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영화

상상할 필요 없다, 그냥 따라 오면 된다 <언더 워터>

반응형



[리뷰] <언더 워터>


상어와 여인의 한판 승부? 상상이 안 간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영화는 말한다. '그냥 따라와' ⓒUPI코리아



화보용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리따운 여인이 서핑을 즐기는... 카메라 워킹도 그에 맞춰져 있다. 적절히 치고 빠지는 역동성이 제격이다. 모든 시선이 주인공을 향해 있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그런데 왜 불안할까?


주인공은 의대생으로, 슬럼프에 빠져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듯 이름 모를 해변을 찾았다. 아무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꼭 한 번씩 던지는 말, '조심해요'. 뭔가 있는 걸까. 


영화가 시작할 때 해변에서 어느 꼬마 아이가 떠내려온 카메라 헬멧을 주운다. 카메라를 가득 채운 상어의 벌린 입과 날카로운 이빨. 꼬마는 어디론가 달려간다. 상어가 출물할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상어와 주인공 여인의 한판 승부인가? 상상이 안 간다. 


상상할 필요 없다, 그냥 따라 와라


화보 찍는 초반부, 하지만 그것조차 뭔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긴장된다. 상어의 존재를 미리 내비췄기 때문일까? 괜찮은 선택인듯. ⓒUPI코리아



영화 <언더 워터>는 시작부터 스토리 전개가 추측 가능하다. 상상이 잘 안 될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있다는 것일 게다. 왠지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그러나 지구 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게 아름다운 해변에서 벌이는 여인과 상어의 사투를 아주 빼어나게 연출할 자신이 감독에게 있다는 걸로 보인다. 굳이 상상할 필요 없이 그냥 따라 와라. 


정작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선 그럴 기미가 전혀 없다. 평화롭게 서핑을 즐기는 여인 낸시(블레이크 라이블리 분). 그럼에도 불안감이 엄습하는 건, 파도가 집채보다 크고 낸시가 불안정한 상태고 시작부터 상어를 봤기 때문일 거다. 그럼 이미 긴장된 상태라는 걸까. 


그런 와중에 특히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을 극대화시키는 건 카메라의 시선이다. 간간히 물 아래에서 낸시를 주시하는 듯한 시선을 보여주는 게 왠지 상어의 시선 같다. 상어가 아니라고 치더라도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곧 낸시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늦지 않았을까? 동물의 감은 사람의 감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영화 <테이큰>으로 회춘한 리암 리슨과 심리 게임이 가미된 액션 3부작을 비교적 괜찮게 내놓은 감독인지라,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순전히 배경과 카메라와 음악으로만 보여주는 신세계다. 짧은 러닝타임도 여기에 한 몫 하는데, 덕분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정신 차릴 새가 없다. 


스릴러에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가미하다


1인 고립 영화답지 않게 스릴러에 인간 승리 드라마를 가미했다. <그래비티>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데, 과연 그 향기가 좋을까 나쁠까. ⓒUPI코리아



영화 곳곳에서 향기가 난다. 여러 영화의 향기가. 감각적이고 스피디한 전개는 <127시간>을 연상케 하고, 낸시가 고독하지 않게 곁을 지키는 갈매기 '스티븐 시걸'은 <캐스트 어웨이>의 배구공 '윌슨', <터널>의 강아지 '탱이'가 생각나게 한다. 상어가 출현하니, <죠스>나 <딥 블루씨>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짜깁기'나 '짝퉁'의 느낌은 들지 않는다. 외려 클리셰를 적절히 잘 가져다 썼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나아가 대단하다고 느낀 건, 이 영화가 일명 '상어 영화'의 재발견이라 불릴 정도의 퀄리티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상어는 항상 출현을 예견해주는데,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장르가 공포 아니면 액션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게끔 진행된다. 


<언더 워터>는 스릴러와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가미했다. 공포가 아닌 스릴러가 될 수 있었던 건, 낸시와 상어의 쫓고 쫓기는 일방적이지 않은 추격전이 시종일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상어에게 당해낼 수는 없는 법, 와중에 낸시는 계속 공격을 당하고 몸은 회복불능 상태로 빠르게 진행된다. 거기에 '물'과 '햇빛'이라는 자연과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화들짝 놀라기 보다 심장이 쫄깃한 상태가 지속된다. 


예측할 수 있듯, 그녀가 살아난다고 가정하면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필수다. 끝없이 계속되는 위협에도 자신을 놓치 않고 살아나가려는 불굴의 의지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어간다. 여기서 <그래비티>의 향기가 물씬 풍겨난다. 스톤 박사가 내디딘 한 발이 꽉 쥐는 낸시의 주먹과 오버랩되는 것이다. '상어 영화'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 듯하다. 부디 이정도로만 만들어 달라. 


악랄하고 무차별한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


주인공 여인이 악랄하고 무차별한 상어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가장 궁금하다. 더욱 악랄하고 무차별하게 맞대응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UPI코리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낸시는 유일한 여성이다. 두 명의 여성이 나오지만 낸시가 영상통화하는 여동생과 문자로만 보여지는 친구 뿐이다. 카메라 헬멧을 주은 아이, 낸시를 해변까지 태워주는 이, 해변에서 서핑 삼매경인 두 명, 낸시의 도움 요청과 만류를 무시한 이가 모두 남자인 것이다. 그들 중 세 명은 낸시의 만류를 무시하고 상어에게 먹히고 만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여자가 도움을 청할 때 무시하는 건 남자가 해야 할 짓이 아니다, 라고 배웠다. 더군다나 여자가 만류하면서 도와주려 하는데 그 또한 무시하는 처사라니, 예전이었으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 남자들을 모조리 집어 삼킨 상어와 말이다. 


상어는 뭘까. 전투 준비가 충만한 남자의 상징일까. 여자의 도움 요청과 만류를 통한 도움을 무시하는, 남자답지 못한 남자를 해치우고 여자에게 진짜 남자의 힘을 보여주려는 걸까.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러서야 하나. 사실 낸시는 이미 전투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서핑 준비의 자세, 서핑의 도구들이 마치 전쟁을 하러 나가는 병사의 모습이다. 그녀는 전쟁에서 이길까, 질까. 불굴의 의지를 보인다는 건, 이긴다는 뜻일까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는 뜻일까. 


과도하고 돼먹지 못한 해석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여전사는 일전에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랄하고 무차별한 공격에 대응하는 건 더욱 악랄하고 무차별한 맞대응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렇지만 맞대응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 더욱 악랄하고 무차별한 맞대응이 아닌, 다시는 그런 식의 공격을 할 수 없게 무용지물 상태로 만드는 게 맞을 것이다. 여러 방법이 있지 않을까. 

728x90