. '리얼리티하다'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하다. 그럼에도 현실적이긴 하니 그런 말을 붙일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이렇게 연극적인지? 왜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운철과 있을 때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은희. 연기 연습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은희에게 있는 여러 '진심' 중 하나일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



연기는 거짓말과 다름 없다. 내가 아닌 사람을, 내가 처하지 않은 상황을 연기하는 것과 "연기하고 있네"할 때의 그 연기도 모두 그렇다. 그건 엄연히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진심'을 전하고자 한다. 진심을 전하고자, 소통다운 소통을 하고자, 진실을 숨기는 게 아닌가. 만약 진실을 전하게 되면 진심과 소통은 쓰레기가 될 뿐이다. 운철이 은희에게 말한 궤변이 생각난다. "진심이 어떻게 진실을 이겨요?" 아마 진실이 갖는 힘이 훨씬 셀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 이기길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진실을 숨겨야 할 때가 수없이 생긴다. 얄궃게도 그래야만 진심이 전해진다. 진실을 숨긴 거짓 위에서라야 진심이 전해지는 것이다. <최악의 하루>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거짓 위에서 춤춘다. 거짓 위에서 진심을 전하고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딱 한 커플만 빼고. 다름 아닌 은희와 료헤이다. 그들은 비록 소설가와 연기자라는 거짓 위에서 진심을 전하는 걸 가장 좋아하고 잘 하는 이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거짓이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절대적으로 진심을 위한 거짓이 존재해야 하는 건가. 


감독의 의도도 훌륭하지만 그에 맞춤복인 듯한 배우들의 열연도 최고였다. 은희, 료헤이, 현오, 운철. 3명의 각기 다른 매력과 찌질함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 그리고 그에 맞춰 마치 다른 인격인 양 변하는 은희. 은희와 현오와 운철이 한데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데, 심장이 쪼그라드는데 발가락도 쪼그라드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거다. 연기 속의 연기가 서로 출동하면서 일어나는, 난감함, 찌질함, 억울함, 코믹함, 시원함 등의 온갖 감정들의 폭발이다. 그 복잡미묘함을 투박한듯 보이게, 즉 아주 섬세하게 연기를 해냈다. 이런 영화라면,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겠다. 파도 파도 또다른 의미를 받으면서, 지루하지 않은 코믹함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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